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선교ㅣ복음화

21세기를 위한 한국 교회의 새로운 선교 방안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45

21세기를 위한 한국 교회의 새로운 선교 방안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 역사는 구원과 완성을 위한 교회의 복음 선교 활동을 필요로 하고, 교회는 복음 선교의 충만한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노력한다. 교회의 선교 대상인 인간 사회는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다가오는 21세기는 교회의 선교 활동을 통해 구원되기를 바라는 인류 역사의 특정한 한 시대이다. 교회의 선교는 종말의 완성을 향한 역사적 긴장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적용되는 모범적인 선교 방안이란 있을 수 없다. 당대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 교회의 선교는 항상 새로워져야 할 당위성을 안고 있으며 21세기를 향한 한국 교회의 선교 방안 역시 예외는 아니다. 

 

복음 선교는 그 최종 목적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가 강생하는 자리인 '현세', 복음 선교의 주체로서 '교회'라는 세 축들의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하느님 나라 이해에서 전통의 연속과 단절, 하느님 나라 도래를 선포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 선교, 그리고 미래 정보 사회에서의 매체 선교에 국한하여, 21세기를 위한 한국 교회의 선교 방안을 제시하려 한다.

 

 

1. 현세에서의 하느님 나라 선교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적으로 한 조선 실학자들의 실사구시(實事求是) 과정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다. 그렇지만 [성교요지], [주교요지], [상재상서] 그리고 서양 선교사 입국 이후에 발간된 [성교요리문답] 등과 같은 초세기 서적들과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나타나는 하느님 나라 이해는 내세 지향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천주교요리문답]은 마귀와 세속과 육신을 세 가지 악으로 불렀다. 

 

초기 2세기 동안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관은 내세의 하느님 나라를 위한 현세의 준비로서 신앙 생활과 수계 생활을 근본으로 하였다. 조선 실학자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소개하는 계기가 실사구시였음에도 현세와 격리된 내세의 천당으로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였는데, 이는 결국 실사구시의 정신과 거리가 멀다. 이러한 근본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서양 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현세를 경시한 이러한 신학 풍토 때문에 결국 서방 교회는 세속화를 맞이하게 된다. 세상의 고유한 가치와 자율성을 내세우는 세속화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세상 질서에서 인간에 의한 사회 조종으로의 사고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세상 경시 풍조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현세 안에서 제자리를 갖지 못하게 되었고, 세상의 자율성을 내세우는 세속화로 말미암아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밀려나시게 되었다. 교회가 현세 안에서의 하느님 나라를 부정함으로써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자리만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설자리까지 잃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속화 과정의 현대 사회에서 그리스도교 선교 사명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내세 지향과 세속화 사회에서의 하느님 나라 부재는 현세와 하느님 나라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데서 비롯된다. 이러한 양극단적인 사고로 교회는 자신의 신원과 사명 이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 나라를 향한 "지상의 순례자"(교회헌장, 49항)로 정의함으로써 자연과 초자연의 상호 구분에서 일어나는 분열을 넘어선다. 

 

세상의 탈신성화가 세속화를 불러왔다면 탈세속화로써 세상을 신성화해야 한다. 세속화가 비신성화에서 인간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라면, 탈세속화는 신성화에서 인간화를 추구하는 과정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세상의 신성화로써 하느님의 섭리와 세상의 원리라는 양극화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신학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죄 사함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하느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으로서 현세에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의 구현으로 이해하게 된다. 공의회 직후 1967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발행한 가톨릭 교리서는 "이 세상에서 자라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제54과)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현세성을 강조한다. 

 

정의 구현 그리고 인간 해방과 평화의 실현 등과 같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확대된 구원 개념과 교회의 활동을 포괄하기 위해서, 그리고 부정적으로는 과거 선교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식민화를 연상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1970년대 이후부터 선교와 함께 복음화라는 용어가 많이 사용된다. 

