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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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루르드 성모 발현 150돌8: 성모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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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7-06-23 ㅣ No.1644

[루르드 성모 발현 150돌] (8 · 끝) 성모 메시지


회개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

 

 

한국인 순례자들이 원죄없으신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마사비엘 동굴 안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루르드 성모 메시지 -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루르드 마사비엘 동굴에서 18차례에 걸쳐 10대 소녀 베르나데트 수비루에게 발현했다.

 

흰 옷에 파란색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베일로 머리를 감쌌으며 팔에는 묵주가 있고 발 아래에는 노란 장미가 있는 모습으로 발현한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는 베르나데트에게 "나는 원죄없이 잉태된 자"라고 밝히고, "회개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또 당신이 발현한 곳에 "성당을 지을 것"과 루르드 샘물의 원천을 가르키며 "그 물을 마시며 그 물로 씻도록 하라"고 말했다.

 

성모 마리아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가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이 잉태되심'에 관한 교의를 반포한 지 4년 후 루르드에 발현해 이 교리를 직접 확인했다.

 

교황 비오 9세는 칙서 「형언할 수 없으신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전으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공로를 미리 입으시어, 원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게 보호되셨다"고 반포했다.

 

이 신앙 교의의 출발점은 하느님의 아들이 살을 물려받고, 하느님의 성령이 거주하신 여인의 태중은 무죄하고 흠없이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여기에 마리아의 모범적이고 탁월한 신앙의 덕성이 더해졌다.

 

교회는 초세기부터 "하와가 죄를 지어 죽음을 가져왔다면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회복하는 분으로 '흠없는 하느님의 신부'로 예수를 태중에 모셨던 마리아의 육신은 '티없이 깨끗하신' 정결한 몸이며, 이 정결은 평생 동정과 원죄없음으로 드러난다"고 가르쳤다. 또 마리아의 원죄없음, 무죄함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특별한 은총이라고 가르쳤다.

 

교황 비오 9세가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이 잉태되심 교리를 반포한 해인 1854년 베르나데트 가족은 더 이상 제분소의 임대료를 낼 수 없어 거리로 내쫓겨 버려진 감옥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하지만 베르나데트 일가족은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매일 저녁 가족 모두가 묵주기도를 바치며 성모 마리아에게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한 순례자가 성모 발현 동굴 앞에 초를 봉헌한 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당시 상황을 베르나데트의 고백을 토대로 정리하면, 루르드에서 성모 발현을 목격한 베르나데트는 본당 주임 페이라말 신부의 요구에 따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인 1858년 3월 25일 마사비엘 동굴로 가서 귀부인에게 이름을 알려달라고 네 차례나 간청했다.

 

그러자 귀부인은 비로소 눈을 하늘로 향한 후 양 손을 벌였다가 가슴에 모으면서 "임마쿨레 콩셉시옹"(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다)이라고 말했다.

 

베르나데트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이 말을 잊지 않기 위해 줄곧 외우면서 달려가 사제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나오는 페이라말 신부에게 베르나데트는 큰 소리로 "임마쿨레 콩셉시옹"이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듣은 페이라말 신부는 충격에 휩싸인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다음 교구장 주교에게 이 사실을 하나도 빠트림 없이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

 

성모 마리아가 베르나데트에게 직접 밝힌 당신의 신원이 루르드 성모 발현을 인정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성 비오 10세 교황은 1907년 교회 전례력 안에 루르드 성모 발현 첫 번째 날인 2월 11일을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설정했다. 성모 발현과 관련해 보편교회가 전례로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이 날이 유일하다.

 

 

항상 낮은 자가 되려 한 베르나테트

 

성녀 베르나데트의 유해. 지금도 성녀의 유해는 썩지 않은 채 임종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루르드 본당 보좌였으며 베르나데트의 고해 신부였던 포미앙 신부는 "베르나데트의 생활과 증언이야말로 루르드에서 일어난 많은 기적과 치유보다 더 설득력 있고 훌륭한 성모 발현의 증거였다"고 회고했다. 성모 마리아를 목격한 베르나데트의 삶이 어떠했길래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베르나데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성모 발현 목격자임을 내세우지 않을 만큼 평생을 겸손하게 살았다. 베르나데트는 자기를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 전달자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추앙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했다.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에게 베르나데트는 단호하게 "정말 여러분들은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요"라며 꾸짖었다. 또 자신의 집을 찾은 방문자들이 돈이라도 놓고 가면 베르나데트는 "돈은 나를 망칩니다"라며 결코 돈을 받지 않고 자선을 할 것을 권고했다.

 

베르나데트는 스스로 세상에서 잊혀진 자가 되기 위해 루르드를 떠나 프랑스 리용 인근 느브르에 있는 애덕 자매회에 입회했다. 이 수녀원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정성스레 시신을 염하는 소임을 맡아했다.

 

베르나데트는 임종 직전 첫 서원 때부터 사용했던 십자가만을 자기 손에 붙들어 매어 달라고 동료 수녀에게 부탁한 후 "나는 이 한 분만으로 족합니다. 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 예수님이신가.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 죄인을 위해 빌어주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하느님 품에 안겼다.

 

[평화신문, 2008년 3월 23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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