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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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ㅣ복음화

한국 교회 선교 정책의 개선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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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53

한국 교회 선교 정책의 개선 방향

 

 

1. 시작하는 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이후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초대 교회 평신도들의 신앙 열기와 진리 탐구 의욕에 힘입어 발원된 한국 천주교회는 어느덧 217년의 연륜을 맞이하고 있으며, 세계 교회 차원에서 볼 때는 여전히 어린 교회이지만 선교가 가장 활발한 국가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오랜 시기 동안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서구 유럽의 교회가 정체된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에 비교하여 우리나라의 선교열과 선교 동향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 교회 내 선교 열의와 선교 활동은 예전과 달리 많이 약화된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선교 사명에 대한 의식조차 많이 퇴색하기에 이르렀으며, 선교의 필요성과 당위성마저 의문에 부치는 경향까지 보이고 있다. 이제 새롭게 교회에 들어오는 영세자 증가 비율의 약세를 비롯하여 양적, 질적인 두 측면을 고려해 보지 않을 수 없으며, 그 동기와 해결 방안을 더욱 심도 있게 모색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하겠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회 선교 활동의 쇄신을 위하여 인류 복음화 정책을 수립하고 그를 위한 투신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따라 교황 바오로 6세는 회칙 [현대의 복음 선교]를 선포하면서 교회의 선교 책무를 강조하였고, 선교사 교황이라고 불리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그리스도를 모르고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의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공의회 폐막 이후 거의 두 배나 증가하고 있다."(3항)라고 하며, 선교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있다. 한국 교회도 지난 1987년을 정점으로 하여 그 이후 새 입교자가 계속해서 줄어드는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냉담자가 더욱 늘어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한국 교회 선교 정책의 간단한 시대적 상황 진단에 이어, 시대별 선교 정책의 문제점에 대한 몇 가지 종합적 개선 방향을 탐구하도록 한다.

 

 

2. 한국 교회가 경험한 시대 상황 진단

 

민족 상잔의 비극이 끝난 직후 들어선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에 대해 비판의 주력군 역할을 담당하던 교회의 [경향신문]은 폐간 조치를 당하였고, 국가 공무원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은 불이익을 받는 등 천주교는 초대 공화국의 자유당 정권에게 직접, 간접으로 핍박을 받았다. 이후 계속해서 등장한 역대 군사 독재 정권 또한 한결같이 천주교를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회의 이러한 모습은 일반 대중에게 천주교회는 억눌린 자의 편에 동참하는 '정의의 수호자'이며 진실하고 참된 종교라는 인식이 깊어지게 하여 일반인 선교에 오히려 커다란 호응을 얻게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이른바 우마차 문화에서 흔히 다른 나라들이 겪는 이륜 구동 문화를 거치지 않고 자동차 문화로 빠르게 변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연이어 급속한 경제적 발달은 사회 각 방면과 구조에 다양하고 복합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미풍양속의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물질 중심의 가시적, 경쟁적, 이기적 가치관이 일반 대중 문화 안에 심층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두드러진 현상 한 가지는, 그동안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주도되던 한국 교회가 서울을 중심으로 서서히 한국 방인 성직자, 수도자에게 운영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역 교회가 스스로 자립해 가기 시작했음을 나타내는 커다란 표징이 되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는 1980년대에 들어서 군부 통치의 유일한 저항 세력으로 자리매김되면서 대사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강화하였다. 1987년 6월의 민주화 항쟁이 이루어지기까지 민주 정의 사회의 구현을 위해 '정의구현사제단', '정의평화위원회', '가톨릭 농민회' 등의 단체들을 중심으로 대사회 정의 평화 운동을 과감하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은 오늘날의 비정부 민간 단체 활동의 효시(曉示)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실적에 힘입어 한국 교회는 일본, 대만과 같은 인접국 교회와 달리 약동적으로 성장하고 활력적인 지역 교회로 알려지게 되어 다른 나라 교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세계 교회 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할 지역 교회로 기대를 모으기에 이르렀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세계 교회 내의 고명한 지도자들도 한국 교회가 이웃 민족과 온 인류의 복음화를 위해서 헌신해 주기를 강하게 촉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새로운 입교자가 감소하는 데 반해, 냉담자와 행불자는 해마다 증가하였으며, 특히 1970-1980년대의 주된 입교자들이었던 지성인과 대학생, 노동자 계층이 교회에 대하여 가장 냉담한 계층으로 급변하게 되었다. 또한 오늘날은 교회의 제반 활력과 원천적 생명력이 현저하게 쇠퇴해 가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1)

