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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5: 교회와 신협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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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1-03 ㅣ No.114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5) 교회와 신협운동


소외계층 부축 48년, 자산 세계 3위

 

 

- 2007년 2월 대전 신협중앙회관에서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 동상을 제막한 신협중앙회 회장단 및 임원진.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성 베네딕도회의 수련 모토엔 보이지 않게 '협동' 사상이 배어 있다. 중세 초 성 베네딕도회는 '협동으로 사회를 이룩해 보려' 했다.

 

신용협동조합 창시자 프리드리히 라이파이젠(1818~1888) 또한 그리스도교적 윤리에 입각한 형제애와 사회윤리를 토대로 독일에서 농민들과 함께 신용협동조합을 조직했다. 산업혁명 이후 저임금에 시달리는 소외계층의 형성으로 빚어진 어려움과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협동조합운동을 시작한 것.

 

이같은 서구의 협동조합사상은 1960년대 들어 우리나라에 이식돼 신용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저가매장사업), 새마을금고, 생활협동조합 등 다양한 형태로 정착한다. '세계 3위 신협 국가'로 발돋움한 국내 협동조합운동엔 특히 가톨릭 신용협동조합운동의 사상적 영향이 짙게 깔려있다. 그 시초 또한 가톨릭교회 공동체에서였다.

 

 

한국 신협 뿌리 '성가신협' 탄생

 

1960년 5월 1일 노동자 성 요셉 축일. 부산 메리놀병원에 '작은 씨앗'이 뿌려진다. 비좁은 병원 사무실에 60대 노 수녀와 병원 직원들이 그해 3월 19일부터 7주간에 걸쳐 진행된 신협 소개 강연회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모여들었다. 메리 가브리엘라(메리놀수녀회) 수녀를 비롯해 부산 메리놀병원과 성분도병원, 가톨릭구제회(NCWC, 현 CRS) 직원들, 부산 중앙본당 신자 27명이었다. 이들은 이날 '성가신용협동조합(Holy Family Credit Union)'을 설립, 초대 이사장에 강정렬(아우구스티노)씨를 뽑는다. 한국에서 민간 차원 제1호 신용협동조합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개월 뒤인 6월 26일 장대익(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신부도 서울시내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가톨릭중앙신용조합'을 설립한다. 이로써 일제강점기 중 착취의 상징이던 관제 기구 '금융조합'에서 탈피, 진정한 의미에서 '신용협동조합운동'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는 전기를 맞는다.

 

이에 앞서 1952년 한국에 입국한 가브리엘라 수녀는 부산 메리놀병원에서 전쟁 미망인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하면서 57년까지 주한외국원조단체협의회(KAVA) 이사직을 겸했다.

 

그런데 1957년 11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주한외국원조단체협의회 회의에서 막대한 한국 원조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 회의에서 원조물자가 자립적이고 협동적으로 쓰여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자, 가브리엘라 수녀는 1957년 12월 협동 교육의 본고장인 캐나다로 건너가 노바스코시아주 성 프란치스코 제이비어대 부설 협동연구원(Coady Institute)에서 협동조합운동 전반을 배운다.

 

이어 이듬해 초부터 신협교육과 조직 준비에 들어간 지 2년여 만에 가브리엘라 수녀는 자신을 조합원 1번으로 하는 성가신협을 탄생시킨 것이다.

 

 

한국사랑에서 비롯된 신협운동

 

- 1963년 3월 2주간 농협 일선 직원들을 대상으로 제2차 신용협동조합 교육을 실시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가브리엘라(아래쪽 가운데) 수녀와 이상호(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전 신협중앙회장이 환하게 웃고 있다.

 

 

"한국에서 신협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오직 한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2600만 명 한국 국민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가브리엘라 수녀가 1964년 신협연합회 창립총회 기념사를 통해 남긴 이 말에는 이방 노수녀의 절절한 한국 사랑이 녹아 있다. 당시 한국은 도시고 농촌이고 할 것 없이 빈곤의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소득이 낮으니 저축률이 낮고 투자율도 낮고 생산성도 낮아 다시 소득이 낮아져 하는 수 없이 빚을 지고 고리대금의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계(契)'라는 고유의 미풍양속은 변질돼 떼이기 일쑤였다. 신용은 도저히 찾으려야 찾아 볼 수가 없는 여건이었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신용을 매개로 하는 성가신협을 조직해낸 노수녀는 독일 미제레올(Misereor) 등의 원조를 받아 1962년 부산 메리놀수녀원 내 나자렛 집에서 협동조합교도봉사회를 조직, 신협운동을 확산시킨다.

 

1963년 7월 서울 가톨릭대 의대로 사무실을 옮긴 교도봉사회는 '협동교육연구원'으로 명칭을 바꿨고, 1964년 서울 동교동으로 이전한 뒤 1996년 6월 30일 폐쇄되기까지 신협교육의 산실이 됐다. 이후 협동교육연구원은 그 출신들에 의해 97년 2월 재설립돼 현재 회원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가브리엘라 수녀가 "첫째도 교육, 둘째도 교육, 셋째도 교육"이라며 교육에 주목한 데는 이유가 있다. 조합원 교육만이 신협운동의 미래를 담보해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던 것.

