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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나 홀로 문화의 시대: 나 홀로 시대, 문화인가 문제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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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돋보기 - 나 홀로 문화의 시대] 나 홀로 시대, 문화인가 문제인가
‘나 홀로’ 문화의 어두운 그림자
한 조사에 따르면, 2025년에는 1인 가구가 30%를 넘어설 전망이다. ‘혼족’, ‘혼밥족’, ‘솔로 이코노미’ 등 1인 가구를 표현하는 신조어가 범람하고 있다.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제도를 거쳐 독신의 시대인 1인 가구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흐름이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새롭게 정착될 문화 현상이라는 점이다.
‘문화’라는 말의 가장 폭넓은 정의는 인간 삶의 틀이다. 따라서 문화가 바뀌면, 우리는 격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한때, 우리는 집안 어른이 중심인 대가족 문화 속에서 살았다. 그때는 충효(忠孝)가 가족 공동체의 최고 가치였다. 이어서 부부 중심의 핵가족 문화가 뒤따르며 부부간의 인격적 존중과 자녀 양육이 중요한 가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 뒤 느닷없이 1인 가구 시대가 등장했다. 1인 가구는 독신, 이혼, 사별, 자발적 · 비자발적 자립이나 고립 등의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화의 급속한 변화는 개개인의 자아 정체성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온다. 어쩌면 500년 넘게 이어 온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 훨씬 안정된 문화적 틀 속에서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경제적 · 정치적 여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 홀로’ 문화는 이제 세계사적 대세이다. ‘나 홀로’ 문화는 서구의 개인화나 개인주의를 거쳐 성립된 문화이다.
개인화는 우리 삶의 울타리였던 지난날 전통과 관습, 기성 제도와 종교 등의 부정에서 성립한다. 지난날의 문화적 틀의 전반적 부정에서 출발한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고향 상실’이라 한다. 이제 각자는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살면 된다. 이런 개인화 현상은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에서 도래한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문화적 틀이다. 따라서 개인주의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개인에 대한 존중을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다.
서구의 개인주의는 오랜 기간 숙성되어 정착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날 아무런 준비 없이 개인주의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 까닭에, 진정한 개인주의가 뿌리내릴 틈도 없이 이기주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인화 시대는 왔지만, 개인화의 주체인 우리는 여전히 이기적이고 미성숙하다. 그 결과, 사회적 무질서(아노미)상태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논의는 증가 추세에 있는 정신 질환과도 관계된다. 정신 질환의 증대 현상은 많은 사람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기도 하다.
개인화와 개인주의는 고도의 이타성과 수준 높은 지성을 전제로 한다. 이타성과 지성은 보편적 사회 복지 사회를 실현하는 전제이다. 이 양자는 맞물려 있다. 곧, 혼자 살 수 있는 사회 복지적 여건이 되어야 하고, 이런 여건은 고도의 이타성과 지성을 전제로 하는 동시에, 이타성과 지성을 그 결과로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 하나 제대로 되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나 홀로’ 문화는 도도히 밀려오고 있다.
우리의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나 홀로’ 문화를 자립성의 신장으로, 사회적 고립으로, 국가 미래의 파탄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논의에는 인간 내면의 문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들어 있지 않다. 돈을 많이 버는 인기 위주의 스타가 성공의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큰 대가성 없이 일하는 많은 예술인은 불행한가? 경제적 척도로 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인기 스타는 타인 의존적인 경향이 높은 반면, 가난한 예술인은 자립적인 성향이 높다.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이어 나갈 때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깔을 갖고 사는가?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고 하는가? 그런 삶에 만족하는가? 마음 편하게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는가? 우리는 자기만의 인생을 편안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잊고 말았다. 외적 척도인 돈이나 미모, 사회적 성공만이 절대시되는 문화적 틀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틀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외 계층이 끊임없이 확대되고 재생산된다. 이른바 양극화 현상이다. 한마디로 외적 척도를 절대시하는 경쟁 위주의 사회는 가진 자든 못 가진 이든 상관없이, 내면적 삶의 중요성을 깡그리 망각하는 쪽으로 내몬다.
행복은 안정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자신의 삶을 누리는 데 있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정신적 고통을 겪는 이유는 자기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다. 「주역」의 점사(占辭)는 길(吉), 흉(凶), 회(悔), 린(吝)이다. ‘길’은 편안한 마음 상태, ‘흉’은 극도의 불편한 마음 상태, ‘회’는 ‘길’ 쪽으로 가고자 하는 불편한 마음 상태, ‘린’은 후회하면서도 고치지 못해 ‘흉’으로 다가가는 불편한 마음 상태를 뜻한다. 사람들 대부분은 ‘회’와 ‘린’의 상태 속에 산다. 어떻게 하면 ‘길’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길’의 마음 상태는 안정된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살 때 도달할 수 있는 상태이다. 자기 정체성이 안정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리적으로 살고자 노력할 때일까? 그런데 윤리적으로 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더 절망감에 빠진다. 곧, ‘린’의 상태에 빠진다. 거기에 교만과 독선이 덧칠해진다. 그렇다면 감각적 즐거움에 따라 살면 될까? 이때 찾아드는 손님은 ‘흉’이다. 곧, 정신적 질환이다.
나머지 대안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사는 것이다. ‘회’와 ‘린’의 상태에 있는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나를 이미 다 알고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다. 그럴 때 ‘길’한 마음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마음이 편해지면, 자신과 세계의 모습이 마음속에 저절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 상태에서 우리는 고도의 지성인 영성(靈性)에 도달할 수 있다. 고도의 지성은 학력과 별 관계가 없다.
