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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루르드 성모 발현 150돌5: 베르나데트 생가와 까쇼(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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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3 ㅣ No.1641

[루르드 성모발현 150돌] (5) 베르나데트 생가와 까쇼(감옥)


죄수들도 살지 못하는 낡은 감방서 여섯 식구 생활

 

 

성녀 베르나데트 일가족이 살았던 까쇼 내부.

 

 

수천, 수만 명의 순례자들이 몰려 있어도 한 사람이 자리한 듯 고요하고 평화롭기만한 루르드 성지와는 달리 시내는 한 마디로 '북새통'이다. 대기는 루르드를 찾는 다양한 민족의 수 만큼이나 각기 다른 언어들로 혼란스럽다. 성지 골목길 양편에 빼곡히 늘어선 성물가게와 카페들이 순례자들의 오감을 유혹한다. 세상에 남자 반 여자 반이 존재할지 몰라도 루르드에는 성한 사람과 병든 이들이 반반이다.

 

 

베르나데트 생가

 

무릇 사람 마음이 본성을 그대로 빼닮지 않았나 보다. 성지를 빠져나와 세상의 경계에 발을 내딛자 마자 금방 '속물'이 된다. 소박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를 청한 것이 허사인듯 사랑을 구걸하는 걸인의 왜소한 손을 애써 외면한다. 이같은 내 마음을 순례자들에게 들킨듯 해 얼굴이 화끈하다.

 

성녀 베르나데트 생가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 한 가운데에 있다. 루르드 성지를 빠져나와 가브 강 다리를 건너자 마자 오른편으로 나 있는 언덕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온통 우유빛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2층 전통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벽에는 '성녀 베르나데트 생가 볼리 방앗간'(Maison Natale de Bernadette - Moulin de Boly)이라고 쓰여진 작은 팻말이 붙어있다. 이곳이 바로 성녀 베르나데트가 태어난 곳이다.

 

성녀 베르나데트의 생가인 볼리 방앗간 전경.

 

 

볼리 방앗간은 베르나데트의 외가였다. 외할아버지 쥬스탱 카스텔로가 1843년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외할머니는 18살밖에 안 된 맏딸 베르나르드를 제분기술자인 35살의 프랑수와 수비루와 결혼시키려 했다. 하지만 수비루는 베르나르드보다 파란 눈을 가진 16살의 둘째 딸 루이즈를 더 마음에 두었다.

 

그래서 베르나데트의 외할머니는 맏딸을 제쳐두고 루이즈와 수비루를 1849년 결혼시켰다. 이듬해 1850년 1월 7일 이 부부 사이에 태어난 첫 딸이 바로 베르나데트이다. 베르나데트는 당시 루르드 지방의 관습대로 이모를 대모로 삼았다. 그녀의 부모는 대모인 큰 이모 베르나르드의 이름을 따 '작은 베르나르드'란 뜻의 베르나데트로 딸의 이름을 지었다.

 

베르나데트는 이 방앗간에서 부모와 함께 가난했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1853년부터 베르나데트 가정에 큰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다. 증기 방앗간이 들어서고 가뭄으로 인한 기근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그럼에도 천성이 워낙 착한 아버지 수비루는 늘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자신보다 더 가난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예 공짜로 일해 주거나 외상값을 떼이기 일쑤였다. 결국 아버지 수비루는 파산했고 전세 250프랑을 내지 못해 1854년 베르나데트 가족은 더럽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55년 루르드에 콜레라가 번져 5주 만에 주민 38명이 죽어 나갔다. 베르나데트도 이때 전염병에 걸려 평생 천식으로 고생했다.

 

베르나데트가 태어난 방앗간 2층 방. 단아하게 정돈된 방이 소박하게 산 성녀 가족들의 일상을 잘 드러낸다.

 

 

오늘날 성녀 베르나데트 생가는 잘 단장돼 있다. 관리 수녀의 안내로 생가 입구로 들어서면 성녀의 가족과 함께 1850년대 루르드 사람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 속에는 성직자, 귀족, 군인뿐 아니라 석공, 농부 등 소시민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어 당시 시대상을 잘보여준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묵주를 들고 얌전하게 두손을 모으고 찍은 베르나데트 일가 사진은 성가정의 단란함을 직접 눈으로 본듯 그대로 전해준다.

 

발코니를 따라 베르나데트가 태어난 방앗간으로 들어서면 윗층에 두 개의 방이 있다. 베르나데트가 태어난 방에는 낡은 침대 하나와 루르드 성모상과 베르나데트 성녀상이 마주하고 있는 작은 옷장, 그리고 성녀와 그의 부모 사진이 걸려있다. 또 다른 방에는 성녀 가족들이 방앗간에서 일하고 기도하던 일상의 삶을 그린 삽화들이 진열돼 있다. 아랫층은 거실, 부엌과 함께 개울물을 이용해 멧돌을 돌려 방아를 찧던 당시 방앗간 모습이 복원돼 있다.

 

 

까쇼

 

- 어머니 루이즈 카스텔로.

 

 

베르나데트는 가정 형편상 학교 교육은 물론 성당에서 교리교육도 받지 못하고 성장했다. 10살도 채 안 된 어린 나이에 베르나데트는 가사에 도움을 주려고 대모인 이모가 운영하는 주막에서 술 심부름을 하는 등 돈벌이에 나섰지만 아버지 수비루는 또한 번 파산을 겪고 길거리로 내몰리게 됐다.

 

베르나데트 가족의 딱한 처지를 지켜보다 못한 이장이 폐쇄된 옛 감옥을 내주어 그녀의 가족은 단칸 까쇼(Cachot-감옥)에서 생활하게 됐다. 이때가 1857년이었다. 사람 살 곳이 아니라고 해서 죄수들도 내보내고 폐쇄했던 곳이지만 베르나데트 가족은 웃음을 잃지 않고 14~16㎡ 감옥에 작은 제단을 만들고 온가족이 묵주기도를 하며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베르나데트 가족의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까쇼로 이사온 그해 3월 27일 아버지 수비루가 밀가루를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8일간 옥살이를 했다. 무죄가 드러나 풀려났지만 아버지 수비루는 감옥에서 받은 격심한 스트레스 탓인지 그만 왼쪽 눈을 실명한다.

 

천식을 앓던 베르나데트는 어둡고 습한 환경 탓에 더없이 고통스러운 처지였다. 어머니 루이즈는 부양가족 한 명이라도 줄일 요량으로, 또 병약한 베르나데트를 좀더 나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하려고 그녀를 인근 바르트레스의 한 농가 가정부로 보냈다. 7살 베르나데트는 1857년 11월부터 1858년 1월까지 석달간 피레네 산맥의 혹한보다 더 추운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해야만 했다.

 

아버지 프랑수와 수비루.

 

 

가정부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까쇼로 돌아온 베르나데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땔감을 구하러 마사비엘 동굴로 갔다가 그곳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보게 됐다.

 

생가에서 언덕길로 올라와 골목길로 가다보면 오른편에 까쇼가 나온다. 오늘날 까쇼는 성녀의 생가처럼 깔끔하게 단장돼 있으며 성녀 가족이 사용했던 묵주가 걸려있다.

 

"고통없이 영광없고 죽음없이 부활없다"는 교회 격언이 있다. 어린 베르나데트가 겪은 온갖 시련도 티없으신 성모 마리아의 발현 목격을 위해 거쳐야했을 정화의 과정은 아니었을까!

 

[평화신문, 2008년 2월 17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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