 

1974년 정의 구현 사제단의 등장과 활동으로 하느님 나라의 현세성이 부각된다. 이러한 사회 복음화 운동이 면면이 이어오다 최근에 들어서는 2000년 대희년의 실천 방향으로서 "세상의 복음화" 또는 "사회 복음화"를 내세우는 몇몇 교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점차 현세에서의 구원관이 구체화되고 있다. 

 

교회의 선교 목적은 인류 사회를 하느님 나라가 되도록 하고 인간 역사를 구원의 역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마땅히 현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며 그 구원은 인간 해방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교회의 선교 사명], 15항 참조). 

 

교회의 선교가 목표로 하는 하느님 나라 선포는 연대성에 있는 인류 사회의 총체적인 새로 태어남을 목적으로 하며, 기존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 문화 전통, 교육, 정치, 경제 등 총체적인 가치관이 그 대상이 된다. 이렇게 교회의 선교 대상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인류 역사이다. 교회의 선교 없이 인류 역사는 구원 역사가 될 수 없다. 마땅히 교회는 자신의 선교 활동 영역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인류 공동체와 인류 역사 전체로 넓혀야 할 것이다. 

 

세상과 사회의 복음화 운동은 단순히 입교자를 모으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며 그 자체로 선교의 본질을 구성한다. 교회의 복음 선교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인간 해방이라는 초월적 구원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 하느님 나라 구현이라는 총체적인 사회 구원과 복음화를 목적으로 한다. 실천적 차원에서 교회의 초자연적 구원 사명과 현세적이며 사회적인 복음화 활동 사이의 구분이 점차 불명확해지고 있다.

 

신앙 체험의 장은 현 사회이며 하느님 나라 강생의 자리 역시 현세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현세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로서 인간 해방으로 체험된다. 우리 현실에서 해방 체험의 장은, 곧 교회 선교의 자리는 항상 사회이다. 한국 교회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 예수님의 메시아니즘을 실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은 사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려는 구체적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 안에서 해방을 필요로 하는 곳에 교회의 선교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정치 혼란, 경제 위기, 입시 제도와 학교 교육, 남북 분단과 통일 문제, 환경 문제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전국 차원의 조직적이고 실천적인 복음 선교 방안이 마련되고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선교는 인류 사회에서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 성숙을 그 목표로 한다. 하느님 말씀을 영접함으로써, 곧 하느님의 다스림과 성령의 역사를 인간이 수용함으로써 이 사회에 하느님 나라가 도래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현세적 필요에 초점을 맞추어 초월 세계를 배제한 인간 중심주의의 선교관에 떨어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할 필요가 있다([교회의 선교 사명], 17항 참조). 

 

하느님의 창조와 종말론적인 완성이라는 해석 체계 안에서 인간 사회와 그 역사를 이해하는 교회의 선교는 순수 인간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역사의 완성과는 그 이해를 달리한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들은 정의 구현, 해방, 평화 등과 같은 현실 사회의 발전이나 인격 존엄 신장과 인간 상호간의 형제애 실현 등으로 축소시키려는 인간적 계획과 노력과는 구별되며, 더욱이 하느님 나라가 이러한 계획과 노력으로 전락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교회가 목표로 하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선교는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 언행에서 분리시킬 수 없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선포하는 것을 지향한다. 모든 선교 활동의 목적은 하느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다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교회의 하느님 나라 복음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증언 선교와 관련된다.

 

 

2. 그리스도 신앙 전달을 위한 증언 선교

 

복음서는 하느님 나라 도래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라는 이중 주제를 하나로 묶으면서, 하느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실현되며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써 하느님 나라를 선사 받게 된다고 증언한다. 법적인 상황에서 그리고 신념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께 대한 명시적이고 공개적인 신앙 고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증언(동사형 '마르투레오' , 명사형 '마르투리아' / '마르투리온')이라는 말이 신약성서에서 유래하고, 또 이를 위해서 신약성서가 편찬된 사실로 보아서 초대 교회에서는 증언이 아주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판명된다. 

