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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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1834~1836년 여항덕 신부의 조선 대목구 사목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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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07 ㅣ No.1070

1834~1836년 여항덕 신부의 조선 대목구 사목 활동*

 

 

국문 초록

 

1834년 초 입국한 이래 1836년 말까지 조선에서 활동했던 중국인 여항덕 신부는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 신부의 선교 방침을 기본적으로 준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 신부는 주변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주문모 신부보다 더 신중하고 엄격한 성사 집전 방침을 관철해 나갔다. 어느 정도 교회 체계가 잡혀가자 여항덕 신부와 조선 신자들은 가옥을 구입하여 공소를 설립했는데, 이는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성사 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항덕 신부는 입국 후 유일한 선교사제로서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만들면서도 신자 지도자들에게 회장 등의 교회 직책을 부여하여 그들의 조언과 협력을 구하였다. 여 신부에 의해 선발된 신자 지도자들은 직책에 따라 공소를 관리하거나 교리교육, 비신자 전교, 여성 신자 관할, 파발꾼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서울은 물론 지방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신자 지도자들은 여 신부의 중국 귀환 이후에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을 도와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를 했고, 1839년 이후 이어지는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조선 천주교회가 사제-신자로 구성되는 교회 조직을 재건하고 독립된 선교지(대목구)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여항덕 신부의 사목 활동은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신자들을 규합하여 초창기 조선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신자와 선교사제의 협력체제를 강화해 나갔다. 그가 조직한 교회 체계와 신자 지도자층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에게도 계승되어 조선 천주교회가 조선 사회에 뿌리는 내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1. 머리말

 

1801년(신유) 천주교 박해 이래 조선 신자들로만 구성된 조선 천주교회는 지속적으로 선교사제 파견을 북경교구와 로마 교황청에 요청했고, 그 결과 1831년 9월 9일 조선 대목구가 북경교구에서 분리되어 설정되었다.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가 초대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교황청 포교성성은 신학생 시절부터 조선 선교를 자원한 여항덕1) 신부2)를 선교사제로 파견하여 조선 신자들을 돌보게 했다.

 

이와 같이 조선 천주교회가 선교사제의 입국을 계기로 사제-신자로 구성되는 교회조직을 재건하고 독립된 선교지(대목구)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여항덕 신부의 선교 방침과 사목 활동이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런데 여항덕 신부 본인과 그 사목 활동은 동시기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에 의해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항덕 신부가 북경에 있는 남경 주교와 짜고 자신의 입국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조선 대목구장 직무 대행이었던 모방 신부는 추문 등의 이유를 들어 여항덕 신부의 성무집행을 정지시키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했다.3) 한국 천주교회사 이해에 큰 영향을 끼친 달레 신부는 위의 선교사제들의 평가를 종합하여 여항덕 신부가 조선말을 배우려 하지 않았고 서울에 틀어박혀 지방 교우촌을 돌보지 않았으며 성직을 남용하여 돈을 벌었고 부도덕으로 사제직을 더럽혔다고 서술했다.4) 이러한 달레 신부의 서술은 통설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여항덕 신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5) 한편 교회사 학계에서는 프랑스 선교사제와 여항덕 신부의 갈등이 포르투갈의 북경교구와 파리 외방전교회 사이에 있었던 반목의 연장선에 있으며, 프랑스 선교사제의 여항덕 신부 비난에는 편파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6)

 

여항덕 신부에 대한 통설적 이해는 1990년대 후반 새로운 시각과 새로 발굴된 원자료에 기반한 연구에 의해 비판되기 시작했다. 김기협은 여항덕 신부가 적응주의와 보유론의 연장선 위에서 천주교회의 토착화와 조선인 사제 양성에 각별한 관심과 강한 의지를 가졌다고 평가했다. 또한 소극적으로 보이는 여항덕 신부의 사목 활동도 박해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조선 교회의 자립을 도와주려는 선교 방침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추론했다.7) 한편 최승룡과 전수홍은 로마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예전의 포교성성)의 고문서실에서 여항덕 신부의 서한 자료를 발굴함으로써 새로운 연구가 진척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8)

 

새로 발굴된 자료를 바탕으로 전수홍은 여항덕 신부가 성무 집행 정지 죄목(추문)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사목 활동을 계속했음을 근거로 성무 집행 정지의 타당성을 의심하고, 추가 자료 발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여항덕 신부가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직시하여 신중한 사목 활동을 하면서도 조선인 사제 양성과 공소 설립 등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보았다. 결국 여항덕 신부가 모방 신부에 의해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은 당시 동아시아 선교회 간의 갈등과 조선 포교권을 위탁받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과의 불협화음에 의해 희생된 결과라고 추론했다. 더 나아가 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고려했던 여항덕 신부의 적응주의적 선교 방식이 부정되고 권위주의적이면서 성속 분리와 성사 중심의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천주교회를 관할하게 되면서 조선 천주교는 초기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평신도 사도직이 쇠퇴하고 수동적인 성직자 중심교회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9)

 

이후 여항덕 신부와 그 사목 활동에 대한 새로운 자료 발굴이나 분석이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조선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입국을 주저하면서 한편으로 여항덕 신부와 함께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을 남경 주교에게 제시한 이유와 배경을 재해석하는 연구들이 나왔다. 이러한 연구들은 외국인 선교회(포르투갈 관할의 북경교구와 파리 외방전교회)와 여항덕 신부 외에 과거 주목받지 못했던 조선 신자들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여항덕 신부를 둘러싼 시대 상황을 좀 더 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10) 전수홍은 북경교구와 로마 교황청에 계속해서 서한을 보낸 조선 신자의 ‘자발성’이 조선 교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선교사제 파견과 조선 대목구 설정이라는 성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또한 조선인 사제 양성을 제시한 것도 서양인 사제로 유발될 박해의 위험을 피하고 적극적으로 조선 교회의 발전을 도모한 조선 신자들의 ‘자발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보았다.11)

