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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지를 찾아서: 해외 성지 (20)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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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4 ㅣ No.1676

[성지를 찾아서] 해외 성지 (20)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어둠 속에서 빛… 가시관을 깨닫다

 

 

성탄절이나 부활절, 사순시기면 매스컴으로 접하게 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낮밤으로 가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취재차 합류했던 가톨릭신문사 해외성지 순례단은 기간 내내 잘 짜여진 일정으로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는데, 바티칸을 찾기 전날 밤 늦은 시각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야경을 보는 ‘번개 스케줄’이 성사되어 예정에도 없던 야간 순례에 나섰다. 밤에도 환히 불을 밝힌 성 베드로 대성당과 그 앞 성 베드로 대광장은 잠못 이루고 찾아오는 순례객들을 양팔 벌려 반겨주었다. 세계 하느님 집의 중심인 성 베드로 대성당은 종족, 언어, 관습을 초월하여 어둠을 밝히며 말없이 우리를 환대하였다.

 

 

밤에도 두 팔 벌려 찾아오는 순례객 맞아

 

물론 지금은 철거를 했겠지만, 성탄절을 훨씬 지나서 기자가 바티칸을 찾았을 때까지도 성 베드로 대광장을 크고 아름다운 구유와 트리가 밝혀 주고 있었다. 구유에서 탄생한 메시아 예수가, 천주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103위 성인을 배출한 한국에서 찾아온 순례객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 같았다. 관광객들이 자취를 감춰서 조용해진 성베드로 대성당의 내부를 제외한 광장 회랑 오벨리스크 다섯 개의 성당문, 2개의 분수 등을 여유롭게 돌아보며 사진도 찍었다. 한꺼번에 20만 명까지 수용가능한 베드로 광장은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광장 입구에서 대성당까지 무려 300m, 원주형 기둥(284개)과 사각 기둥(88개)이 마치 어둠속에서 사열이라도 하듯이 한국 순례단을 깎듯이 맞아준다. 기둥 위에는 성인, 교황의 대리석상 140개가 올라서 있다. 광장 분수 옆 뷰 포인트에서 보니, 네 줄의 기둥이 딱 하나로 겹쳐져 보인다. 이런 것까지 신경써서 지은 건축가의 세심한 배려가 놀랍다. 광장 양 옆의 거대한 회랑은 신자들을 품어안는 그리스도의 양팔같다. 그리스도의 몸인 베드로 대성당이 베드로 대광장을 팔처럼 벌리고, 하느님의 집에 오는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맞아들이는 것이다.

 

 

다 닳아버린 베드로청동상 오른발

 

본격적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순례는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뿌리는 비를 맞으며, 아침 일찍 검색대를 통과하여 무선안내기를 귀에 꽂은 채 베드로 대성전 지하 교황들의 무덤부터 찾았다. 1984년 대구를 방문하였던 평화의 사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고 싶었다. 입구에는 크고 거창한 교황 석관도 많았지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무덤은 별 특색없이 겸손하고 평범하였다. ‘역시’ 싶은 마음에 가슴이 벅찼다. 요한 바오로 2세의 무덤은 안내자들이 지키고 서서 사진촬영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순례객들이 너무 밀려들어서 멈춰 설 수도 없었다. 지하 교황들의 무덤을 보고 올라오니 초대 교황 베드로 청동상이 우리를 맞았다.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제작한 사도 베드로 브론즈상은 왼손에 천국의 열쇠를 잡고, 오른손으로 천국을 가리키는데, 오른발가락은 거의 다 닳아버렸다. 베드로 대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이라면 누구나 베드로 사도상의 오른쪽 발등에 입맞춤하고, 전대사를 받는 전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의 무덤위에 3번 지어지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핵심구역은 중앙 제대와 미켈란젤로 돔 아래쪽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무덤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림처럼 베드로(초대 교황이자 순교자) 사도의 무덤 위에 크게 봐서 3번 지어진 구조이다. 가장 먼저 지어진 붉은 색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과 초기 로마교회 순교자들의 무덤인 네크로폴리스로 구성된 기념당이다. 아주 작다. 그 위를 덮은 푸른 색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에 지은 성당이다. 검은 색으로 된 제일 윗부분은 오늘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1626년에 완공된 르네상스 시기 대성전이다. 붉은 색 첫 기념당은 서기 90년경 교황 아나클레토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웠다. 그뒤 349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네로 황제 때 자행된 첫 기독교 박해에서 순교한 베드로가 처형된 원형 경기장을 헐고 성전을 세웠다. 이 성전은 1100년경까지 존속하였으나 반달족, 사라센족, 노르만족 등의 약탈과 개보수에 의해 거의 원형을 잃어버렸다. 신이 내려준 미켈란젤로 등에 의해 176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베드로 대성당은 세로가 가로보다 긴 ‘라틴형 십자가’ 형상을 띠고, 1626년 11월 18일 축성되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1517)을 부르짖고 그로 인해 신·구교가 분리되는 진통을 겪으면서 공사는 제자리걸음을 치기도 하였다.