 

현재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전달하려는 행위를 지칭할 때 증언과 증거라는 말이 서로 구별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선교교령, 11항; [현대의 복음 선교], 22항) 보통 혼용된다. 말의 증언과 삶의 증거를 구분해야 할 경우에 이 두 개념을 서로 대립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약성서가 사용하는 증인('마르투스')이라는 용어는 증언과 증거의 개념을 포괄한다. 

 

그런데 한국어는 '증언'과 '증거'를 명백하게 구분하며, 한국인의 의식을 보면 말보다는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의 종교 의식과 신앙 생활'에 대해 1988년 [가톨릭 신문]이 한 설문 조사에서 신자들의 선교 의식을 짐작할 수 있는데, 전교 활동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방법에 대해서 18.4%가 "이웃에게 직접 입교 권면하는 것"이라고 응답한 반면 66%가 "신자들의 훌륭한 생활의 표양"이라고 응답한 한다. 교구 설정 40주년을 맞이하여 대전교구가 실시한 신자 생활에 관한 설문 조사에서도 역시 중요한 선교 방법에 대해서 67.1%가 "모범적인 생활로 감화를 주는 것"이라고 응답하였다([가톨릭 신문], 1996년 2월 11일자). 대다수가 증언보다는 증거가 이상적인 선교 방법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삶의 모범적 표양이 강조된 결과 자신의 신앙 생활이 증거의 삶으로써는 충실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게 되어 말의 증언에 대하여 큰 부담을 안게 된 결과라고 본다. 

 

현재 선교 위기의 부분적 원인이 증언 선교에 대한 인식 부족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증언 선교를 하는 자신의 말이 권위와 신빙성을 갖기 위해서는 증거가 뒤따라야 한다. 그렇지만 삶의 증거 행위가 말로써 해석될 때 명시적인 신앙 고백의 기능을 갖는다. 증언과 증거가 상호 작용을 하며 보완적이지만, 증언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내적 구성 요인이기 때문에 증언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증언 없이는 계시도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은 그리스도교의 계시 원천이다.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요한 3,32)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진실한 증인"(묵시 1,5)이며, "참된 증인"(묵시 3,14)이시다. 초월 실재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으로서 그 실재가 내재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原)증언자시라는 사실은 그분만이 보고 들은 초월 실재이신 하느님을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은 서언에서 그분은 말씀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한다. 말씀은 증언으로서 세상 안에서 인간들이 체험하는 실재들과는 전혀 다른 실재를 사람들 앞에 드러나게 하는데, 이러한 증언은 그 자체로 계시를 구성한다. 

 

하느님께서는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계시하신다. 그렇지만 역사적인 그리스도 사건은 있는 그대로만으로는 계시 사건이 될 수 없으며 목격 증인들의 신앙 체험으로써 해석되고 증언될 때 하느님의 계시가 된다. 사도들의 증언이라는 중재 없이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없다. 증언한다는 것은 실제의 역사적인 사건을 언어 안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증언으로 "언어의 사건"(evenement de parole)1)이 됨으로써 새로운 실재로 해석된다. 이렇게 계시와 사도들의 증언은 서로 조직적으로 결속된다. 

 

사도들의 증언을 듣고 이를 받아들여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사도들의 신앙과 같은 신앙을 고백하면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그러나 사도 시대 이후 신앙인들이 목격 증인인 사도들에 비해서 신앙을 받아들이기에 불리한 조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목격 증인이나 사도 시대 이후 신앙인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시는 분은 언제나 같은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앙인의 증언은 개인적 체험의 단순한 표현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신앙 체험에 대한 해석으로서 증언이 사도 증언에 일치할 때 교회 전통과 결합된다. 교회 전통에서 사도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그리스도 신앙의 증언을 어떻게 오늘날의 언어로 옮기는가 하는 것이 현재와 미래를 위한 그리스도교 선교의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이다. 21세기의 역사적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앙 증언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될 수 있고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증언이 되기 위한 창조적 언어는 "희망의 언어"(le langage de l'esperance)2)가 될 것이다. 희망의 언어란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여 해방과 구원을 갈구하는 현대인의 요청에 부합될 수 있는 그러한 선교 언어를 말한다. 

