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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촛불 이후, 우리는 어떤 나라를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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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1 ㅣ No.1408

[2017년 새로봄] 촛불 이후, 우리는 어떤 나라를 바라는가?

 

 

격동! 2016년 가을에서 2017년봄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격동의 6개월이었습니다. 이 역사적 변화를 만들어 낸 이들은 어느 특정 세력이 아닌 국민이었습니다. ‘촛불 시민’이라고 불렸던 국민이 바로 그 변화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촛불은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냐’는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촛불 이전의 국민은 대한민국을 대의민주주의국가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또는 지방자치단체장을 뽑아 정해진 기간에 나라를 잘 관리하도록 역할을 주고 국민은 자신의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모습들이 자꾸만 드러났습니다. 믿고 맡겼는데 나라 살림도, 대외 관계도 국민을 위해 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잘못된 정치 행위에 희생되는 일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국민은 외쳤습니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은 국민을 위한 봉사자일 뿐이다!” 커다란 변화입니다. 나라가 하는 일, 대통령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적법하다고 여기던 국민이 이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따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탄핵은 대통령의 권한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국민의 주권을 되찾아 온 것입니다. 결국,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한 18대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파면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라는 ‘새로운 나라’

 

이제 새로운 나라, 올바른 나라를 세워야 할 때입니다. 각계각층에 서 어떤 나라가 올바른 나라인지에 대해 목소리들을 내고 있습니다. 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치권은 새로운 권력을, 경제계는 경제민주화를, 문화계는 자유롭고 창조적인 문화발전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새로운 나라, 올바른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꿈이요, 이상이요, 목적이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정치와 경제, 문화와 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새로운 세상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첫째는 차별이 없는 나라입니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차별이 존재합니다. 어떤 차별은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어떤 것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구분이 차별을 낳습니다. 노동자와 관리자를 나누고, 여성과 남성을 나누고, 가옥주와 세입자를 나누고, 부자와 빈자를 나누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를 나누고, 서울에 사는 이와 지방에 사는 이를 나눕니다. 신자와 비신자를 나누고, 좌파와 우파를 나누고, 건강한 이와 아픈 이를 나누고, 결혼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을 나누고, 싹싹한 사람과 답답한 사람을 나눕니다.

 

이런 식의 구분에 따른 차별이 결국 대한민국을 비대칭으로 만들었습니다. 대립과 분열을 만들었습니다. 모든 국민이 꿈꾸는 나라는 차별 없는 나라입니다. 모든 이가 인간으로서 존귀한 대접을 받는 나라, 모든 이가 법 앞에 평등한 나라가 우리가 원하는 나라입니다.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의 구별 없이 모두를 끌어안는 것이 국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끌어안듯. 그래서 조국인 것입니다.

 

둘째는 안전한 나라입니다. 촛불의 중심에 세월호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자신들의 아픔과 억울함만 주장했다면 촛불의 중심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세월호 가족들은 세월호 참사를 개인적인 불행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분노와 울분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이 사회의 불공정하고 부조리한 모순과 연결했습니다. 개별적 보상의 차원에서 문제를 풀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했습니다. 사회적 연대를 통하여 다시는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며 더 큰 변화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구조적인 문제로 인하여 아픔이 발생하는 또 다른 현장으로 달려가 그들과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다시는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세월호 운동으로 그 폭을 넓혀간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가 마주했던 것은 300여 명의 귀한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한 안전불감증 대한민국의 민낯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월호 운동의 핵심 메시지는 ‘안전한 대한민국’입니다. 안전을 뒤로 미루게 되는 이유는 시간과 돈과 불편 때문입니다. 즉 경제성과 효율성을 인간 생명보다도 우선시하는 잘못된 가치관 때문입니다. 빠르면서 안전한 것은 없고, 경비를 줄이는 안전은 없으며, 편안한 안전은 없습니다.

 

셋째는 기회가 골고루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대한민국은 수많은 국민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민 개개인이 대한민국을 이루는 중요한 축입니다. 그중 한 축이라도 무너지면 대한민국은 균형을 잃고 맙니다.

 

모든 축이 건강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만, 특정 계층의 대한민국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대한민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약한 축을 보호하고 보완해야 합니다. 기회를 골고루 준다는 것은 강자에게도 하나, 약자에게도 하나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강자는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강해지는 반면, 약자는 가진 것마저도 잃고 더 많이 약해질 것입니다.

 

기회균등의 목표는 강자도 서고 약자도 설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하는 흙수저, 금수저 논란이 우리사회에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소위 흙수저라고 불리는 약자들은 헤어 나올 수 없는 늪과도 같은 현실에서, 모든 것에서 배제당하고 기회를 박탈당하는 아프고 쓰라린 경험을 합니다. 이런 사회를 건강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국민소득이 아무리 올라가도, 수출을 아무리 많이 해도, 고학력자가 아무리 많아도 ‘그들만의 리그’가 존재한다면 그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기회를 나눈다는 것은 모두가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존재로 대우받고, 단 한 사람도 배제되지 않는 나라가 건강하고 올바른 사회입니다.

 

 

개혁의 원칙은 ‘예수님처럼’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많은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위의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의 가르침에 근간이 되는 인간 존엄성에 기반을 둔 입장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피조물(창세 1,26-27)의 얼굴을 그대로 보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입장에서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그 사회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모습이 되도록 헌신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별 없는 나라, 안전한 나라, 기회가 골고루 주어지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를 향한 가르침이나 요구이기 보다는 무엇보다 먼저 교회 스스로 하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지난해 12월 새로운 세상을 위해서 먼저 교황청 개혁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12가지 개혁의 원칙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개인의 책임(개인적 회심) 2. 사목적 관심(사목적 회심) 3. 그리스도 중심주의 4. 합리성 5. 기능개선 6. 업데이트 7. 맑은 정신 8. 보조성 9. 단체성 10. 보편성 11. 전문성 12. 점진성

 

교황께서 제시하신 개혁은 포괄적 개혁입니다. 자고 일어나면 일순간에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리는 기적 같은 변화가 아니라 꾸준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개혁입니다. 이 원칙이 비단 교황청 개혁에만 해당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작은 공동체의 개혁이든, 한 국가의 개혁이든,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원칙으로 개혁을 이루어 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원칙을 통틀어 한마디로 말한다면, ‘예수님처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이미 커다란 개혁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개혁이며, 그 사람이 다시 하느님이 되신 개혁입니다.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통섭과 융합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 쉽게 이야기하자면 “모든 이에게 모든 것”(1코린 9,22)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낮아져야 합니다. 개혁은 그 낮아짐에서부터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나라! 그 나라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하느님 나라입니다. 모두가 바라는 나라! 그 나라는 광장의 소리가 빠짐없이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펼쳐지는 나라입니다.

 

* 나승구 신부는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1991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현재 서울대교구 사회사목국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함께, 2017년 6월호,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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