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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13: 암흑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중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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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2 ㅣ No.107

[니~하오! 중국교회] (13) 암흑의 터널에서 빠져나온 중국교회


개혁개방과 함께 분 봄바람

 

 

문화혁명(1966~76년)으로 철의 장막에 갇혔던 중국교회가 다시 빛을 본 것은 1978년 등소평 등장 이후다.

 

개혁개방 정책을 들고 나온 등소평은 감옥과 사상노동개조수용소에 있는 반혁명인사와 종교인들을 석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교를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종교 박해에 대한 서방세계의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애국회는 서서히 활동을 재개했다. 1979년 홍콩일간지 대공보에 부철산(傅鐵山) 신부가 7월 25일 북경교구 주교로 임명됐다는 소식이 실렸다. 북경교구 교구장좌는 1964년 이래 비어 있었다. 서방세계는 꽁꽁 얼어붙은 중국 종교계에 봄볕이 드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중국교회에 찾아든 해빙의 봄볕

 

중국 정부는 과거 몰수해 다른 용도로 쓰던 성당들을 애국회 소속 신부들에게 하나 둘씩 넘겼다. 또 중국교회 대내외 창구는 정부 정책에 협력하는 애국회로 일원화했다.

 

1979년 독일의 모서 주교가 바티칸을 비롯한 서방교회의 큰 관심 속에 중국을 방문, 정부 당국자와 부철산 주교를 만났다. 이때 개방정책 영향으로 중국과 바티칸에 해빙 무드가 형성될 것이라는 기대가 적지 많았다.

 

그러나 모서 주교는 베드로 사도좌에 충성하는 지하교회 인사들은 만날 수 없었다. 정부 관리는 "교황청이 중국과 접촉하고 싶으면 먼저 대만 국민당 정부와 모든 관계를 단절하라"고 했다. 모서 주교는 방문 결과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중국교회에 긍정적 변화가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우선 애국회 소속이라 하더라도 신자 수가 늘어났다. 또 홍콩ㆍ마카오교구와 본토 교회간에 '교류의 다리'가 놓였다.

 

이러한 만남과 접촉은 희망을 주는 동시에 실망도 안겨줬다. 정부 통제 탓에 중국교회는 중국 테두리 안에서만 움직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중국이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럼으로써 중국교회가 보편교회 일원이 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이때 극적 돌파구가 열릴 것 같은 청신호가 켜졌다. 성좌에 대한 충성심이 확고한 광저우의 등이명(鄧以明) 주교가 22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1980년 6월 석방돼 광저우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정부 당국자도 이 선임에 동의했다. 중국 정부와 애국회, 바티칸 모두 인정하는 등 주교는 중국과 바티칸 사이에서 화해의 다리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그는 로마로 건너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기도 했다. 교황은 이때 그를 광둥교구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자 애국회는 "중국교회에 대한 주권 간섭"이라고 반발하며 그를 모든 직위에서 해임시켰다. 이어 주교 5명을 임명[自選]해 1981년 7월 북경에서 애국회 새 회장 종희덕 주교 주례로 서품식[自聖]을 거행했다. 9월에도 두 차례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이같은 자선자성(自選自聖)은 교황의 교도권에 따르지 않고 교회를 자치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애국회 결의를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애국회와 지하교회 갈등의 새로운 불씨

 

애국회 가입을 거부한 지하교회 신자들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해나갔다. 한 자료에 따르면 하북성, 천진, 산서성 등에는 애국회보다 지하교회 신자 수가 더 많았다. 신자들 중에는 집 근처에 있는 애국회 성당을 놔두고 몇 시간씩 자전거를 타고 가서 지하교회 신부가 주례하는 미사에 참례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애국회가 지하교회를 박해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애국회 신부가 공안국에 달려가 지하교회 신자들을 고발하고 체포를 재촉하는 것은 흔한 일이 돼버렸다.

 

지하교회의 어려움 가운데 하나는 사제양성이었다. 초기에는 조직과 재정, 교수가 없어 노사제가 제자를 키우듯 데리고 일하다 가르쳐 사제품을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또 신부나 주교가 애국회에서 지하교회로, 지하교회에서 애국회로 전향할 때마다 중국교회는 갈등과 분열에 휩싸였다.

 

[평화신문, 2008년 12월 28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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