 

신앙 고백과 신앙 전달이 중요한 임무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신앙 내용을 증언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가 체험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신앙에 대한 불확실성과 현대 사회가 신앙을 받아들일 만한 자세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신앙 전달을 위한 동기와 자기 확신과 같은 내적 요소, 그리고 현대인에게 믿음의 신빙성과 그 의미라는 외적 요소가 증언 가능성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신앙 전달을 위한 증언은 자신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증언은 비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신앙 내용을 입증하는 것에 앞서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평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열어 보이는 사람은 타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 내용을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인의 증언은 "하느님 현현의 절대적인 조건"3)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증언으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게 되며,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은 인간에 의해서 해석되고 받아들여질 때 가능하며 이로써 신앙이 전달된다.

 

 

3. 현재와 미래 사회를 위한 매체 선교

 

교회는 복음 증언을 위해서 신약성서를 편찬하고 정전화한다.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인쇄 매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언한다. 교회는 서적과 신문 등의 인쇄 매체 외에도 라디오와 텔레비전과 같은 음향 매체와 영상 매체 등 다양한 대중 매체를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다. 

 

증언 선교는 다양한 방법을 가진다. 직접 선교라 할 수 있는 대면(對面) 선교와 간접 선교라 할 수 있는 매체(媒體) 선교로 대별된다. 또한 대면 선교는 개별 인격자 선교와 집단 선교로 나뉠 수 있다. 또한 방문 선교와 거리 선교 또는 가두 선교로도 대면 선교가 분류될 수 있다. 대면 선교와 매체 선교가 각각 독립적으로 또 서로 결합되어 진행될 수도 있다. 보통 대면 선교에는 매체 선교가 복합적으로 병행되어 선교 전단이나 소책자가 배부될 때가 많다. 선교 홍보물은 직접 선교를 더욱 용이하게 하도록 도와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그리스도 신앙을 증언하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현재 각 교구에서 선교 전단과 책자가 제작되고 있지만 연령층과 환경에 맞추어서 더욱 다양한 내용을 담은 선교 홍보물이 제작되었으면 한다. 그뿐만 아니라 선교를 위한 홍보에 좀더 많은 예산이 배분되기를 바란다. 

 

미래 사회에서의 선교는 직접 선교만이 아니라 매체 선교가 불가결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현대 사회는 뉴미디어라 일컬어지는 컴퓨터를 이용한 복합 매체 시대를 열어 가고 있으며, 21세기는 더욱더 정보 사회로 발전할 것이다. 미래의 정보 사회에서 정보 산업의 창출자와 편승 이용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며 정보화에 뒤지면 탈락하고 말 것이다. 어떠한 사회 질서나 조직체도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교회와 교회의 선교도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서울대교구의 전산 체계가 아직은 시작 단계에 있는 타교구 전산화 작업의 견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컴퓨터 매체 선교는, 이 매체 이용자의 대다수가 점점 교회를 멀리하는 젊은층과 청소년층임을 감안한다면, 현재 교회와 젊은이와의 좋은 만남의 장을 만들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선교와 사목의 훌륭한 마당을 마련할 것임이 틀림없으리라고 본다. 

 

초고속 정보망을 이용한 컴퓨터가 21세기의 "새롭고 효과적인 형태의 설교대"([현대의 복음 선교], 45항)가 될 것이다. 기존 매체와는 달리 뉴미디어의 특징은 일방성 대신 쌍방성을, 메시지 전달보다는 의견 수용을, 지시에서 대화로, 일원화에서 다원화로 그 특징을 갖는다. 정보 사회를 맞이하여 시대의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교회의 창의력과 개방성과 순응력은 필수적이다. 