 

윤민구는 조선 신자들이 여항덕 신부가 입국하기 훨씬 전부터 서양 선교사제의 조선 입국을 주저했으며, 공식적인 외교사절에 의한 천주교 공인 방안[대박청래(大舶請來)]을 일관되게 북경교구와 교황청에 제시 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때문에 조선 신자들은 조선인 사제 양성 문제에 소극적이었는데, 여항덕 신부의 입국 이후 외국인 선교사제의 활동이 어렵다는 점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조선인 사제 양성 방안을 제시했다고 보았다.12) 반면 ‘동양인은 소심하고 무기력하다’는 편견을 지녔던13)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항덕 신부와 조선 신자들의 제안을 무시했으며, 자신의 조선 입국을 방해하려는 여항덕 신부의 사주를 받아 조선 신자들이 주저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파문’을 들먹이면서 자신의 조선 입국을 관철해나갔다고 했다.14)

 

1990년대 후반 이후 여항덕 신부에 대한 연구성과들은 새로운 시각과 자료를 통해 편파적이고 부정적이었던 통설적인 이해를 극복하고자 했다.15) 그 결과 파리 외방전교회와 대비되는 여항덕 신부의 사목 활동 특성, 조선 대목구 설정을 둘러싼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의 동아시아 선교 정책과 선교회와의 갈등 양상,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여항덕 신부 인식(프랑스 선교사제의 동양 · 조선 인식), 조선 신자들의 주체적인 입장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여항덕 신부와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충분히 수합 · 소개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16) 특히 여항덕 신부가 중국으로 귀환한 이후 조선 대목구의 선교사제와 신자들이 남긴 자료에 대한 분석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못했다. 여항덕 신부의 선교 방침이나 사목 활동이 그의 사목 서한에 의해 드러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조선 신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확인하는 기초적인 작업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다.

 

조선 대목구의 선교사제와 신자들이 남긴 자료에서 확인되는 여항덕 신부 관련 기록을 여항덕 신부의 사목 서한 등과 비교, 분석한다면 여항덕 신부의 사목 활동과 그 특성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는 조선 천주교회가 사제 없이 신자들로만 유지되다가 파리 외방전교회의 관할 아래 사제-신자로 구성되는 조선 대목구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선교사제와 신자들이 구상했던 조선 천주교회의 지향점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본 논문은 기존 연구들의 시각과 성과를 바탕으로 관련 자료를 종합하여 여항덕 신부의 사목 활동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여항덕 신부 등 선교사제의 서한과 신자들에 대한 기록을 중심으로17) 여 신부의 사목 활동을 주제별로 나누어 살펴 보겠다. 2장에서는 성사 집전의 구체적 양상과 선교 방침을, 3장에서는 선교 자금 사용을 통해 공소를 설립·활용하는 과정을, 4장에서는 교회 조직을 정비하면서 신자들에게 직책을 주어 교회 활동에 참여하게 했던 이유와 구체적 사례를 다루겠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여항덕 신부가 추구했던 선교 방침(지향점)과 사목 활동의 특성이 드러나고 조선 천주교회사에 미친 영향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2. 여항덕 신부의 성사 집전과 선교 방침

 

여항덕 신부는 조선 신자의 안내로 1834년 1월 3일 국경을 넘어 같은 달 16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는 남이관과 정하상이 마련한 살리뭇골(현재 서울 중구 산림동) 집에 머물면서 성사 집전을 하기 시작했다.18) 자신의 입국과 성사 집전, 조선 천주교회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그해 9월 18일19)에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11월 18일에는 북경교구를 관할하는 남경 주교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에게 서한을 작성해서 보냈다.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여항덕 신부는 10개월간에 걸쳐 100명밖에 성사를 주지 못했다고 했다. 입국한 지 11개월 후에 남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성사 집전 내역20)이 나오는데 성사 횟수를 다 합쳐도 204건에 불과하며 세례와 보례를 받은 신자는 어른과 아이를 합쳐도 130명을 넘지 못한다.21)

 

이와 같이 성사를 받은 신자들이 많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여 신부는 1801년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이후에도 박해가 지속되고 있고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주문모 신부 때처럼 변절자(배교자)가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신부의 존재를 숨기고, 성사를 볼 신자도 먼저 가족이나 동료 신자가 그 진정성을 시험해 본 다음에야 신부를 만날 수 있게 한 방침도 성사 집전의 수치가 많지 않은 이유였을 것이다. 다른 신자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신자들은 이미 신앙적으로 검증을 받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항덕 신부 입국 전 부터 조선 교회를 이끌어가던 지도자들이 주축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신중하고 은밀한 성사 집전 방식은 주문모 신부 때에도 실시되었는데,22) 신부의 보호와 천주교회의 안전을 위해 여항덕 신부 입국 초기부터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23) 또한 여항덕 신부는 주문모 신부가 고백을 듣기 전에 먼저 세례를 주었던 방식을 바꾸어 먼저 오랫동안 고백을 듣고 세례를 주었다.24) 즉 신자 개인의 신심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난 뒤에 성사를 주는 엄격한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이미 세례를 받은 많은 아이에게 보례를 주고, 의심스러운 성인 세례에도 다시 세례(1835년 성사 보고)를 준 것 역시 엄정하게 성사를 주려는 여 신부의 선교 방침에 의한 것이라고 보인다. 한편 여항덕 신부의 집에는 처녀(동정녀)와 과부들이 남성 신자의 부인이나 여종으로 가장하여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밤중에 다른 여신자들을 데려와 성사를 받게 했다. 실제 신자들에 대한 기록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여항덕 신부와 관련된 조선 신자들은 아래 [표1]과 같이 50명 정도다.25)

 

 

 