 

 

세로가 가로보다 긴 라틴 십자가 형태

 

성당에 들어가면 오른쪽 입구에 미켈란젤로가 25세에 완성한 피에타상을 볼 수 있다. 기자가 갔을 때는 피에타상의 훼손을 막기 위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을 지닌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들어간 유일한 작품이다. 예수의 주검을 안고 있는 성모님의 가슴 옷자락에 서명이 들어있다. 이 피에타상은 마치 성령으로 잉태한 정결함을 나타내듯 성모님의 얼굴은 아주 앳되게, 사람들의 죄로 괴로웠던 성자 예수는 처절하게 죽은 모습이어서 보는 순간, 무뎌진 양심이 아파오는 자극을 받는다. 중앙 제대에 있는 베드로의 청동 성좌의 위쪽에는 삼위일체의 한 분이신 성령을 상징하는 하얀 대리석 비둘기가 조각되어 있다. 베드로 청동의자의 네 다리는 동방과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교부(교회박사) 가운데 4명이 잡고 있다. 앞쪽에는 암브로시오와 아우구스티노(주교 모자를 쓴 두사람) 성인, 그리고 뒤쪽의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아나타시오 성인이 청동의자를 잡고 있다. 이외에도 성당에 있는 다섯 개의 문(聖門, 성사의 문, 중앙문, 선악의 문, 죽음의 문)과 대성당 내부의 44개 제단, 395개의 조각과 135개의 모자이크화가 내벽과 돔 안쪽을 장식하고 있다.

 

 

엄청난 힘 느껴도 매몰되지는 말아야

 

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 중앙제대 주변에는 성녀 베로니카, 성녀 헬레나, 성 안드레아, 성 론지노 대리석상이 각각 사도와 성인의 상징인 십자가 베일 창을 잡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베드로 대성당에는 성녀 헬레나(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가져온 예수님 십자가 보목, 성녀 베로니카가 그리스도의 얼굴을 닦아준 베일의 일부분, 그리스도께서 운명한 다음 사망 확인을 위해서 당시 검시관이었던 론지노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 등이 보관되어 있다. 사순 마지막 시기인 성주간에는 십자가, 창, 베일 등의 유품이 일반에게 공개된다. 베드로 대성당과 광장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면서도, 그 내부의 어느것 하나 조화를 이루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을 보면 교회의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교회가 없었다면, 이런 엄청난 작품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남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엄청난 성지가 지닌 예술적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동경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

 

 

미켈란젤로 돔에서 가시관 느껴야

 

“‘(한 달 생활비가) 5만 원은 모자라고, 10만 원은 남는다.”고 한 천상영혼의 작가 고 권정생이 쓴 ‘하느님, 하느님 우리 하느님’을 보면 사랑이신 하느님은 괴롭고, 아프고, 슬프고, 죽을만치 힘들 때라야 만날 수 있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데, 처음에는 네 발자국이었다가, 끝에는 두 발자국만 남는 사랑, 즉 힘겨워하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안고 가는 하느님 사랑의 본질을 만나지 않고는 성지순례도 단순한 관광에 지나지 않는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높고, 크고, 아름다운 중앙 돔(미켈란젤로의 돔)에서 골고타 언덕으로 끌려가던 예수님이 피흘리며 쓰신 가시관이 오버랩될 때, 있는 힘을 다해 성지를 개발하고 성물을 보존한 성녀 헬레나의 굳센 믿음을 우리 생활속에서 되살릴 수 있을 때, 성지 순례는 아름다워진다. 그렇게 순화된 마음으로, 우리 주변의 초라한 성지를 되돌아보는 마음이 생길 때,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든 시나이산의 새벽 순례도, 이슬람 유다 기독교의 긴장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팔레스타인 순례도, 엄청난 예술로 승화된 유럽성지도 하나의 의미로 남게 된다.

 

 

초대교황 베드로 사도는

 

사도 베드로는 머리를 아래로 한채 십자가형으로 순교하였다. 베드로가 로마의 감옥에서 막 탈옥하여 도시를 빠져나가려는데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 골고타 언덕에서 돌아가신지 서른 여섯해 만인가? "쿼바디스 도미네?"(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니가 버린 로마로 간다. 가서 다시 한번 십자가에 매달릴테다." 그말을 듣고 베드로는 발길을 돌린다. “그렇다면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가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리겠습니다.”

 

부활한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 사이에 있었던 이 대화는 교황 레오와 리누스가 기록해둔 ‘황금 전설’에 실려있다. 초대 교황 베드로는 제자들 가운데 믿음직하기도하였지만 속썩이기도 으뜸이었다. 변덕을 부리고, 후회를 하기 일쑤였다.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베드로(반석)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내가 이 반석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한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여 있을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며 흔들림없는 신뢰를 보여주었으나 자신이 예수의 제자였음을 세차례나 부인하고, 닭이 울자 대책없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한다.

 

예수로부터 수위권(primacy)을 부여받고도, 로마를 탈출하려다가 결국 다시 예수님과 함께 로마로 되돌아와 네로의 박해를 받아 순교하게 된 베드로는 “나는 주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자격이 없으니 십자가를 돌려서 머리가 아래로 오도록 매달아주십시오.”하고 그렇게 순교하였다. 죽은 베드로의 시신을 로마군사가 발목을 잘라서 내렸다고 한다. 베드로의 무덤이 확인된 것은, 여기 ‘베드로가 있다’고 쓰여진 문구와 발이 없는 시신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매일신문, 2007년 6월 7일, 글·사진 로마에서 최미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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