최근, 집사람을 존중하면서 사는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자기 정체성은 혼자 노력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다. 인간은 이미 타인과의 관계 속에 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나는 너 속에, 너는 나 속에 들어 있다. 그래서 ‘나’와 ‘너’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이 인간 실존에 더 맞는 어법이다. 고도의 지성은 이타성과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
나도 너도 다 같이 자신에게 솔직해질 때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같이 행복해질 수 있다. 나 혼자만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상대에게 편안해지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자신에게 솔직해져서 편안한 상태가 지속되면, 상대도 편안해지는 쪽으로 이동한다. 그래서 나는 전보다 더 편안해진다. 이로부터 상대를 위해 사는 것은 동시에 나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정식이 성립한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존중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 경전은 타인 중심주의의 삶을 보편적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가 행복해져야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는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나 홀로’ 문화의 방향성
‘나 홀로’ 문화는 수도원이 아니라 도시에서 형성된 문화이다. 개인주의와 개인화의 토대 위에서 직업의 지속적 불안정성,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 여성의 지위 향상 등이 덧붙어 성립된 도시 문화이다.
스웨덴의 경우 인구 47%가 1인 가구이다. 수도 스톡홀름에서는 60%가 혼자 살고 있다. 스웨덴은 개인주의와 자립을 강조하는 뿌리 깊은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원자화나 사회적 고립을 해소하고 공동체를 강화하고자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그곳에서는 혼자 산다는 것이 자기 혼자 편하게 살자는 뜻이 아니다. 다른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때로는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들은 혼자만의 거주 공간을 갖지만, 동시에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공동 주택을 갖고 있다. 이들은 같이 식사하거나 운동하고 사우나를 하면서 함께 논다. 한마디로 혼자 자립적으로 살 수 있을 만한 지성과 이타성, 그리고 최대의 사회 복지가 구현되어 있다.
6년 전,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1년간 연구만 하며 지낸 적이 있다. 그곳 교수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자기 돈’과 ‘자기 시간’이었다. 이를 침해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옆방 교수도 미리 약속해야 만날 수 있다. 만나도 잠시 서서 이야기하는 것이 전부였다. 승강기를 타면, 돌아서서 벽만 쳐다보고 있는 교수도 많았다. 같은 층에 살면서도 말이다. 또 식당에서는 말없이 혼자 밥을 먹는다. 그것이 일상이요,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방식이다. 일본인 대다수는 ‘나 홀로’ 삶을 마치 인생의 목적인 양 여기고 있는 듯했다.
일본의 경우, ‘고독사’(孤獨死)에 놓이는 사람이 1년에 3만 2천 명이라고 한다. 일본의 문화는 외부로부터 들어온 문화를 자기 방식대로 합쳐 만든 습합(習合) 문화이다.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면, 신도(神道)일 것이다. 신도는 현세 기복적인 샤머니즘에 바탕을 두는 문화이다. 샤머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적인 길흉화복에 대한 관심이 거의 전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상호 존중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다. 또한 국가는 부유해도 개인은 가난하다. 사회 복지 이념은 인간 존중보다는 최소한의 생존 확보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했다.
일본의 이 모습이 한국의 미래 자화상이 아닐까? 한국은 젊은이들의 불안정한 취업 구조, 노인 인구의 급등, 현세 기복적 의식 구조 등에서 일본과 닮았다. 게다가 한국은 복지 제도의 측면에서 일본보다 훨씬 낙후되어 있다. 그러니 한국의 앞날은 일본보다 밝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민본주의(民本主義)를 바탕으로 하는 조선 왕조의 이성주의적인 유학 전통과 단절되었다. 일제 식민 시대의 문화적 공백, 이어서 서구 사상이 이 땅에 거칠게 밀려왔다. 그리고 서구 사상을 제대로 소화하기도 전에 1인 가구 시대가 되었다.
서구 개인주의의 뿌리는 그리스도교적 이념이다. 그래서 그들의 개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율성의 존중이라는 이념의 실현으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서구는 이런 이념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복지 공동체를 실현했다. 하지만 샤머니즘에 바탕을 두는 한국과 일본은 개인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이념이 없다. 보편적 이념이 있을 때 고도의 지성과 수준 높은 이타주의도 가능하다. 그리고 복지 국가의 실현도 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나 홀로’ 문화는 내용이 텅 비어 있는, 속 빈 강정의 문화가 아닐까?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편치 않아서, ‘내 코가 석 자’여서 ‘나 홀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경제적·정신적 여유가 있는 소수를 제외하고 말이다.
이제 국가도, 교회도, 학교도 바뀌어야 한다. 안정된 자기 정체성의 확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 인간의 자율성 신장 등을 교육해야 한다. 국가나 교회나 학교는 즐거운 모임의 장을 열어 주어야 한다. 더불어 사는 행복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때, 보편적 사회 복지의 사회도 무리 없이 실현된다.
나의 행복은 우리가 같이 행복할 때나 가능하다. 지옥은 타인과 고립되어 사는 것인 반면에 천국은 타인과 연대감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이는 ‘홀로’ 사는 사람이나 더불어 사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린 ‘나 홀로’ 문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나 홀로’ 문화는 문제를 넘어 화(禍)를 불러올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갈 길이 아득하기만 하다.
* 이부현 바오로 - 부산가톨릭대학교 인문교양학부 교수.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부산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성과 종교」, 「7일간의 철학 교실」 등의 저서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선집」 등의 번역서가 있다.
[경향잡지, 2017년 9월호, 이부현 바오로] 0 1,547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