성인을 포함한 조선 순교자 31명에 대한 기록(약전, 증언)에서 여항덕 신부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시복재판록 증언자 19명은 자신이 알고 있는 순교자에 대해 증언할 때 여 신부를 언급하거나 직접 여 신부에게 성사 등을 받은 사실을 증언했다.26)

 

남명혁은 성사를 받기 위해 여러 번 다른 신자에게 부탁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고, 나중에 간신히 들어가 여항덕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회장 소임까지 맡게 되었다.27) 이승훈의 아들인 이신규도 세례를 받기 위해 신자를 찾아가 교리를 배우려 했으나 신자들이 의심해서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이신규는 자기 집안으로부터 천주교가 시작되었는데 자신을 푸대접하냐고 항의했고 그의 진정성을 확인한 신자가 여항덕 신부에게 알렸다. 여 신부는 이신규를 불러 자세히 물은 뒤에 세례를 주었다.28) 1826년생인 김 베네딕타는 어려서 대세를 받고 여항덕 신부에게 보례를 받았는데, 대략 9~11세의 나이였다.29) 한 바울라는 16세 때인 1834년에 여항덕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당시 여 신부의 복사였던 권진이가 대모였다.30) 아마 권진이의 안내로 성사를 받았을 것이다.

 

여항덕 신부가 성사를 집전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언어 문제였다. 여 신부는 언문(言文)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31) 조선말은 매우 어렵다고 했다. 대신 고해성사를 할 때 한문을 통해 서면으로 하거나,32) 중국어가 가능한 신자들이 통역을 했다.33) 이때 역관인 유진길이나 연행사 마부였던 정하상, 조신철 등이 통역 역할을 했을 것이다.34)

 

이와 같이 여항덕 신부는 조선에 들어와 사목한 첫해인 1834년에는 최대한 조심하면서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성사를 집전했고, 주변 신자들의 협조를 통해 조금씩 사목 활동을 확대해 나갔다. 반면 1835년의 사목 활동은 그 전해에 비해 비약적인 성과를 거두었는데 1834년 10월부터 11월 29일까지 집전된 성사 35)의 수치에서도 그것이 드러난다.36) 성인 세례, 고해성사, 성체성사 등은 거의 5배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 추세는 여항덕 신부가 모방 신부에 의해 성무 집행 정지 조치를 받는 1836년 초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다.

 

1835년 3월에 브뤼기에르 주교와 남경 주교로부터 선교 자금을 받아 공소 가옥을 구입하고 이 공소를 중심으로 신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동시에 여항덕 신부를 중심으로 조선 천주교회가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어나가면서 성사 집전과 전교 활동이 본격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능력 있고 성실한 조선 신자들이 교회 직무를 맡아 여 신부를 보좌하면서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을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1834년에는 여러 가지 여건상 여항덕 신부가 살리뭇골 가옥(신부댁)에 은신하면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는 방식을 취했다고 추정되는데, 서울과 그 근교에 공소를 설립한 뒤에는 직접 공소를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했을 것이다. 유일한 선교사제였던 여 신부가 서울을 떠나 먼 지방까지 방문했을 가능성은 높지 않았을 것이고, 실제 자료상에도 확인되지 않는다.37) 그러나 적어도 경기도 지역까지는 사목 방문을 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자료를 통해 확인해보면, 이름이 밝혀진 신자 중 여항덕 신부에게 보례를 받은 이는 2명,38) 세례를 받은 이는 23명39)이다.40) 이들 대부분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여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지만, 양지 은이(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 살던 오 바실리오는 서울로 올라와 현석문이 대부로 참석하는 가운데 여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41) 한편 여항덕 신부가 회장으로 임명한 남경문은 여 신부가 시골로 사목 방문 다녀올 때 수행했다.42) 모방 신부는 1836년 사순절43)이 시작된 무렵 여항덕 신부가 굴암(Kouram, 현재 경기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마을로 가서 고해와 세례 성사를 집전할 예정이라고 했다.44) 이와 같이 여항덕 신부의 사목 활동이 본격화된 이후 지방의 신자가 서울로 올라와 성사를 보기도 하고, 여 신부가 조선 신자(회장)와 동행하여 지방으로 사목 방문을 했던 것이다.45)

 

조선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선교사제이자 외국인(중국인)인 여항덕 신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주문모 신부의 선교 방침을 기본적으로 준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항덕 신부 입국 전부터 조선 교회를 이끌어가던 신자 지도자들도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경험했거나 전해 들은 세대였기 때문에 여 신부의 선교 방침에 적극적으로 호응했을 것이다. 여 신부는 주문모 신부보다 더 신중하고 엄격한 성사 집전 방침을 관철하면서 조선 신자들의 협조를 바탕으로 서울과 그 근교에 공소를 설립하고 지방까지 사목 활동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모방 신부의 입국 이후 여 신부의 사목 활동에 제약이 걸리게 되었는데(성무 집행 정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 신부는 계속해서 사목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36년에 집전된 성사의 내역이나 사목활동 내용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실상은 알 수 없다.

 

 

3. 선교 자금의 사용과 공소 설립

 