 

1990년대가 되어서는 인권 문제와 언론과 표현의 자유 및 집회의 자유 등 인간의 천부적 기본권에 대한 상황이 많이 신장되었으나, 사회 전체의 뚜렷한 질적 변화의 부정적 징후가 여과 없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개인 카-오너(car-owner)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되면서 과소비, 퇴폐, 향락, 가치 부재, 물질주의, 이기주의 등의 부정적 사회 세태가 교회 안에도 침투하기 시작하였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당 규모의 대형화는 신도들의 익명화를 가져왔고, 이것이 체계적인 신도 재교육의 부족, 개인주의적 신앙 구조, 소속감 결핍, 소외 감정, 정체성 상실, 교리 지식 부족 등과 어우러져 냉담자와 행불자 증가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게 되었다.

 

 

3. 한국 교회 선교 정책 개선 방향

 

1) 영성 쇄신

 

지난날의 한국 교회는 외형적으로 신자 수를 증가시키는 것에만 주된 관심을 모았으며, 교회 본래적 원동력인 영성은 소홀히 하고 외적인 신심 행사에 치중하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결과로 당연히 냉담자와 행방불명자가 늘게 되었다. 또한 가톨릭 교회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사회 인식이 비판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으며, 교회 내에서 노출되기 시작한 몇몇 부정적인 사정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성직자, 수도자, 일반 신자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이 그 빛을 잃어 가기 시작했으며, 사회와 지역에서 일반인들에게 그전처럼 더 큰 매력을 끌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과거 몇 년 동안 세속적인 사상이 교회 안에 꾸준히 스며들어 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와 세상의 견제와 균형, 대립과 구별이 상쇄(相殺)되고 세속적인 힘과 판단, 가치관이 교회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러한 세속의 역류적이며 퇴색적인 시류(時流)에 저항하여 새로운 복음화 운동을 비롯한 영성적인 대대적 쇄신2)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인 우리 자신들의 영성을 쇄신하는 운동을 해야 하고, 믿는 이들의 올바른 정체성을 다시 정립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영적인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어놓으신 지순한 사랑 그 자체이시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본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되돌려줄 수 있는 것이다.

 

더욱더 분명한 영성 쇄신을 위해서 선교사는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심오한 관상가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추구하는 항구한 기도 체험이다. 예수님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 전후에 깊이 기도하셨고(루가 3,12-22), 선교 여행을 하기 전에도 외딴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다(마르 2,35). 이 밖에도 사도들을 뽑기 전이라든지(루가 6,12),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내리시기 전이든지(마태 16,13-20), 심지어 이미 중책을 맡긴 베드로를 위해서도 미리 그의 장래를 위해 기도하셨다(루가 22,31-32).

 

이와 같은 항구한 기도의 힘을 바탕으로 하여 숙성되는 영성적으로 쇄신된 에너지와 지혜로써, 선교 일선에서 세상의 힘과 마주 대하고서 하느님 나라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선교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능히 완수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생명의 문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일구어진 생명의 문화는 참된 인간성을 압살시키는 죽음의 문화에 정반대 되는 것으로 상충된 영향을 낳고 있다. 생명의 문화가 인간 심성을 더욱 고양시키고 드높이 승화시키는 것이라면, 죽음의 문화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대되는 전형적인 비복음화 현상을 낳는 것이라고 하겠다. 죽음의 문화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죽음의 결과로 이끄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마약, 도박, 살인, 매춘, 낙태, 폭력, 안락사 등이다. 교회는 죽음의 문화가 생성된 원인을 인간 사회의 그릇된 풍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순간적 만족과 개인의 편의만을 추구하고 '존재'보다 '소유'를 더 중시하는 사회 풍조 속에서 낙태와 안락사를 정당하고 좋은 것으로 주장하는 죽음의 문화가 출현하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3)

