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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 설립 40주년 맞은 노동사목위원회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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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5-28 ㅣ No.570

설립 40주년 맞은 노동사목위 발자취 - 소외계층 곁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25주년 기념미사가 고(故)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되고 있다.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는 1971년 3월 24일 ‘도시산업사목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

 

1970년대는 유신정치 등으로 국민의 기본권이 철저하게 유린됐던 시기다. ‘선 성장 후 분배’라는 파행적인 경제정책으로 말미암아 노동자들은 장시간·저임금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처해 있었다.

 

이에 한국교회는 불의함을 고발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개선키 위해 노력하는 예언자적·실천적 자세를 보임으로써 시대적 징표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었다.

 

1971년 1월 14일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노동자들과 도시빈민들의 정의·평화를 위한 사제모임 ‘산업선교협의회’ 준비모임을 열었다.

 

이후 3월 24일 고(故) 도요안 신부(John F. Trisolini·살레시오회)와 서울대교구의 김철규 · 최용록 · 명노환 · 박성종 · 이승훈 · 루나(A.Luna · 윤고명) · 김병도 · 김병일 · 김몽은 · 한종훈 · 박병윤 신부 등 총 12명의 사제가 위원으로 참석한 가운데 ‘도시산업사목연구회’가 발족됐다.

 

초대 위원장에는 도요안 신부가 임명됐다.

 

 

노동사목, 어제와 오늘

 

 

1970~1979년 태동기

 

1970~1979년에 이르는 10년간은 태동기였다.

 

‘도시산업사목연구회’는 1972년 ‘도시산업사목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도시산업문제 해결을 위한 교회의 예언자적·실천적 사목활동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산업문제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노동현장에 대한 실태조사도 병행했으며, 신학생 · 사제 · 노동자 · 기업주 등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한 산업교육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또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1972년 11월 14일 발표)’는 주교단 공동 사목교서 발표를 건의하고 초안을 작성했으며, 가톨릭노동청년회 · 가톨릭노동장년회 · 도시산업사목위원회 등을 통해 노동현실에 개입했다.

 

1979년 9월 8일에는 명동대성당 뒤편 건물에 한국 최초로 노동문제상담소(초대소장 김말룡·이냐시오)를 개설하기도 했다.

 

 

1980~1987년 자리매김

 

1980~1987년은 교회의 노동사목활동이 뿌리를 내리는 시기였다.

 

1980년대 신군부는 노동3권을 극도로 제약했다. 당시 경제통계 따르면 노동자의 50% 이상이 월 10만 원 이하의 저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노동자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도록 이끌고, 노동사목을 강화하기 위해 1980년 도시산업사목위원회를 ‘노동사목위원회’로 개편했다.

 

또 한국교회의 노동사목지침을 마련키 위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1년 9월 14일 발표한 회칙 ‘노동하는 인간’을 바탕으로 한 사목교서를 작성했다. 이 사목교서는 한국교회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준거가 됐으며, 성명서나 강론의 기초자료로도 널리 활용됐다.

 

노동사목위원회가 운영하던 노동문제상담소도 노동계에 훌륭한 귀감이 됐다. 유신 이후 법치주의가 실종된 상황에서, 기업주의 시혜에 의존하거나, 민주화라는 정치투쟁적 접근으로 노동문제를 해결하려는 잘못된 관행을 이 상담소가 바꿔놓은 것이다. 이는 1987년 이후 노동단체들이 폭발적으로 노동문제상담소를 개설하는 데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1987~1997년 도약 · 발전

 

1987~1997년은 노동사목위원회가 양적·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시기였다.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노동쟁점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갖추기 위해 ‘연초노동전망’ 세미나를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사제 · 신학생 · 수도자 양성과 가톨릭노동청년회?장년회 지도자 양성, 국제교류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88 서울올림픽 이후 우리나라의 국제위상에 높아지고, 노동자들의 3D 기피현상이 생겨남에 따라 1990년대부터는 이주노동자들이 급격히 유입되기 시작했다.

 

노동사목위원회는 1992년 이주노동자상담실을 개설하고 이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사목활동을 확장해갔다.

 

 

1998년 이후부터 이주노동자로 관심 확대

 

1998년부터 노동사목위원회 활동의 주요 초점은 이주노동자와 결혼이민여성의 문제로 옮겨갔다.

 

이들이 현대 사회의 새로운 소외계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노동사목위원회는 이주노동자들과 결혼이민여성들이 이 땅의 건강한 구성원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다.

 

노동사목위원회의 40년 역사는 ‘소외된 이 중 더욱 더 소외된 이들’을 찾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한 발자취였다.

 

현재 서울 노동사목위원회(위원장 허윤진 신부) 산하에는 성북구다문화가족지원센터, 벗들의 집 · 베들레헴어린이집 · 베다니아집 · 사랑의집 · 마리공동체 등의 쉼터와 재활공동체, 필리핀 · 베트남 · 남미 · 태국 · 몽골 등 이주민 공동체, 가톨릭 노동청년회 · 노동장년회 · 어린이사도직 등의 사도직 단체, 산재 · 이주노동자 상담소 등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1년 5월 8일, 임양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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