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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새로운 복자: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 성직자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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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13 ㅣ No.1388

[새로운 복자] 한국천주교회의 성직자 영입 (1)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대사 : 윤유일 바오로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인 1780년대 말과 1790년대 초에 한국과 중국교회의 통교는 밀사(密使)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특별히 가성직제도 이후 성직자의 중요성을 자각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밀사(대사 : 大使)를 통해 성직자 영입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박해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대표로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에 선발된 대사가 바로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그리고 ‘박 요한’이었습니다.

윤유일(1760~1795)은 경기도 여주 점들(현: 경기 여주시 금사면 금사리)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양근 한감개(현 : 경기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습니다. 양근으로 이주한 윤유일은 대학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면서 서적을 통하여 차츰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 스승의 동생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이후 가족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여 결국 그들이 마음을 열고 입교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동생 윤유오(야고보), 그의 사촌 동생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 윤점혜의 남편 정광수(바르나바), 정광수의 동생 정순매(바르바라)까지 모두 1801년에 순교하여 올해(2014) 복자품에 오르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초기 교회 당시, 이승훈과 권일신 등의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가 성사를 집행하고, 미사봉헌을 할 수 있는가? 조상 제사가 합당한가?’하는 의문을 제기하였고, 이에 1789년에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대사)를 보내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지침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대사로 선발된 이가 바로 윤유일이었습니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비밀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매우 침착하면서도 대담하여 이 막중한 사명을 맡을 적격자였고, 처음부터 이 일을 알고 스스로 적극적인 자세로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윤유일은 1789년 10월에 주교에게 보내는 조선교회의 서한을 옷 안에 간직한 채, 북경을 오가는 가신단(家臣團)을 따라가는 상인으로 가장하여 중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다음 해에 북당에 있는 라자로회 선교사들과 남당에 있는 구베아 주교를 만나 서한과 그동안의 한국교회 사정을 전합니다.

윤유일의 북경 방문은 온 교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윤 바오로의 도착은 생각지 못했던 일로, 북경교회는 온통 환희에 젖었습니다. 아직 선교사도 찾아가지 않은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가르쳐준 일이 없는 나라에서 온 놀라운 복음 전파 소식을 듣고 교회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새롭게 생겨난 이 교회에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이 신자에게서 사정을 듣고 한 통의 서신을 보냈습니다.”

윤유일은 구베아 주교로부터 ‘가성직제도는 교회법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그만둘 것’과 ‘조선에서 성직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서한을 가지고 조선에 돌아옵니다. 윤유일은 이렇게 조선교회 최초의 대사로서 그의 임무를 다합니다. [2014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새로운 복자] 한국천주교회의 성직자 영입 (2) 성직자 영입 대사 :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조선교회 최초의 대사로서 중국교회를 방문해 맡은 바 임무를 다한 윤유일 바오로는 중국에 머무르면서 나(Raux, 羅) 신부에게 조건부 세례(받은 세례가 의심스러울 경우에 베푸는 세례)를 받고, 구베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는 북경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의 서한(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하라는 내용)과 조선 교회에 필요한 성물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윤 바오로는 1790년 봄에 귀국하여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조선교회 지도자들(이승훈과 권일신 등)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직자 영입 계획을 세운 후, 윤 바오로를 같은 해에 다시 북경으로 파견합니다.

조선교회에서 윤 바오로를 통해 보낸 서한(‘목자가 없는 어린양들을 돌봐줄 영혼의 목자를 보내 달라’는 내용)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성직자 파견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따라 1791년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를 파견합니다. 그러나 1791년 진산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이 제사를 거부하고 위패를 불사른 사건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나자, 정국이 경색되고 국경 감시가 심해져 국경 지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도스 레메디오스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성직자 영입은 다시금 뒤로 미루어집니다. 그러나 윤 바오로는 실망하지 않고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에 꾸준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한양의 궁중 악사 집안에서 태어난 지황 사바(1767-1795)는 조선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하여 교리를 배웁니다. 본래 성격이 순직하고 부지런하였던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만 열중하고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이나 궁핍, 고통 중에서도 절대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성직자 영입이 재개된 1793년, 이미 북경을 다녀왔던 윤 바오로를 비롯해 지 사바, 박 요한이 밀사로 선발되어 조선 국경까지 가게 되었으며, 지 사바와 박 요한은 조선의 사신 행렬에 끼어 북경으로 향하였고 윤 바오로는 그곳에 남았습니다.

북경에 도착한 지 사바는 구베아 주교를 만나 그동안의 조선의 상황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지 사바의 이러한 모습과 신심에 감명을 받은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놓았습니다. “우리는 지황의 신앙심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40일간 북경에 머무르는 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견진과 고해와 성체성사를 아주 열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북경 교우들은 그의 신심에 감화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한국 신자들의 간청에 감동 받은 구베아 주교는 1794년 초,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합니다. [2014년 9월 26일 연중 제30주일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새로운 복자] 한국천주교회의 성직자 영입 (3) 성직자 영입의 삼총사 :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



윤유일(바오로)과 지황 (사바)은 조선교회의 성직자 영입 대사의 역할을 다합니다. 북경 교구장이었던 구베아 주교는 이들의 방문에 감동하여 조선 교회가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목자를 파견해주기로 약속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임명합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삼총사’ (윤유일, 지황, 최인길)는 파견되는 신부님을 모시는 일에도 함께 힘을 모읍니다. 중국에서 주문모 신부의 조선 파견 소식을 직접 접한 지 사바는 주문모 신부와 국경에서 만날 장소를 정한 뒤, 먼저 그곳으로 가 윤 바오로와 함께 주문모 신부를 기다립니다. 기적적으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성탄 성야에, 한국 땅에 최초로 영혼의 목자를 모시는 데 성공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기쁨을 잠시 나눈 뒤, 주문모 신부를 12일 만에 한양 최인길(마티아)의 집에 모십니다.

최 마티아(1765-1795)는 서울의 중인 가문 출신 통역관으로 이벽(세례자 요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합니다. 1801년에 순교한 최인철(이냐시오) 이 그의 동생이기도 합니다. 최 마티아는 이승훈(베드로)이 신앙을 전파하기 위하여 선발한 최초의 회장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성직자 영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최 마티아는 국내에 머무르면서 조선에 입국할 성직자의 은신처를 마련하는 일을 맡습니다. 그는 한양 계동(현 : 서울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주문모 신부를 맞이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모 신부의 정체가 조정에 알려지면서 위험에 처합니다. 다행히도 신자들의 도움으로 주문모 신부는 집을 빠져나와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최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중국인 신부로 변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립니다. 최 마티아가 중국어로 말하자 포졸들도 그가 신부인 줄 알고 붙잡아 갔으나, 나중에 그의 신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최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를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고, 그의 입국을 도운 밀사(대사)인 윤 바오로, 지 사바와 함께 최 마티아도 체포됩니다.

성직자 영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 삼총사는 체포된 날부터 혹독한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가하면 가할수록 그들의 얼굴에는 천상의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들의 굳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오는 인내와 결심, 그리고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이에 박해자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이들을 사정없이 때려죽여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립니다. 이들은 이 땅에 성직자를 모시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다가 매를 맞아 죽어 강물에 던져졌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집짓는 이들의 머릿돌로 삼으시어 당신께는 영광, 우리 모두에게는 기쁨이 되도록 이끄셨습니다. [2014년 11월 2일 위령의 날 수원주보 4면, 최인각 바오로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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