 

존재관보다 소유관에 더 큰 중요성을 두고 있는 오늘의 문화는 아울러 질적인 가치보다 양적인 가치를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드러내고 있다. 양적인 가치관에 매여 있는 사람은 내면에서 느끼는 허무감에 젖어 정신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가치와 애덕적인 선행을 위해 요구되는 어려움을 포기하고, 그 대신 찰나적인 즐거움에 매료되어, 이기적이며 물질 우선주의와 생명을 경시하는 죽음의 문화와 사회 병리적 시류(時流)에 편승하여 고귀한 삶 자체를 그르치게 된다.4)

 

죽음의 문화를 배격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죽음의 문화가 낳는 그 결과에 대하여 교회와 사회 내의 뜻 있는 인사들과 지성인들이 침묵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해서는 아니 되며, 범사회적이며 전교회적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홍보하고 대상이 되는 젊은이와 청, 장년들을 집중적으로 교육하고 그들을 선도할 수 있는 사회적 공조 체제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교회가 주장하는 복음적 가치의 삶과 판단 지침을 소개하고 생명과 인권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 저변을 우선적으로 확산시켜 가야 할 것이다. 생명의 문화를 일으키고 그 중요성과 가치를 호소력 있게 설득하고 공감대를 넓혀 사회 일반으로 공론화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며, 반드시 선의의 공공 단체 또는 뜻을 같이 하는 민간 기구 등의 도움과 협력으로 함께 노력할 때,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문화를 교회 선교적인 차원에서 신장시키기 위해 거론할 때, 빠트릴 수 없는 것이 대중 전달 매체의 사회적 영향력이다. 이미 기정사실화된 현상이지만, 대중매체의 폭력성과 선정성은 영리적 수단의 병폐를 극렬하게 잘 보여 주고 있으며 반복음적인 요소를 지나칠 정도로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다 하겠다. 인간의 동물성과 감각성을 자극하여 철저히 반복음적인 메시지를 경쟁적으로 전해야 살아 남는다고 하는 대중 매체의 정글의 법칙은 현재의 추세로 보아 간단히 보아 넘길 문제가 결코 아니다. 이런 추세는 더욱 개인적이며 이기적인 개별 인간으로 만들어 현대인을 더욱 고독한 존재가 되게 하며, 단지 오감(五感)에 따라 판단하게 하여 비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사색과 성찰은 의미 없고 낡은 것으로 치부하게 한다. 오늘의 인류 사회를 복음화하기 위한 첫 번째 교두보로는 어쩌면 대중 매체 전달 내용의 복음화가 우선적으로 먼저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세태를 극복하고 개선하도록 온 힘을 다 기울여야 하며, 복음의 참된 생명의 말씀을 기회가 되는 대로 대중매체를 통해 선포하고 알려야 하는 것이다.

 

3) 심성의 복음화

 

교회의 사명은 인간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며 궁극적인 가치관을 피안의 세계관에 의해서만 아니라 이미 현세 안에서도 요청되는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관점으로 제시함으로써 그것에 따라 사람들이 구체적인 일상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이끄는 것이다.5) 이런 관점에서 교회의 선교 활동의 일차적 목표를 세상 안에서의 교회 이식, 부식을 통한 양적 팽창으로 국한시켜서는 아니 되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의 문화·문명의 확장과 재생산에 있다 할 것이다. 단순히 예비신자를 모으고 영세 입교시킴으로써 신자 수를 많게 하고 영혼 구원에 이바지한다는 종래의 타습(惰習)에 젖은 이른바, 구태의연한 보수적 자세와 준비로써는 교회 선교의 둔화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므로 인간 정신 세계의 근본을 구성하고 있는 인성, 심성의 총체적인 복음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동안 무서운 속도로 앞만 보고 달려온 한국 사회는 외부 세력의 영향으로 외적인 삶의 모습은 변하게 되었지만, 이에 맞갖으며 적절하게 연결되는 내적인 성숙과 변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되어 외적인 모습과 내적인 실상이 서로 조화와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현상을 낳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멸의 문화인 생명 경시 풍조와 인간성 말살 조류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간 심성을 근원에서부터 복음화하기 위해서는 아동 비폭력 교육, 낙태 예방과 산아 출산 교육, 알코올, 약물 중독 퇴치 운동, 올바른 성교육, 오락물의 폭력성 추방, 인간 생존에 많은 영향을 주는 환경 정화 운동 등을 손꼽을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인간 심성에 생명을 보존하고 존중하려는 확고한 의식을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할 것이다.