포교성성의 지시로 파견된 여항덕 신부는 남경 주교의 원조 아래 조선에 입국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1834년 9월 무렵에는 선교 자금을 다 써버려 겨우 끼니를 해결하는 곤궁한 처지에 있었다. 흩어져 있는 신자들도 극도로 가난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을 방안도 없었다.46)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입국을 확정하고 조선 신자에게 그 준비를 지시하자 신자들은 그 비용으로 500냥(테일)을 요청했고, 여항덕 신부는 별도의 선교자금으로 300냥을 요청했다. 이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500냥을 마련하여 신자들에게 주고 여 신부에게는 100냥만 주었다. 여 신부는 남경 주교에게도 자금을 요청했는데 남경 주교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냥을 따로 내주었다.47) 이러한 과정을 통해 1835년 3월, 800냥의 자금과 각종 성물, 물품들이 여항덕 신부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주교의 입국 준비를 위한 자금 500냥 중 조신철이 북경에서 체류 비용으로 150냥을 쓰고, 또 유진길이 개별적으로 150냥을 사용했다. 주교의 입국 준비 자금 중 실제로 사용된 것은 200냥이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남경 주교가 여항덕 신부에게 준 300냥은 조선 대목구에서 가장 시급한 일에 사용되었다. 그것은 신자들을 모아 성사를 집전하고 교리교육과 전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공소 가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48) 여 신부는 1835년 11월 이전까지 서울 도심지에 다섯 채, 서울 근교에 세 채의 집을 마련하여 공소로 사용하도록 했다. 또한 조선 신자들이 스스로 모금하여 많은 다른 집(공소)을 준비했다. 그 외에 여 신부는 숙박소(여관)를 150냥에 구입했고, 70냥짜리 집도 한 채 구입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49)

 

이와 같이 여항덕 신부는 중국에서 들여온 선교 자금을 사용하여 대목구 소유의 숙박소, 포도나무 농장, 공소 가옥 여덟 채를 구입했다. 공소 외에 신자들이 왕래할 때 편의를 제공할 숙박소와 포도주(미사주)를 자체 생산할 수 있는 포도 농장을 마련한 것은 좀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사목 활동을 계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마련해서 공소 가옥을 구입한 것인데,50) 1834년 당시 흩어져 있으면서 극심하게 가난했던 신자들이 1835년에 들어와서는 뜻을 모아 많은 가옥들을 구입할 정도로 상황이 호전된 것이다. 이는 여항덕 신부와 신자들의 노력으로 천주교회가 기틀을 잡아나가면서 흩어진 신자들이 점차 모여들었고, 신자들 중 부유한 사람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공소 설립에 적극적으로 나선 결과일 것이다. 여 신부의 공소 가옥 구입과 신자들의 공소 마련은 신자들의 증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여항덕 신부는 지방에서 ‘판공’51)하러 오는 신자들을 위해 홍살문(현 서울 종로구 홍파동, 또는 마포구 도화동)에 집(공소)을 사고 그 공소 주인으로 정국보를 정했다.52) 이영희가 동정 생활을 위해 시흥 봉천(현재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서울로 올라와 여러 신자 집을 전전하자 여항덕 신부가 학다리골(현재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에 집을 사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이 집에서 이영희는 언니 이정희(과부)와 조카딸 이 바르바라(동정녀)와 함께 실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다.53) 이 집은 독신 여성 신자들의 거처였을 뿐 아니라 ‘판공’ 시기에 주변 여성 신자들이 모여 성사를 받는 공소이기도 했다.54)

 

여항덕 신부에게 식구 전체가 세례를 받은 이광헌은 집안이 극도로 가난해서 집도 없었는데, 당시 신자들이 모금하여 고마창골(현재 서울 종로구 평동) 집을 사서 이광헌에게 맡겨 성사를 받을 때 공소로 활용했고, 평소에도 많은 신자들이 모여 첨례를 지켰다. 이광헌은 공소 회장이 된 뒤에는 비신자에 전교하고 냉담자를 회개시키는데 열성적으로 활동했다.55) 부유했던 김성우는 여항덕 신부에게 자주 성사를 받기 위해 고향인 광주 구산(현재 경기 하남시 망월동)에서 서울로 올라와 집을 구입하고 거기에 경당(공소)을 마련했다. 나중에 모방 신부도 김성우 집에서 한 여름 동안 거주했다.56)

 

여항덕 신부가 선교 자금으로 구입한 공소 가옥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가 입국한 이후 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여항덕 신부가 구입한 가옥(신부댁 포함)은 여덟 채였는데 1836년 3월 모방 신부에게 넘겨줄 때는 일곱 채였다고 한다.57) 한 채는 살리뭇골에서 따로 나와 거처했던 여항덕 신부의 집58)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모방 신부는 여항덕 신부가 구입한 가옥이 쓸모가 없다고 폄하하면서도 대목구 재산으로 계속 유지하겠다고 했다.59)

 

그러나 1836년 9월(음력)에 박해가 일어났고,60) 공소 가옥 유지에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앵베르 주교는 여항덕 신부가 신자의 헌금으로 구입한 공소 가옥 다섯 채 중 세 채가 탄로 나서 어쩔 수 없이 싼 값에 팔아버리고 대신 비싼 값으로 두 채를 사서 모두 네 채가 남아 있다고 했다.61) 이후 1839년 박해가 일어나면서 공소 가옥이 포졸들의 습격을 받고 공소회장을 비롯한 신자들이 잡혀가면서 여항덕 신부와 신자들이 마련했던 공소들은 모두 폐지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여항덕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가옥을 구입하여 공소를 설립한 것은 우선 신자들의 구심점을 마련하여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여 신부의 성사 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신심이 깊은 가난한 가족이나 독신 여성들을 공소 가옥에 거주하게 하여 그들의 생계를 돕고 교회 활동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즉 신앙의 측면과 함께 신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여항덕 신부는 개인 돈으로 작은 농지 5필을 구입해서 자신과 매우 친한 가난한 다섯 신자 가족에게 나눠주어 생계를 도와주기도 했다.62)

 

 

4. 교회 조직의 정비와 신자의 교회 직책 수행

 

1801년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조선 신자들은 30여 년간 선교사제 없이 박해와 곤궁에 시달리면서도 천주교회를 재건하고 천주교 복음을 전파했다. 여항덕 신부가 입국하는 1834년 무렵까지 6명으로 구성된 핵심 지도자들이 선교사제 영입을 비롯한 중요한 교회 업무를 주관했으며, 회장과 교사들은 신입 신자와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세를 주었다.63)

 

이와 같이 선교사제의 부재 속에서도 조선 신자들은 자발적으로 교회 활동을 수행하면서 교세를 회복해 나갔다.64)

 

이러한 조선 천주교회의 자발적 조직은 사제-신자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천주교의 특성상 선교사제의 입국 이후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65) 여항덕 신부는 조선 입국 이후 교회 업무를 자기 혼자서 관장하면서 아무도 관여하지 못하게 했으며, 내외로 엄한 규칙을 세운 다음 모든 신자에게 순명하라고 명했다. 여 신부의 지휘 아래 신부댁의 명목상 주인인 남이관, 정하상 외에 서너 명의 회장이 교회 일을 돌보았다.66) 6명의 지도자를 주축으로 하는 자발적인 신자 조직이 해체되고 대신 기존 지도자를 포함하여 여 신부가 임명한 회장들이 교회 직무를 맡는 체제로 재편된 것으로 보인다.

