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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대사12: 지학순 주교 투옥과 민주화의 기나긴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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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3-09 ㅣ No.124

[격동의 현대사 - 교회와 세상] (12) 지학순 주교 투옥과 민주화의 기나긴 여정


교회의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 뿌리내리는 계기

 

 

- 지학순 주교가 서울구치소에서 출감한 이튿날인 1975년 2월 18일 명동성당 제대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 기도를 바치고 있다.

 

 

1974년 7월 6일 오후 4시 50분 서울 김포공항.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다니엘, 1921~93) 주교가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해 4월 말 타이완에서 열린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창립총회에 참석한 뒤 필리핀과 바티칸을 순방하고 귀국하던 길이었다.

 

76일이나 걸린 긴 여정에 지친 지 주교를 영접하기 위해 공항에 나갔던 원주교구 사제들은 트랩에서 내리는 지 주교를 봤지만 곧 사라지고 만다. 마중을 나갔던 당시 주교회의 사무총장 이종흥 신부(현 대구대교구 몬시뇰)도 지 주교를 만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중정) 요원들이 트랩을 내려서는 지 주교를 강제 연행한 것이다. 같은 해 4월 3일 발생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 중이던 김지하(68, 본명 김영일) 시인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였다.

 

건국 이후 초유의 현직 교구장 연행 사태에 천주교회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은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연이어 갖고 지 주교 석방을 요구했다.

 

이에 중정 측은 주거제한 조치를 단서로 달아 지 주교를 풀어주고 7월 10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연금한 뒤 불구속 재판에 들어갔다. 지 주교는 그러나 7월 23일 성모병원(현 명동 가톨릭회관) 마당에서 '양심선언'을 발표, 엄혹한 유신 독재 체제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웅변했다. 이로 인해 지 주교는 8월 12일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고, 이듬해 2월 17일 수감 중이던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기까지 6개월 여에 걸쳐 '영어의 몸'이 돼야 했다.

 

 

연행 이후 226일, 무슨 일이 벌어졌나

 

지 주교가 민청학련에 대한 자금 제공과 내란 선동, 정부 전복 혐의로 연행돼 법정구속되자, 목자를 잃은 원주교구를 비롯한 한국천주교회는 지 주교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하며, 사회현실에 대한 고발과 투신의 의지를 다진다.

 

물론 그 와중엔 바티칸의 '물밑 작업'도 있었다. 2006년 2월 공개된 정부 외교문서(191권 1만7000여 쪽 분량)에 따르면, 당시 교황청 당국과 박정희 정권은 지 주교의 신병 처리를 놓고 타협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해 7월 11일 주한 교황대사 루이지 도세나 대주교는 당시 노신영 외무부 차관을 면담한 자리에서 지 주교가 구속되지 않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지 주교가 양심선언을 발표하면서 이같은 석방 타협은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정부 측에서 지 주교를 원주교구장직에서 해임할 것을 석방 조건으로 제시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해와 타협이 이뤄질 수가 없었다.

 

이에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던 김수환 추기경은 7월 10일 주교회의를 소집, 주교단의 뜻을 모아 지 주교 석방을 촉구했다. 이어 김 추기경은 청와대에서 1시간 30분 가량 박 대통령을 만나 대화했으나 박 대통령은 자신의 종교관을 거론하며 교회의 정치사회 문제 관여를 못마땅해 했다. 김 추기경은 교회가 신앙에 따라 의당히 해야 할 일이라는 취지로 교회의 사회 참여에 대해 답하고, 지 주교가 석방되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크게 이바지했다.

 

- 지학순 주교는 1974년 7월 23일 서울 성모병원(현 명동 가톨릭회관) 마당에서 '양심선언'을 발표, 유신 독재 치하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표상을 보여줬다.

 

 

특히 원주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은 지 주교 행방과 재판 진행, 건강을 알아보기 위해 줄지어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하나 책임있게 답변해 주지 못하자, 효율적 대응이 필요해졌고 이 와중에 8월 26일 인천교구 답동주교좌성당에서 열린 '지 주교를 위한 전국 사제 합동 기도회'에서 '성직자 일동' 명의로 첫 성명인 '기도하는 사제단의 주장'이 발표됐다. △ 지 주교 양심선언을 적극 지지하고 △ 민주주주의 원칙에 입법ㆍ사법ㆍ행정 등 3권분립의 명확한 실현과 1인 장기 집권을 반대하며 △ 대통령 긴급조치 제2호(비상군법회의 설치)를 즉각 해제하고 △ 투옥 중인 지 주교와 목사, 교수, 변호사, 학생들을 즉각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어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9월 23일 원주 세미나에는 자발적 참여 사제가 300여 명에 이르렀고 이튿날 사제단 결성을 결의한다. 당시 한국인 신부가 639명, 외국 사제가 285명 등 총 924명이었던 데 비춰 보면 한국교회에서 사제들 3분의 1이상이 대거 참여한 셈이었다. 이어 9월 26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순교 찬미 기도회'를 갖고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명의로 첫 시국 선언문을 발표, 세계의 인간화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요청되는 자유의 가치를 역설하면서 인간의 존엄을 선포하고 수호하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자 권리임을 천명했다. 9월 26일 기도회 직후 시위는 성직자들에 의한 최초 가두 시위였다.

