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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가르침: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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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10-20 ㅣ No.593

[현대교회의 가르침] (34)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상)


인간 이성이 추구하는 진리, 모든 해답은 십자가에 있다

 

 

1. 회칙의 배경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 9월 14일에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밝히기 위해 발표한 회칙이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까지 인류는 꽤 긴 시기 동안 자연적 이성에만 의존하여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 왔다. 때가 찼을 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민의 구원 의지를 선포하셨다. 그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주변세계로 널리 전해져야 했다. 당시는 헬레니즘-로마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 유산은 고대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사도들과 교부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자연히 초자연적 계시와 자연적 이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 사이의 이 만남은 교부들과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을 통해 각각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는 방도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를 거치면서 이처럼 어렵게 성취된 조화로운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기되고 각기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부정적인 귀결들이 현대에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치정권 하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공산치하에서 사상 또는 이데올로기가 개개인과 사회의 생활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 교황은 자신의 사목 방향을 제시하는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1979)에서부터 창조의 정점이자 구원의 대상인 인간이 바로 “교회의 길”임을 선언했다.(14항) 최근에는 윤리 문제를 책임진 최고 책임자로서 「진리의 광채」(1993)와 「생명의 복음」(1995)이라는 두 개의 회칙을 통해 현대 세계의 도덕적 해이와 생명경시 풍조를 강하게 질타했다. 이제 재위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천년기의 여명이 밝아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현대 세계로부터 위협받고 있는 ‘진리’ 자체에 관한 교도권의 가르침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교황은 처음부터 현대의 위험을 보고 있었다. “금세기는 인간에게 대재난의 세기, 대 파멸의 세기가 되어 왔다. 그것도 단지 물질적 파멸만이 아니고 도덕적 파멸, 참으로 무엇보다도 도덕적 파멸의 세기이다.”(「인간의 구원자」 17항)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교황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현대의 위험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결핍”이다. 현대인은 신이 없는 시대, 형이상학 부재의 시대, ‘허무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허무주의는 우리 시대의 특징인 가공할 전쟁의 경험을 통하여 정당화되어 왔다. “이런 극적인 경험은, 역사를 이성의 진보이며 모든 행복과 자유의 원천이라고 보는 합리주의적 낙관주의의 붕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가 끝나가는 지금, 우리를 무섭도록 위협하고 있는 것은 절망의 유혹입니다.”(91항) 교황은 현대의 상황이 레오 13세가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 1879)를 반포하던 19세기 말의 암울하던 시대 배경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의 상황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다른 시대의 문제들이 새로운 각도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55항) ‘이성의 진리 인식 능력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가장 절박한 문제이다. 형이상학의 죽음을 부르짖으며 19세기에 교회를 위협하던 합리주의 또는 맹신주의가 오늘날 다시 되살아났다. 이 모든 위험들은 “새로운 천년기가 끌어안아야 할 도전들”이다.(103항)

 

그러므로 현대는 진리의 위기 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이성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신뢰를 포기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이성에 대한 근대 철학의 자족성(自足性) 선언에서 비롯된 ‘내재의 원리’(principii immanentiae)가 있다.(91항) 개신교 신학자 본회퍼의 표현대로 “성년에 이른 인류”가 이제까지의 신의 후견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 길을 찾겠다고 고집하는 세속화의 노선이다.

 

교황은 회칙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번 회칙에서는 ‘진리’ 자체라는 주제와,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 그 ‘기초’에 초점을 맞출까 합니다. 왜냐하면 급변하는 복잡한 현대가 특히 미래를 걸머질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정당하게 참조할 기준점이 없다는 느낌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6항) 교황은 참된 지혜에 이르는 길이 우리의 ‘인식 능력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회복’하고, ‘철학의 충만한 품위를 복권시키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교황은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성경의 가르침과 철학의 역사 그리고 교도권의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회고한다.