 

새로 재편된 교회 조직에서 최종 결정권은 여 신부가 행사했지만, 신자 지도자(회장)의 역할은 매우 컸다. 언어의 장벽과 신변의 보호 문제로 여 신부의 직접적인 사목 활동은 제약이 많았기 때문에 신부의 복사와 회장 등이 성사를 볼 신자의 진정성 검사, 사목 방문 수행, 고해 통역, 공소 운영, 비신자 전교 등의 전반적 교회 업무를 맡았다. 여 신부는 신자 지도자(회장)의 조언과 협력에 크게 의존했으며,67) 교회 직무를 맡은 사람들을 신부댁으로 불러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68) 또한 엄격한 심사를 거치는 성사 집전을 통해 알게 된 모범적인 신자들에게 회장 등의 교회 직책을 부여하여 교회 활동에 참여하게 했다. 여 신부가 임명한 신자 지도자들에 대한 기록은 신자들의 증언 속에서 확인된다.

 

앞에서 언급한 남경문은 여항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된 후 여 신부가 시골로 사목 방문 다녀올 때 수행했다. 그는 원래 금위영(禁衛營) 포수이면서 남의 돈을 빌려 일수 사채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여 신부가 그에게 고리대 사채 받은 것을 다 돌려주라고 지시하자 이에 따랐다.69) 앞에서 언급한 남명혁은 여 신부에게 어렵게 세례를 받고 회장까지 임명되었는데,70) 어느 시기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인천에 내려가 교리교육을 하는 등 전교 활동에 열심이었다.71) 앞서 언급한 고마창골 공소 회장 이광헌은 비신자에 전교하고 냉담자를 회개시키는데 일을 했다.72) 앞서 언급한 정국보는 홍살문 공소 주인으로 임명되어 지방에서 판공하러 오는 신자들을 돌보았다.73)

 

민극가는 일정한 거처 없이 부평, 인천, 수원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교리교육과 전교 활동을 했었다. 민극가의 성실함을 알게 된 여항덕 신부는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비신자 전교를 부탁했다.74) 박종원은 여 신부에게 회장으로 임명된 후 매주 돌아다니며 교리교육과 비신자 전교에 힘썼는데,75) 특별히 여 신부는 내포 지역 신자를 가르치기 위해 박종원 회장을 파견했다.76) 또한 박종원은 1839년 이전 매년 가을마다 양지 은이로 내려와 교리 강론을 했다.77) 현석문도 매년 가을마다 양지 은이로 내려왔다는 증언78)으로 볼 때 박종원과 같이 여 신부의 지시를 받았거나 여 신부 입국 이전부터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던 교리교육이 계속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민극가와 박종원, 현석문의 경우는 일정 지역에 파견되어 전교 활동을 하는 ‘전교회장’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이며, 여 신부가 이를 공식적인 교회 직책으로 임명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전교회장’ 임명을 통해 여 신부는 지방(경기 양지 은이와 충청 내포)까지 사목 활동의 영역을 넓혀 나갔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김순장은 한때 여항덕 신부의 집주인이었는데, 조선 교회의 파발꾼으로 참여하여 북경에 파견되었다.79) 현석문의 누나인 현경련은 복사로서 여항덕 신부의 시중을 들었는데, 그의 능력을 알아 본 여 신부는 그에게 여성 신자에 대한 교회 업무를 관할하게 했다. 나중에 앵베르 주교가 그를 여성회장으로 임명했는데, 여 신부 때 이미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80) 그밖에 구체적인 직책은 나오지 않지만 여항덕 신부를 도와 교회 활동을 한 신자들도 확인된다. 홍주 출신인 손경서는 여항덕 신부 때부터 교회 업무를 했는데,81) 자신의 연고지(홍주, 내포)에 사는 신자들을 돕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서울에 거주하던 권성여82)와 이호영도 여항덕 신부를 도와 교회 활동을 했다.83)

 

 

 

 

여항덕 신부는 입국 후 유일한 선교사제로서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만들면서도 신자 지도자들에게 회장 등의 교회 직책을 부여하여 그들의 조언과 협력을 구하였다. 여 신부에 의해 선발된 신자들은 직책에 따라 공소를 관리하거나 교리교육, 비신자 전교, 여성 신자 관할, 파발꾼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서울은 물론 지방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위의 자료에서 확인된 신자 지도자들은 여 신부의 중국 귀환 이후에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을 도와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를 했고, 1839년 이후 이어지는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이러한 신자 지도자와 선교사제와의 협력 관계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여 신부의 사목 활동 시기였다.