 

4) 소공동체 운동의 활성화

 

흔히들 한국 교회의 제3천년기 복음화와 선교 활동의 진로는 소공동체 운동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목은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 모두 공동체적 친교를 나누면서 함께 책임을 완수해야 하는 동반자적 활동 영역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공동체 운동은 교회의 대형화와 도시 본당의 비대화에 따른 친교적 관리의 어려움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의지대로 '길 잃은 양들'에 대한 관심과 사목을 더욱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함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무명의 그리스도인이 많아지며,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들어 설 자리가 교회에서마저 줄어드는 현세태에 소공동체 사목의 중요성은 더욱 증가된다 하겠다.

 

스스로 복음화되면서 친교와 선교의 두 가지 성과가 잘 드러나는 것은 '소공동체' 또는 '생활 공동체'와 같은 단위 규모의 작은 교회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러한 공동체를 복음화의 핵이라고 평가하였다. 이 같은 '작은 교회 운동'은 제3천년대의 한국 교회가 새로운 복음화의 일환으로 전개하면서 서로 나누고 섬기는 '소공동체 교회'를 바람직한 새로운 교회상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성화해야 할 것이며, 진정한 하나의 교회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6) 소공동체는 하나의 작은 교회로서 신도들의 삶의 현장이며, 하느님 체험의 현장이다. 하느님 말씀을 듣고 함께 나눔으로써 하느님을 만나고 형제애를 맛보게 된다. 복음의 빛으로 현실을 식별하여 행동하게 되고, 이웃을 위한 복음 선교의 도구가 된다. 중요한 점은 본당과 긴밀한 유대를 간직하며, 이웃의 소공동체와 상호 협력해야 한다는 점이다.7)

 

5) 미래 지향성

 

역사적인 대희년이었던 서기 2000년을 이미 지나 보낸 현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다가오는 미래의 교회 모습에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대희년의 첫 번째 단계(1994-1996년)에서 새로운 복음화 과업을 준비하였으며, 두 번째 단계(1997-1999년)에서 해마다 성자와 신덕, 성령과 망덕, 성부와 애덕의 해를 보내며, 이와 관련된 과업을 수행하며 준비하도록 하였다.

 

대희년의 여러 행사 과정을 지나친 지금 과연 우리는 또한 우리 사회는 얼마나 더 복음화되었으며 신망애 삼덕이 흘러 넘치는 사회가 되었는지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어쩌면 위로부터 내려오는 지침이기 때문에 자발성이 결여된 가운데 행사를 치르기 위하여 겨우 참여한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와 교회 안팎에는 비복음적 현상들이 여전하고, 거룩한 대희년을 지낸 공동체처럼 생각되지 않는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년대가 바뀌는 대희년이라고 하는 엄청난 격변기를 지내면서, 그에 대한 사전의 치밀하고 범교회적인 준비와 계획이 얼마나 효과 있게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참가하며 진행되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컨대 미래의 2011년에 맞이할 조선교구 설정 200주년 행사와 2034년의 한국 천주교 창립 250주년 기념 행사 등의 중요한 이벤트에 더 많은 교회 구성원들이 더욱더 열성을 다하여 참여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육과 효과적인 홍보가 전 교회 차원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교회의 앞날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면서 교회의 사목적, 선교적 차원을 고려하여, 장래에 필요로 할 수 있는 조치들과 신앙 교육을 철저히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역사적인 감각과 인식이 요구되며, 미래를 간파하는 혜안과 지혜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현실에 안주하여 자만하지 않도록 복음적인 판단 기준으로 세상의 시류(時流)를 조명하고, 늘 깨어 있는 자각이 긴요하다고 하겠다.

