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8일 (화)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복자 고성운 요셉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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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6-01-31 ㅣ No.408

고성운 요셉(?-1816년)

 

 

‘성일’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고성운(高聖云) 요셉은, 충청도 덕산의 별암(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는 본디 성격이 착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신앙생활도 아주 열심히 하였다.

고 요셉은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였다. 또한 고 요셉과 고 베드로 형제는 언제나 합심하여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을 권면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에게 모범이 되었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상도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는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예수 부활 대축일을 지내다가 경주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을해박해의 시작이었다.

이때 노래산 교우촌 신자들은 도적이 온 줄로 알고는 몸이 날쌔고 기운이 세었던 고 요셉의 지휘에 따라 힘으로 대적하였다. 그러나 이내 신자들은 그들이 도적이 아니라 관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에 신자들은 모든 저항을 멈추었고, 고 요셉은 어린양처럼 양순해져서 제일 먼저 포승을 받았다.

고 요셉은 형과 함께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감사가 주재하는 대구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도 고 요셉은 모든 고통을 참아 내면서 한결같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사형 판결을 받고,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형과 함께 대구 형장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까지 그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고성운 요셉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하느님의 종'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서울(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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