 

 

5. 맺음말

 

1834년 입국한 이래 1836년 말까지 조선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선교사제이자 외국인(중국인)인 여항덕 신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주문모 신부의 선교 방침을 기본적으로 준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 신부는 주변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주문모 신부보다 더 신중하고 엄격한 성사 집전 방침을 관철해 나갔다. 여 신부의 입국 전부터 조선 교회를 이끌어가던 신자 지도자들도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경험했거나 전해 들은 세대였기 때문에 여 신부의 선교 방침에 적극적으로 호응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교회체계가 잡혀가자 여항덕 신부와 조선 신자들은 가옥을 구입하여 공소를 설립했는데, 이는 신자들의 구심점을 마련하여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여 신부의 성사 집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시에 신심이 깊은 가난한 가족이나 독신 여성들을 공소 가옥에 거주하게 하여 그들의 생계를 돕고 교회 활동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다. 즉 신앙의 측면과 함께 신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여항덕 신부는 입국 후 유일한 선교사제로서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교회 조직을 만들면서도 신자 지도자들에게 회장 등의 교회 직책을 부여하여 그들의 조언과 협력을 구하였다. 여 신부에 의해 선발된 신자들은 직책에 따라 공소를 관리하거나 교리교육, 비신자 전교, 여성 신자 관할, 파발꾼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서울은 물론 지방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위의 자료에서 확인된 신자 지도자들은 여 신부의 중국 귀환 이후에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을 도와 천주교의 교세를 확장시키는데 크게 기여를 했고, 1839년 이후 이어지는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했다. 이러한 신자 지도자와 선교사제와의 협력 관계가 구축되기 시작한 것은 여 신부의 사목 활동 시기였다.

 

이와 같이 여항덕 신부는 신중하면서도 엄격한 성사 집전 방식을 고수하면서 교회 조직을 정비했고, 선교 자금의 유입과 조선 신자들의 협조 아래 공소를 설정하여 신자들의 구심점을 마련했다. 각종 직책을 맡은 신자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교회 활동에 나서고 있었고, 교세의 확장 속에서 여 신부의 사목 활동이 지방까지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여항덕 신부의 사목 활동에도 한계는 있었다. 언어의 장벽과 신변의 보호 문제로 직접적인 사목 활동에 제약이 많았고, 우선적으로 서울과 그 인근 지역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각지에 흩어진 신자들을 파악하고 지방까지 사목 활동을 확대하는 것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들이 입국한 이후에 본격화되었다.

 

이후의 역사적 전개로 볼 때, 조선 천주교회가 사제가 없는 교회에서 파리 외방전교회가 담당하는 대목구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여항덕 신부가 교량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조선 천주교회가 사제-신자로 구성되는 교회조직을 재건하고 독립된 선교지(대목구)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여 신부는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신자들을 규합하여 초창기 조선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신자와 선교사제의 협력체제를 강화해 나가고자 했다. 그가 구축하고 조직한 교회체계와 신자 지도자층들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제에게도 계승되어 조선 천주교회가 조선 사회에 뿌리는 내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여항덕 신부는 입국한 지 3년 만인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제들과의 갈등으로 조선에서의 사목 활동을 중지하고 중국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여항덕 신부가 프랑스 선교사제들과 갈등을 겪다가 중국으로 돌아가게 된 배경과 과정에 대해서도 기존의 통설과 달리 해석할 부분이 많다. 필자는 여항덕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제들이 갈등을 빚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여 신부의 ‘조선인 사제 양성 제안’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여 신부는 외국인 선교사제의 조선 입국을 반대하면서 유일한 대안으로 조선인 사제 양성과 조선인 사제의 조선 선교지 관할을 주장했다. 궁극적으로 외국인 사제와 전교회를 배제하고 조선인 사제만이 관할하는 조선 선교지를 지향했던 여 신부의 제안은 브뤼기에르 주교와의 갈등을 격화시켰다.84) 모방 신부와의 대립도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결국 성무 집행 정지 조치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러한 여 신부의 조선인 사제 양성 제안(조선인 사제-신자의 독립 선교지 지향)과 성무 집행 정지 문제(추문 사건)는 추후에 좀 더 논증하여 연구논문으로 완성하도록 하겠다.

 

 

 

 

 

비고 : 비망기 = 다블뤼 《비망기》, 사적 = 《병인치명사적》, 약전(역주본) = 다블뤼 《순교자 약전》,85) 일기 = 《치명일기》, 재판록 = 〈기해·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추안(역주본) = 《추안급국안》86)

 

 

 

 

 

 

* 이 논문은 2019년 3월 9일 부산교회사연구소 주최 제102회 학술발표회에서 발표한 ‘여항덕 신부의 사목 활동 - 조선 신자의 증언기록을 중심으로 -’ 중 일부 내용을 수정 · 보완한 것이다.

 

 

참고 문헌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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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壽洪, 〈새로 찾아낸 劉方濟 신부와 모방 신부의 서한〉, 〈劉方濟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부록, 《역사와 사회 架磹 宋基寅 神父 華甲紀念論叢》, 현암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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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1839년 조선의 서울 박해 보고서〉,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1.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1839 · 1846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페레올 주교 서한》, 천주교 수원교구, 2012.

서종태, 〈기해사학모반죄인양한진길등안〉, 《추안급국안》 82, 흐름, 2014.

다블뤼 주교,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제제구 신부 번역, 〈모방 신부 서한〉 2, 《상교우서》 53, 수원교회사연구소, 2016.

_____, 〈모방 신부 서한〉 3, 《상교우서》 54, 수원교회사연구소, 2017.

_____, 〈모방 신부 서한〉 5, 《상교우서》 56, 수원교회사연구소, 2017.

_____, 〈모방 신부 서한〉 9, 《상교우서》 60,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연숙진 번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22〉, 《교회와 역사》 483, 한국교회사연구소, 2015.

_____,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37〉, 《교회와 역사》 49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_____,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66〉, 《교회와 역사》 52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9.

 

2. 논저

 

宋世興(피숑), 〈朝鮮가톨릭史片影(四) 朝鮮第一代主敎 一八三一~一八三五〉, 《가톨릭靑年》 7, 가톨릭靑年社, 1933.12.