 

 

2. 성경의 가르침: 함축적 철학

 

지혜를 갈망하는 것은 만민의 공통 특성이다. 지혜문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피조물의 웅대함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것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 13,5) 그런데 세계와 역사의 사건들은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인간이 이성의 빛을 통해서 어느 길을 택할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신앙의 지평 안에서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정신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그 목표에까지 따라갈 수 있다.(16항)

 

성경은 인간이 세계, 백성, 하느님 사이의 ‘접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21항) 계시를 통해 다가온 신비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이성이 그때까지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깨달음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그런 무한자의 영역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있다. 첫째, 인간 인식은 끝없는 여정이다. 둘째, 진리 취득은 개인의 정복의 결과일 수 없다. 셋째, 이성은 마땅히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규칙들을 무시할 때 인간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결국 현자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18항)

 

이성이 어려움 없이 감각 소여들을 넘어 만물의 기원인 하느님께 이를 수 있는 것은 원래의 창조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감히 “충만하고 절대적인 자율을 누리겠다고 나서는 불순종 때문에” 하느님께 이르는 이 통로는 위축되었다. 이 순간부터 인간의 인식 능력은 진리의 원천이시며 기원이신 분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약화되었다. 마음의 눈은 점점 더 분명히 보지 못하고, 이성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의 포로가 되었다.(22항)

 

그리스도인에게는 육화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문제의 궁극적 해답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철학에 진정한 도전이다.(23항) 바로 여기서 이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 사이의 대립되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순수 인간적인 논리로 환원시키려는 온갖 시도가 실패하게 된다. 이성은 십자가로 표상되는 사랑의 신비를 제거할 수 없지만, 그 십자가는 이성이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지혜는 그것을 제한하고자 하는 모든 문화적 한계를 철폐하고,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보편성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철학적 통찰은 세계와 인간 생명은 의미가 있으며,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는 그 충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80항)

 

* 이재룡 신부(서울대교구)는 1982년 사제품을 받고 이어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3년부터 2011년까지 가톨릭대 성신·성의교정 철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 혜화동본당 주임으로 사목 중이다. 또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요약」, 「신앙과 이성」, 「인식론의 역사」, 「철학여행」 등 다수의 양서를 우리말로 번역, 출간해왔다. [가톨릭신문, 2014년 10월 19일, 이재룡 신부]

 

 

[현대교회의 가르침] (35)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신앙과 이성」 (하)


“신앙과 이성은 진리 향한 두 날개”

 


3. 그리스도교적 철학 전통

 

회칙은 ‘철학’(philosophia)의 어원이 ‘지혜에 대한 사랑’임을 지적하는 것으로(3항) 고전 철학의 역사 회고를 시작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적 세계 속에서 자연적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여 진리를 찾아 나섰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인간 이성의 능력만을 활용하여 우리 자신과 세계의 궁극적 근거와 의미를 묻고 그것을 영원불변하는 신들의 세계 속에서 탐색하는 제일철학 또는 형이상학의 길을 찾아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계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최고 원인으로서, ‘존재하는 분’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어떤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신성(神性)이라는 최고의 속성은 물론 실재 전체의 기획자로서 존재를 확립시키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자연(physis)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던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철학적 문제, 즉 ‘존재(esse)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교부들은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고에서 함축적이고 예비적인 형태로 남아 있던 것들을 모두 완벽하게 노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교부들의 독창성은 절대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는 이성을 환영하고 그것을 계시로부터 끌어낸 풍요로움과 혼합한 데 있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와 다른 문화 사이의 만남을 넘어,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만남”이었다.(41항)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신플라톤주의의 언어로 해설한다. 즉 그리스 철학의 두 원류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일자와 일자의 최초의 산출이며 다양한 만물의 원리가 되는 신적 지성으로 종합하고자 했던 기원후 2세기의 플로티누스의 철학적 노력에서 그리스도교를 이성적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단을 발견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서구 사상가들은 유한한 인간 이성이 근본적으로 다른 초월적인 순수 존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느냐는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그 자신은 이 문제를 신적인 빛의 조명설로 해결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경험적 사실을 경시하는 플라톤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이었다.