 

미래 사회는 대중 매체의 발달로 인간의 직접적인 만남은 줄어들 것이다. 이에 따라 성사 신학이 위기를 맞이할 것이며 오히려 말씀 신학이 정보 사회에서 각광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오히려 인간의 만남과 인간 공동체의 결속이 어느 때보다도 더욱 소중하게 될 것이며, 이로써 성사의 필요성이 한층 더 부각될 것이다. 인간 관계가 더욱더 단절되고 인간 소외 현상이 날로 심각해질 것으로 예측되는 미래의 정보 사회에서 교회의 선교 매체는 인간적인 만남과 인간의 공동체성을 회복시켜 주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교회의 매체 선교는 매체 이용 선교만이 아니라 매체 자체의 복음화를 선교 대상으로 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교회의 매체 선교는 대중 매체의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전환하여 성화시키는 시급하고 중요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4. 개방적인 교회의 새로운 선교 방안

 

복음 선교는 교회의 첫째가는 사명일 뿐만 아니라 바로 교회의 내적 필연성이며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에 교회의 존재 이유를 선교라고 한다. 한국 교회가 자기 선교와 이웃 선교에서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는 사실은 선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자체의 문제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선교 문제는 "선교 활동 자체"만이 아니라 "선교하는 교회 자체"를 비판적으로 반성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선교가 교회를 낳고 교회가 선교를 낳으므로4) 선교와 교회는 동시에 발생한다. 교회가 자기 비판적 관점에서 변화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새로운 선교 방안은 창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새로운 선교에 의해서 교회는 쇄신된다. 교회의 쇄신은 선교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선교를 정향하며 선교가 교회를 새롭게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교회는 결코 자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자신 안에 머무를 수도 없다. 순례하는 교회의 선교 상황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나날이 새롭게 변한다.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선교 방안은 세상의 변화와 교회의 쇄신과 불가분적으로 관련된다. 교회의 비판적인 자기 검증의 가장 근본적인 기준은 선교이다. 이런 의미에서 칼 라너의 "모든 신학은 선교적(kerygmatic)이다."5)는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따라 교회가 창의적인 선교 언어로 그리스도 신앙을 증언하면서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를 영접한다면 세상의 복음화를 위한 다양한 선교 방안이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새로운 선교로 자신의 전통적인 모습이 변화되는 것을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전통은 연속과 단절이라는 이중 질서 속에서 계승 발전된다.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가 아직도 전통이라는 명분 아래 밀폐된 채 자신의 모습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현세에서 하느님 부재 체험을 실토하는 실천적 무신론과 세속화 과정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을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선교가 새 모습의 교회를 낳고 새 교회상에서 새로운 선교 방안이 비롯되는, 선교 활동과 교회의 자기 이해가 상호 작용한다는 것을 21세기의 한국 교회를 위한 새로운 선교 방안의 결어로 삼고자 한다.

 

------------------------------

1) Claude Geffre? "Le temoignage comme experience et comme langage", in Le Temoignage, Aubier, Paris, 1972, 302면. 

2) Claude Geffre, Le christianisme au risque de l'interpretation, Cerf, Paris, 1983, 126면. 

3) Jean-Pierre Jossua, La condition du temoin, Les Editions du Cerf, Paris, 1984, 75면. 

4) 선교 중심의 교회상을 강조하고자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신부의 널리 알려진 표현인 "교회가 성체성사를 만든다; 성체성사가 교회를 만든다"(Meitation sur l'Eglise, Desclee de Brouwer, Paris, 1985년판)에서 "성체성사"를 임의로 "선교"로 대체하여 선교와 교회와의 관계를 표현하였다. 

5) Karl Rahner, "Theology", in Sacramentum Mundi, VI, edition English, Herder and Herder, New York, 1968, 235면.

 

[사목, 1999년 6월호, 허진호(부산교구 홍보국장, 신부)]



93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