_____, 〈朝鮮가톨릭史片影(五)〉, 《가톨릭靑年》 9, 가톨릭靑年社, 1934.2.

_____, 〈朝鮮가톨릭敎會의 恩人 蘇主敎(一) - 今年은 그의 逝去 百週年〉, 《가톨릭靑年》 28, 가톨릭靑年社, 1935.9.

_____, 〈朝鮮가톨릭敎會의 恩人 蘇主敎(二) - 今年은 그의 逝去 百週年〉, 《가톨릭靑年》 29, 가톨릭靑年社, 1935.10.

金基協, 〈劉方濟 신부 선교 활동의 배경 - 적응주의의 시각에서 -〉, 《교회사연구》 10,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全壽洪, 〈劉方濟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역사와 사회 架磹 宋基寅 神父 華甲紀念論叢》 , 현암사, 1997.

李榮春,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신부에 대하여 - 조선의 두 번째 중국인 선교사〉, 《교회와 역사》 277,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신앙과 삶》 3, 부산가톨릭대학출판부, 1999.

윤민구,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서양 선교사 영입 운동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 《성 도리 신부와 손골》, 한국순교자연구회, 2007.

_____,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 《서울대교구 시복 시성을 위한 심포지엄 시복을 위한 핵심 주제 : 반역 · 병사(病死) · 살인 · 행방불명》,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 2011.

_____,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논평에 대한 답변), 한국순교자연구소(손골) 홈페이지 자료 http://www.rimartyrs.pe.kr/kes_board/view.php?mode=view&tbname=5_107&no=42&offset=0&que=황사영&ser=subj&category=&category_tbname=5&category_parent=8&category_no=107

조현범,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이석원, 《19세기 동서양 충돌과 조선 천주교》,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

 

1) ‌주문모 신부 다음으로 조선에서 활동한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1795~1854) 신부는 중국 섬서성 출신으로 1830년 12월 나폴리의 성가정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성의 지시에 따라 1834년 1월 3일에 조선에 입국했다. 만 3년간 활동한 다음 1836년 말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세 신학생을 마카오로 유학 보낼 때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자신의 연고지인 섬서 · 산서 대목구에서 죽을 때까지 사목 활동을 했다(全壽洪, 〈劉方濟 신부의 조선 선교와 그 문제점〉, 《역사와 사회 架磹 宋基寅 神父 華甲紀念論叢》, 현암사, 1997, 78~81쪽).

 

2)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는 유방제(劉方濟), 혹은 유 파치피코 신부로 알려져 있었다. 여항덕 신부는 조선으로 들어와서 조선식으로 성명(姓名)을 바꾸었는데 원래 성인 여(余)의 중국 발음이 ‘유(yu)’이기 때문에 이와 유사한 유(劉)씨를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李榮春,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신부에 대하여 -조선의 두 번째 중국인 선교사〉, 《교회와 역사》 1998년 6월호, 15~17쪽).

 

3) ‌전수홍, 앞의 글, 77~78쪽 ; 조현범,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265~294쪽.

 

4) 안응렬 · 최석우 역주 : Ch. Dallet, 《한국천주교회사》 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338쪽(이하 《달레 교회사》로 약칭).

 

5) 조선 대목구와 프랑스 선교사제에 대해 선구적인 연구를 했던 피숑 신부(한국명 宋世興)가 1930년대에 발표한 글에서도 여항덕 신부에 대한 서술은 달레 신부의 부정적 인식을 따르고 있다(宋世興, 〈朝鮮가톨릭史片影(四) 朝鮮第一代主敎 一八三一~一八三五〉, 《가톨릭靑年》 7, 가톨릭靑年社, 1933.12 ; 〈朝鮮가톨릭史片影(五)〉, 《가톨릭靑年》 9, 가톨릭靑年社, 1934.2 ; 〈朝鮮가톨릭敎會의 恩人 蘇主敎(一) -今年은 그의 逝去 百週年〉, 《가톨릭靑年》 28, 가톨릭靑年社, 1935.9 ; 〈朝鮮가톨릭敎會의 恩人 蘇主敎(二) -今年은 그의 逝去 百週年〉, 《가톨릭靑年》 29, 가톨릭靑年社, 1935.10).

 

6) 金基協, 〈劉方濟 신부 선교 활동의 배경 - 적응주의의 시각에서 -〉, 《교회사연구》 10, 1995, 236쪽 ; 조현범, 앞의 글, 294~295쪽.

 

7)‌ 김기협은 마태오 리치 이래의 보유론이 조선 서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검토하는 과정에서 여항덕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제들 사이의 대립이, 예수회의 적응주의 노선이 중국선교 현장에서 도태되었던 전례 논쟁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그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의 선발과 파견에도 여항덕 신부의 공로가 컸다고 보았다. 또한 여항덕 신부가 성직을 이용해서 재물을 모으고 권진이와 불륜관계에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라기보다는 비난을 위한 비난이었다고 추정했다(김기협, 앞의 글, 237~240쪽).

 

8)‌ 이영춘, 앞의 글, 15쪽 ; 전수홍, 앞의 글, 68쪽.

 

9)‌ 전수홍, 앞의 글, 101~104쪽.

 

10)‌ 전수홍, 〈조선인들의 서신과 여항덕 신부〉, 《신앙과 삶》 3, 1999 ; 윤민구,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서양 선교사 영입 운동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조선 진출〉, 《성 도리 신부와 손골》, 한국순교자연구회, 2007 ; 이석원, 《19세기 동서양 충돌과 조선 천주교》, 수원교회사연구소, 2018.

 

11) 전수홍, 앞의 글, 130·133·142쪽.

 

12) 윤민구, 앞의 글, 45~54쪽.

 

13) 1832년 11월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수행원인 왕 요셉을 북경으로 보내 자신이 조선 대목구장임을 북경 주교 서리(남경 주교)와 여항덕 신부에게 공식적으로 통보하게 했다. 이때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인 신자들의 소심함이 자신의 입국에 가장 큰 장애가 될 것이고 동양인의 공통적인 결점인 소심함과 무기력함을 가진 여 신부도 새로운 장애가 될까 걱정했다(《조선교구 역대 교구장 문서 제1집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81쪽. 이하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로 약칭). 이러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선입견은 이후 여 신부와의 갈등을 통해 확신으로 바뀌었다.