 

그런데 12-13세기에는, 극적으로 잊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서구에 소개되게 되고,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에는 이질적인 이슬람 종교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는 아랍 사상가들의 저작들도 서구에 유입되어 일대 문화적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아베로에스는 종교적 신앙과는 그가 별도로 ‘순수 이성 자체’라고 간주한 아리스토텔레스만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과 철학이 각기 고유의 방법과 원리를 가지고 있는 자율적 학문임을 인정하면서도 둘 사이의 자연적이고 상보적인 위계질서를 확실히하고, 이로써 신앙주의의 위험과 합리주의의 위험을 둘 다 피하고 중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 토마스는 다른 어느 신학자나 철학자보다도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자연’이 차지하는 역할을 강조하였다. 은총이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을 완성시키듯이, 신앙은 이성에 의존하고 이성을 완성한다.(43항)

 

교황은, 성 토마스를 ‘인간 지성의 최고봉’으로 격찬하며 ‘천사적 박사’의 사상에 대한 쇄신된 강조야말로 신앙의 요구들에 부합되는 철학의 활용을 활성화시키는 최선의 길로 판단하고 있는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의 모범을 따라 “성 토마스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가치”를 강조하며(57항), 토마스 아퀴나스를 “진리의 사도”(44항)이며 “우리 시대의 스승”으로 강력히 추천하고 있다.

 

이처럼 교부들과 스콜라학자들은 한결같이 신앙과 이성 사이의 근본적인 조화를 확립하였다. “신앙은 그 대상이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해될 것을 요구하고, 이성은 그 탐구의 정점에서 신앙이 제시하는 내용이 없이는 자신의 목적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42항)

 

 

4. 근대철학: 신앙과 이성의 분리

 

그러나 스코투스에서 비롯된 인간 이성의 절대적 진리 도달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오캄을 거치면서 심화되었고, 근대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수아레즈를 통해서 근대세계로 확산되었다. 

 

결국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에 이르러 이성은 신앙과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인 진리 추적의 길을 더듬어 나갔다. 세속화의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맹신주의를 추종했고, 철학자들은 절대 진리의 부적절함과 이성의 자족성을 주장하는 합리주의를 맹종했다. 데카르트에게는 아직 스콜라 철학과의 결속의 끈이 남아 있었지만, 칸트에 이르러서는 이성의 능력을 경험 현상계로 한정하고 형이상학과 신앙의 세계를 이성의 권역 바깥으로 완전히 추방시켜 버렸다.

 

일부 관념주의자들은 신앙과 그 내용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변증법적 구조로 변형시키려 들었고,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은 신앙을 합리성의 개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하였으며, 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과 윤리적 가치를 배격하고 기술적 진보만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근대 철학이 추구해 온 합리주의는 결국 허무주의의 도래로 귀결되었다.(46항)

 

이렇게 해서 보편적 진리와 지혜를 탐구하는 고상한 역할을 담당하던 철학적 이성이 이제는 인간 인식의 여러 영역 가운데 향락과 권력 등 실용적 목적에나 봉사하는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47항) 이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들로부터 위협받는 소외된 가련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해방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과학의 이름으로, 그리고 ‘인간의 이름으로’ 조롱받고 추방당한 형이상학과 신학은 결국 니체에 이르러 장중한 장례식을 치렀다. 적응을 강조하는 일부 신학자들은 ‘신의 죽음의 신학’이라는 모순같은 기획까지 전개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인류는 진보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방향과 규범을 상실한 채 불확실성의 시대를 견디고 있다. 19세기 말의 상황에서부터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5. 마무리

 

회칙은 사실 첫머리 인사말에서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진리, 곧 당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신앙과 이성은 모두 인간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수단들이기에, 서로 조화롭게 협력해야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이 허약한 추론보다 사태를 더 잘 꿰뚫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그때 신앙은 신화로 변질되던가, 아니면 미신으로 전락할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성숙한 신앙에 연결되지 않은 이성은 존재의 새로움과 근본성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잃어버릴 것입니다.”(48항)

 

회칙은 신학과 철학이 각각의 자율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자신의 풍요로운 본성을 복원해야 함을 강조하며, 현대의 절박한 과제로 형이상학의 복원을 들고 있다. 경험적 현상 세계를 넘어, 영성의 핵심과 그것이 솟아나는 토대를 관통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83항) 인간 이성이 ‘존재 현실’에 바탕을 둔 형이상학적 차원을 복원할 수 있을 때라야만, 근본 토대에 이르는 길을 포기하고 현상에만 집착하는 현대의 무질서와 혼동은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은 동일한 절대 진리에서 나온 선물들이기에 절대로 모순될 수 없는, 인간의 초자연적 계시 수용 능력인 신앙과 자연적 이성을 다시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일이야말로 두 번의 천년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인류가 이루어야 할 가장 절박한 과제라고 보고,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이 과제에 투신할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4년 10월 26일, 이재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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