 

6) 북한 선교와 외방 선교

 

한국 교회는 대희년이라고 하는 역사적 대전환기의 시대적 징표에 부합하면서 또한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적 비전을 제시하도록 긴급하게 요청 받고 있다. 그러한 비전 가운데 하나로 북한 선교와 외방 선교를 새롭게 지목할 수 있겠다.

 

우리 선조들은 극도의 열악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조선 땅의 복음화를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쳤으나, 그 후손이라고 하는 우리는 선조들의 순교적 열정과는 전혀 무관한 듯이, 인간의 천부적인 기본권조차 누리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북녘 동포들과 북한 교회에 대하여 점차 무관심해지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역사적으로 왜정 시대 당시 조국 광복과 독립을 위해 투신하고 희생한 인사들이 개신교에서 가톨릭보다 더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오늘날의 우리는 부끄러운 면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가 조국 평화 통일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신하고 희생을 봉헌하지 않는다면, 통일 이후 역시 우리는 조국과 민족 앞에 부끄러운 면을 또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래에는 민족 통일을 위한 노력 여부에 대하여 반드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될 것인즉, 오늘의 평화 통일 노력과 북한 동포를 위한 교회의 직, 간접 지원이 얼마 만큼 적극적이었는지, 역시 미래에 조명받게 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물론 역사적 평가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국적 풍토 안에서 진정한 세상의 빛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조국과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얼마만큼 우리 각자는 북녘 동포들과 동시대인으로서 한 마음으로 아파하고 고민하며, 기도하고 관심을 모으며 크고 작은 희생을 들이고 있는지 마음 깊이 성찰하고 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북녘 동포를 위하는 마음을 공간적으로 확장하여 세계 교회를 위해서도 한국 교회가 헌신하고 희생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며, 특히 외방 선교의 중요성을 널리 강조하고 외방 선교를 장려해야 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에서 다음과 같이 외방 선교의 중요성과 특성을 언급하고 있다. "전체 교회가 선교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외방 선교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신자가 선교사이어야 한다는 말은 특수한 소명을 받은 종신 외방 선교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32항). "'예수께서 교회에 맡기셨고 매일같이 맡기시는 이 특수한 선교 임무를'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보편적 사명 안에서 경시하거나 홀대하거나 망각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 ......외방 선교 없이 교회의 사명은 그 근본적 의미를 상실할 것이고 그 사명을 증거하는 표본을 상실할 것이다"(34항).

 

새로운 천년대에는 제3세계가 교회 역사를 주도하는 시대로 예견하고 태평양을 새로운 지중해라고 호칭하며, 명실 공히 태평양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보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태평양 연안 국가들 가운데서 특별히 주목받고 있는 교회가 우리 한국 교회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평신도를 비롯한 교회의 여러 인사들이 활기차게 교회 활동에 참여하고 성직, 수도 성소가 여전히 다른 나라 교회보다 많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세계적 요청에 부응하여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조그만 울타리를 벗어나 시간적, 공간적 개념을 넓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외국에서 도움을 받아만 오던 한국 교회는 이제 세계 인류의 보편적 문제와 갈등을 함께 숙고하면서 세계 복음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의미에서, 외방 선교에 더욱 열심히 응답해야 할 것이다.

 

 

4. 나오는 글

 

한국 천주교회는 장차 새롭게 변화될 세계를 대비하며 지난 30-40년 동안 성령 쇄신 운동을 비롯하여, 한마음 한몸 운동, 소공동체 운동, 평화 통일 운동, 북한 동포 돕기, 외방 선교 등 여러 측면에서 준비하여 왔다. 이 가운데 어느 영역은 성공적으로 좋은 결실을 이루어 낸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영역은 그렇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후자의 경우, 선교 사목적 측면에서 크고 작은 많은 문제들을 일으켰는데, 여러 문제를 발생시킨 주원인으로서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이 성직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큰 탓이 있다고 하겠다. 특히 조국 복음화와 민족 선교에서 그 부진한 원인은 바로 사목자들의 선교 추진력과 선교 열성의 부족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역 교회 신자들의 선교 의식이 성직자의 선교 영성과 선교 인식의 정도와 정비례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다.