 

또 11월 6일에는 제2 시국 선언을 발표, "우리 국민은 집권자에게 비판에서의 면제 특권을 부여한 적이 없다"고 선언했다. 11월 11일에는 '사회정의 실천선언'을 발표, 왜 종교인이 인권회복 운동에 과감히 뛰어들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견해를 밝힌다.

 

이같은 교회 반발에 직면한 정부는 지 주교를 이듬해 2월 17일에 석방한다. 이에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지 주교와 일부 인사 석방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며 '진리와 양심의 증언자가 되겠다"고 성명서를 통해 밝힌다.

 

 

지 주교 구속, 교회가 선교정책에 사회정의를 통합한 계기

 

지 주교 구속 사건은 한국천주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나아가 한국 사회에는 어떤 파장을 남겼을까.

 

평신도 신학자 황종열(레오) 박사는 '현대 한국가톨릭교회의 사회정의 활동과 선교정책'이란 논문에서 "지 주교 구속 사건은 교회가 사회정의를 자신의 선교정책에 보다 더 철저하게 통합시키고 이를 보다 더 깊이 성직자와 수도자들, 신자 대중에 뿌리내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평가한다.

 

문규현(전주교구 평화동본당 주임) 신부도 「민족과 함께 쓰는 한국천주교회사Ⅲ」(빛두레 펴냄)에서 "(지학순 주교가 연행된) 1974년 7월 6일은 한국천주교회로 하여금 크나큰 고뇌와 전환점에 서게 한 날"이라고 지적하고, "오늘날 한국천주교회의 쇄신을 위해 큰 반성의 계기가 됐다"고 강조한다.

 

- 1975년 2월 출감 직후 지학순 주교와 교구 사제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당시 교구 성 골롬반 외방전교회 사제들은 지 주교 인권운동에 동참하는 뜻으로 수염을 깎지 않아 텁수룩하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어놓은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 비전은 1967년 강화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을 통해 촉발됐고, 1974년 지 주교 구속 사건을 통해 천주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 사건을 전후해 한국천주교회의 사회정의활동을 통한 연대는 민주화를 추구하던 재야 시민운동가들과 연대, 그리고 개신교 성직자들과 연대로 지평을 넓혀 간다.

 

1974년 11월 재야 인사들이 다시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하면서 한국천주교회는 시민운동 조직과 연대한다. 이 때 상임대표위원직을 윤형중(1903~1979, 서울대교구) 신부가, 대변인직을 함세웅(현 서울 청구본당 주임) 신부가 맡았고, 여러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국민회의에 참여했다. 또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국민회의 각 지부를 지역 단위로 결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또 지 주교 구속 이후인 1974년 9월과 이듬해 1월 이미 '가톨릭ㆍ개신교 합동 기도회'를 개최한 천주교회와 개신교회는 1976년 3ㆍ1절 기념미사를 가진 후 '민주 구국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에서 가톨릭ㆍ개신교 성직자들은 △ 진정한 민주주의를 국가의 실질적 기초로 세울 것 △ 노동자와 농민 희생을 강요하는 경제 구조를 재검토할 것 △ 민주 역량 심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민족 통일을 이룰 것을 촉구하고, 통일과 정의, 평화의 대장정을 향한 소명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회정의를 선교정책에 통합하려는 과정에서 갈등도 없지 않았다. 사제단의 사회정의를 위한 투신을 비판하는 이들이 구성한 '구국 사제단'이나 '한국 천주교 정의신자단'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럼에도 이후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이 발표한 숱한 사목교서를 통해 드러나듯, 사회정의에 관한 주제는 한국교회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결정을 적용하고 체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많이 나타나면서 대세를 이루게 됐다. 한국교회는 특히 사회의 부정부패와 인권 유린, 정치 권력의 남용 등을 규탄하고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것을 교회의 복음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으로 자각해 왔으며, 이러한 사고 틀은 1960~70년대뿐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되고 있다.

 

[평화신문, 2009년 3월 8일, 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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