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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기쁨 해설5: 제자 공동체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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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5-01-03 ㅣ No.613

[홍기선 신부의 복음의 기쁨 해설] (5) 제자 공동체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


‘복음의 기쁨’ 나누면 ‘선교의 기쁨’ 얻는다



2014년 부활 성야 미사에서 초를 들고 입장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선교는 복음의 빛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의 사명이다.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을 작성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있어서 확실한 출발점이 있다. 교회는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선포해야 하는가? 교회 밖의 모든 이에게 선포해야 한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교회 밖으로 나가라고 일갈하신다.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이 ‘기쁨’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언어권과 백성들에게 전달되어 그들도 이 기쁨을 누려야한다는 것이다. 이 풍진 세상의 모든 고뇌를 극복하게 만들어 주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복음의 기쁨이 어떻게 전달되는가? 전달 방식을 묻는 질문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전달된다. 이 기쁨은 예수님과 만남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과의 만남을 주선해야 할 책무는 교회에 있다. 교황은 권고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1항).


만남을 통해 전하는 복음의 기쁨

교황은 권고문 전체를 통해 이 ‘기쁨’을 여러 가지 형용사로 표현하며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새로운 기쁨, 창조적 기쁨, 영적인 기쁨, 심오한 기쁨, 내밀한 기쁨, 광대한 기쁨, 주체할 수 없는 기쁨, 영원한 기쁨, 가득한 기쁨, 신앙의 기쁨, 종말론적 기쁨….”

교황은 부에노스아이레스대교구의 추기경 시절에 ‘신앙의 해’를 개막했는데, 그때에 이렇게 말했다. “빛의 표시로, 그리고 우정과 기쁨과 자유와 신뢰의 표시로 교회의 모든 문을 개방합시다.”

이제 그분이 교황이 되어 그 ‘신앙의 해’를 폐막하며 온 세계에 같은 내용을 조금 다른 표현으로 호소하고 있다. “장벽을 높이 세워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교회가 아니라, 경계를 없애고 문을 개방하여 모든 이가 예수그리스도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만남’이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통로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선교는 복음의 열매

예수님의 초대에 응하여 형성된 공동체가 제자단이다. 사랑 가득한 그분의 자비의 눈길을 의식하고 주체할 수 없는 내적 기쁨을 느낀 사람들의 공동체다. 마냥 기쁨에 겨워 죽는 날까지 용약하며 자신들만을 위한 삶을 사는 공동체가 아니다. 이 기쁨은 더욱 확장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부르고 그에게 같은 기쁨을 누리도록 만드는 내적 추진력을 지닌 기쁨이다. 우리는 이를 ‘선교의 기쁨’이라 부른다. “제자들의 공동체의 삶을 가득 채우는 복음의 기쁨은 선교의 기쁨입니다”(21항).

교황은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일흔 두 제자들의 선교여행의 결과로 발생한 기쁨(루카 10,17)이었고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철부지들로 대변되는 가난한 이들과 작은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아버지를 찬미하며 예수께서 느끼셨던 기쁨(루카 10,21)이다.

이와 같은 기쁨을 선교의 기쁨이라 한다. 사도들의 설교로 오순절에 개종한 사람들의 첫 반응 역시 이 기쁨(사도 2,6)이었다. 나와 같은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기쁨이다.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는 기쁨이다. 함께 하는 이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살아가는 기쁨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신장되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선포된 복음이 지금 열매 맺고 있다는 표지입니다”(21).

이 선교의 기쁨은 세상의 논리를 초월한다. 선한 사람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 때문에 더욱 기뻐하는 하느님의 논리다. 우리들 마음속에도 이 이상한 논리를 수용하는 곳이 있다. 성경에도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은전 열 닢을 가진 여인이 한 닢을 잃은 뒤, 찾기 위해 등불을 들고 노력하여 은전을 되찾자,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인다(루카 15,9). 잔치 비용이 은전 열 닢을 초과하는 낭비를 초래해도 수용하는 것이다. 한 닢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이 은전 열 닢의 가치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팡세」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이성이 모르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
평화신문, 2015년 1월 1일, 홍기선 신부(춘천교구 사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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