 

물질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20세기 후반부터 세속주의, 물질주의, 편리주의, 이기주의 등의 영향으로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국가였던 서구 북미의 교회들이 재복구하기 힘들 정도로 피폐한 처지의 모습으로 쇠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의 복음적, 도덕적 가치가 다시 회복되도록 요청하면서 새로운 복음화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오로지 새로운 복음화만이 깊고 빛나는 신앙의 성장을 보장할 수 있고 또 이러한 전통을 진정한 자유의 힘으로 삼을 수 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34항). 그래서 교황은 새로운 열의,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의 세 가지 영역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복음화 운동을 시작하도록 이끌고 있다.

 

한국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새로운 복음화 운동의 열기와 그 적극적 실천이 필요한 상황이다. 사회 전반이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심하게 체험하였으며, 이에 따라 오랜 가치 체계가 붕괴 위험에 직면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내적인 가치보다는 외적 가치와 겉모양에, 또한 질적인 가치보다 양적인 가치에 더 무게를 두는 세태가 되었다. 이 밖에도 팽창주의, 물량주의, 무한 소유욕에 매몰된 사회 조류에 교회 구성원 가운데 일부 인사들도 편승한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같은 무절제한 소유욕 위에 종교적 신앙과 복음적 가치관이 굳건하게 성립될 수는 없는 것이다. 교회 안팎으로 많은 사람들이 물들어 있던 팽창주의, 성과주의 등의 열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참된 모습의 우리 자신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선교 정책에서도 양적인 성과에 못지 않게, 냉담자와 행불자를 고려하며 사회 안에 질적인 가치관이 더욱더 널리 형성되도록 해야 하겠다. 그러므로 교회 바깥의 시류를 거슬러 질적 성숙이 계속될 때 진정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

 

끝으로 언급되어야 할 바는 복음적 증거의 구체적인 삶이다. 무릇 진리를 세상에 전한다고 하는 어느 종교이든지 그 교의적인 논리성과 설득성이 강하고 완벽하다 하더라도, 실천적인 측면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거나 간과되었다면, 그 종교는 종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이행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올바른 믿음이 형성되면, 일상적인 삶으로써 그 신앙을 자연스럽게 증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에 따른 영적인 능력이 삶을 증거하는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일상의 삶 안에 복음적 가치를 충분하게 증거할 수 있을 때, 참으로 교회의 선교는 완수되는 것이며, 세상의 누룩과 소금의 역할을 합당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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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상태, "[제삼천년기]에 비추어 본 민족 복음화와 세계화", [사목] 209호(1996.6.), 115-116면 참조.

2) 1980년대에 펼쳐진 '내 탓이오 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교회 안팎으로 좋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여전히 사회의 어둡고 비극적인 모습이 잔재하는 이유는 참된 회개와 자기 성찰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참된 내적인 회개 없이는 그 어떠한 운동과 행사라도 일회성 과시, 전시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3) 교황청 가정위원회, '절망에서 희망으로', 1991년; [회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제67호(1991.11.1.), 23면.

4) 김신호, "한국 천주교회의 선교 정책의 현주소", [사목] 157호(1992.2.), 49-51면 참조.

5) 오경환, "정의 평화 통일과 교회", [가톨릭 사회과학 연구] 제3집, 한국 가톨릭 사회과학 연구회, 1984년 12월, 15면 참조.

6) 권혁주, "소공동체 중심의 선교 방안", [사목] 209호(1996.6.), 8-19면 참조.

7) 유재국, "소공동체를 지향하는 본당 공동체", [가톨릭 신학과 사상] 9호(1993.6.),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23면.

 

[사목, 2001년 10월호, 배경민(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총무, 신부, 한국외방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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