 

가브리엘라 수녀는 이어 1964년 1월 서울 신용협동조합지부 월례회의에서 전국연합회 설립을 제안, 발기 위원 13명과 함께 준비위원회를 꾸려 그해 4월 26일 서강대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신협연합회'의 닻을 올린다. 당시 전국 조합원 수는 8000여 명에 이르렀고 총 자산은 270만4785원이나 됐다. 이처럼 태동한 신협운동은 1972년 8월 국회에서 '신용협동조합법' 제정 시행됨으로써 본격 발전기에 접어든다.

 

 

한국 신협 세계 3위 도약

 

지난 2월말 현재 한국 신협중앙회는 조합 수 1005개에 조합원 수 483만1172명, 자산총액만 27조7966억 원에 이른다. 신협을 설립한 지 48년 만에 미국, 캐나다에 이어 조합이나 자산 규모에서 세계 3위라는 놀라운 성공을 거둔 셈이다. 이처럼 빛나는 성장을 이룬 배경에는 '신용이 협동경제의 첫 단계'라는 판단 아래 신협운동을 시작한 가브리엘라 수녀의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티끌 모아 태산'으로 신협운동을 시작한 가브리엘라 수녀는 △ 신용은 융자만이 아니라 저축도 함축하는 개념이다 △ 자본은 푼돈을 저축한 결과다 △ 상호 신뢰는 신협운동의 토대라는 기본원칙 아래 저축과 융자, 신뢰가 함께 발맞춰 나아가는 신협운동을 조직했다. 공동구매와 공동이용, 공동판매라는 원칙은 특히 '협동경제'를 우리 사회에 인식시키고 보급하는 발판이 됐다.

 

1961년 10월 신협운동에 뛰어들어 평생을 헌신한 이상호(미카엘, 79) 신협중앙회 명예회장은 신협운동 초창기를 이렇게 회고한다.

 

"1961년 가브리엘라 수녀와의 만남은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지요. 안정되고 평범한 은행원이라는 삶에서 불안정하지만 '꿈이 있는 삶'으로 탈바꿈시켰어요. 당시 수녀님은 저처럼 젊은 일꾼이 필요했고, 저는 꿈을 일굴 터전이 필요했던 셈이지요. 후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신협은 제 인생의 전부였지요."

 

한홍순(토마스 데 아퀴노, 한국 평협 회장) 한국외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시 금융형편이 어려운 소자본가나 농민, 고리대금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자립의 길을 열어갈 수 있도록 이끈 신협(Credit Union)은 자선과는 또 다르게 가톨릭교회가 사회로 손을 내밀어 교회의 존재를 알린 효시라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평화신문, 2008년 4월 20일, 오세택 기자, 최효근 명예기자]

 

 

메리 가브리엘라 수녀는?

 

'메리 가별'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메리 가브리엘라(Mary Gabriella Mulherin, 1900~93년) 수녀의 한 삶은 '신협운동'으로 기억된다. 1926년 일제강점기 중 국내에 들어와 평양교구에서 17년간 사회복지 및 교육 사도직활동을 폈지만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신협운동을 소개하고 기반을 다진 1958년 초부터 협동교육연구원장 자리를 내놓고1967년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기까지 10년간이었다. 이로써 가브리엘라 수녀는 '한국 신협 운동의 어머니'로 영원히 남는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스크렌턴 출신의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가브리엘라 수녀가 한국에 신협운동의 씨앗을 뿌린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 토마스 뮬헤린이 미국 광산노조 지도자로 활동했던 탓에 어려서부터 사회운동에 대한 의식을 지녔던 것이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1923년 메리놀수녀회에 입회, 한국에서만 33년을 살며 한국인들의 벗으로 평생을 산다.

 

1950~60년대 주로 부산에서 활동한 가브리엘라 수녀는 특히 한국 문제는 한국인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신협운동에 주목했고 신협운동의 메카였던 캐나다에서 새우잡이 어부들의 신협운동인 '안티코니쉬 운동'을 배워 국내에 보급하기에 이르른다. 가브리엘라 수녀는 국내 최초 신협인 성가신협을 비롯해 협동조합교도봉사회, 신협연합회 등을 설립해 초창기 신협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67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신협연합회로부터 국제개척자 표창을 받았으며, 1982년 6월에는 한국 정부에게서 한ㆍ미 수교 100주년 기념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국내 신협운동의 산파 역할을 한 가브리엘라 수녀는 1993년 5월 12일 미국 뉴욕주 어씨닝 메리놀수녀회 본원 양로원에서 93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국내 신협인들은 아직도 가브리엘라 수녀를 잊지 못한다. 지난 18일에는 대전 덕명동 신협중앙연수원에서 강철민(대전교구 노은동본당 보좌) 신부 주례로 고인을 기리는 15주기 추모 미사가 봉헌됐다. 특히 한국 신협중앙회는 지난해 2월 15일 대전 둔산동 신협중앙회관 1층에 가브리엘라 수녀의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평화신문, 2008년 4월 20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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