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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칼럼: 무지개의 언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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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칼럼] (12) 무지개의 언약
지난 5월에는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수도 비슈케크(Bishkek)에서 열린 고려인 이주 80주년 기념 학술행사에 참가할 기회를 가졌다. 행사 다음날에는 한국에서 함께 간 일행과 높이 3600m에 이르는 텐산 산맥으로 둘러싸인 이식쿨(Issykkul) 호수를 방문했다.
이식쿨 호수는 6만5000년 정도의 나이를 가졌다고 한다. 바다처럼 길게 누워있는데 면적은 보통 제주도의 4배 크기로 비유된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의 계곡 물들이 계속 흘러나와 모여 고여있다가 수증기로 증발해서 수면의 높이를 유지한다. 그래서 이식쿨 호수 위에는 습기가 많아서 무지개가 자주 뜬다.
호수를 방문한 다음날 점심때쯤 호숫가로 나갔을 때 하늘에 낮게 가로로 퍼진 무지개가 떴다. 그런데 곧이어 그 무지개 위로 커다란 햇무리가 나타나더니 가장자리로 둥그런 무지개가 형성되어 쌍무지개의 장관을 이루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풍경에 마주쳐서 일행은 탄성을 질렀고, 자연스레 무지개의 의미에 대해 저마다 이야기를 나눴다.
무지개는 비가 멈춘 뒤에 아름다운 일곱 빛깔로 부드러운 반원을 그리며 나타나기에 상서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특히 무지개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언약을 일깨우는 표징의 의미를 갖고 있다(창세 9,17). 창세기에 하느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어 피신하게 한 후 홍수로 땅 위에 살아있는 인간과 생물들을 모두 쓸어버리셨다. 세상이 사람으로 인해 타락한 것을 보시고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셨기 때문이다(창세 6,5-7).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축복을 내리신 다음 계약을 맺으신다. 하느님의 계약은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람 뿐 아니라 “너희와 함께 있는 새와 집짐승과 땅의 모든 들짐승과 내 계약을 세운다”(창세 9,10-11)고 언명하셨다. 생물들이 사람에게 종속되어 계약을 좇아간 게 아니었다. 하느님은 생물들과 따로 계약을 세우셨다. 사람으로 인하여 저주받았던(창세 3,17) 생물들은 이제 하느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되었으니, 사람으로 인하여 파멸하지 아니하며 하느님이 직접 생명을 보존해주는 존엄한 존재가 되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생물들과 함께 있으라 하셨다. 하느님은 함께 있어야할 사람과 생물들에게 각각 그 존엄을 보장해주는 계약을 세우셨다. 하느님은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두고 계약의 표징으로 삼으셨다(창세 9,13-14).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사람과 사이에,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영원한 계약을 기억하시겠다고 했다(창세 9,15-16).
쌍무지개를 볼 수 있었던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은 산의 면적이 90%가 넘어서 자연 속에 사람들이 에워싸여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호수로 가는 길은 넓은 평야와 산맥이 이어졌으며 구름이 따라왔다. 마을마다 함께 살아온 동물들인 하얀표범, 독수리, 양들의 조각들을 세워놓았다. 아마도 이식쿨 호수에 뜨는 무지개는 하느님 계약의 표징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 무지개는 사라졌다. 함께 있으라 한 생물들도 우리 곁에 없다. 우리는 무지개를 잊어버렸다. 하느님은 무지개가 뜨지 않는 곳에서 사람과 생물들에게 축복을 내리신 그 영원한 계약을 어찌 기억할 수 있으랴.
[가톨릭신문, 2017년 7월 9일, 강금실 에스델(포럼 지구와사람 대표)] 0 1,285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