 

14) 윤민구,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을 위한 심포지엄 시복을 위한 핵심 주제 : 반역 · 병사(病死) · 살인 · 행방불명》,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준비위원회, 2011, 16~19쪽.

 

15)‌ 윤민구는 2011년 9월 28일에 개최된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을 위한 심포지엄 - 반역 병사 살인 행방불명’에서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라는 주제를 발표했는데, 논평에 대한 답변에서 위의 통설이 조선 신자들의 주체성을 무시하고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보는 시각에 기인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민구의 답변 내용은 심포지엄 자료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현장에서 한 답변을 정리해서 한국순교자연구소(손골)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린 것을 인용했다(윤민구, 〈황사영의 ‘백서’와 시복추진에 대한 검토〉, http://www.rimartyrs.pe.kr/kes_board/view.php?mode=view&tbname=5_107&no=42&offset=0&que=황사영&ser=subj&category=&category_tbname=5&category_parent=8&category_no=107 참조).

 

16)‌ 김기협과 전수홍은 모방 신부의 비난 내용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해 여항덕 신부가 중국에 들어간 후 어떤 활동을 했는지 중국 교회사의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김기협, 앞의 글, 244쪽 ; 전수홍, 앞의 글, 1997, 104~105쪽 ; 전수홍, 앞의 글, 1999, 143~144쪽).

 

17)‌ 필자의 능력상 한글이나 한문으로 된 자료, 우리말로 번역된 자료(라틴 · 프랑스어 원본)를 위주로 정리했다. 여항덕 신부와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 《기해일기》,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치명일기》, 《병인치명사적》, 《일성록》 등이 중요한 자료이다.

 

18)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74회차 4권 15상, 76회차 4권 26상)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천주교 수원교구, 2012, 387·417쪽(이하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로 약칭).

 

19) 이 서한의 한문본 말미에 ‘道光 十四年 九月 十八日 降生 壹千八百四十四年 余鐸字’이라고 나오는데, 9월 18일이 음력일 가능성이 있다. 이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며 10월 20일이 된다. 여 신부 자신이 이 서한을 쓸 때 (조선에 들어와서) 10개월을 지냈다고 했다(방상근 각주, 〈여항덕(余恒德, 파치피코) 신부의 보고서〉, 《교회와 역사》, 2002년 7월호, 19·21쪽. 이하 〈여항덕 신부의 보고서〉로 약칭).

 

20) ‌성인 세례 60건, 유아 세례 2건, 이미 유아 세례 받은 아이들에게 보례 66건, 혼인 2건, 고백 32건, 성체 24건, 견진 18건.

 

21) ‌여 신부가 입국한 지 1년이 지난 1835년 1월 19일 북경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대리인인 왕 요셉을 만난 조선 신자들은 여항덕 신부에게 고해를 한 사람이 200명이 된다고 말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35쪽).

 

22) 1827년(정해) 군난(박해) 때 잡혀 12년간 옥살이하다가 1839년(기해)에 순교한 신태보도 1801년 이전에 주문모 신부를 만나기 위해 그 주변 신자들에게 부탁했으나 위와 같은 엄격한 원칙 때문에 결국 신부를 만나지 못했다(《달레 교회사》 상, 387~388쪽).

 

23) ‌여항덕 신부가 남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 덧붙여진 포교성성의 메모에도 ‘아마 조선 신자들이 여 신부가 외국인으로서 비신자들에게 발각될까 두려워 숨어 지내게 하고 단지 여 신부 주위의 신자들에게만 활동하도록 제안했는지도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다(전수홍, 앞의 글, 1997, 83~84쪽).

 

24) ‌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포교성성에 보낸 서한 : 전수홍, 앞의 글, 99쪽.

 

25) 조선 신자들의 여항덕 신부 관련 내용과 전거는 [표3]과 [표4]에 정리했다.

 

26) 시복재판이 시작될 때 출석한 증인은 자신의 신상명세와 함께 세례, 혼배 등 성사를 받은 사정까지 진술했다.

 

27) 황 마리아 증언(14회차, 1권 46상)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천주교수원교구, 2011, 197쪽(이하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로 약칭).

 

28) ‌《병인치명사적》 9권 30쪽.

 

29) 김 베네딕타의 증언(19회차, 1권 65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255쪽.

 

30) 한 바울라의 증언(58회차 3권 35상, 59회차 3권 38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167·177쪽.

 

31) ‌〈여항덕 신부의 보고서〉, 22쪽. 여항덕 신부는 부인들이 모두 언문을 알기 때문에 언문을 통해 쉽게 전교할 수 있다고 했다.

 

32)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35쪽. 브뤼기에르 주교의 대리인인 왕 요셉이 여 신부가 조선말을 잘 하느냐고 물으니까 조선 신자는 아니라고 하면서 서면으로만 고해성사를 한다고 대답했다. 

 

33) 모방 신부도 입국 초기에 조선말을 배울 겨를이 없어 중국어와 한문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했다. 그는 통역을 통하는 방법을 거부하려 했지만, 신자들의 간청으로 마지못해 허락했다. 이러한 방식은 여항덕 신부 때부터 통용되었을 것이다(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포교성성에 보낸 서한 : 전수홍, 앞의 글, 99쪽).

 

34) 조신철은 모방 신부가 처음 지방을 사목 방문할 때 수행하면서 통역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여항덕 신부 때에도 신자들의 통역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기해일기》, 51a).

 

35) ‌성인 세례 315건, 의심되는 성인 세례에 대한 재 세례 94건, 성인 보례 186건, 유아 세례 23건, 어린이 보례 25건, 견진 13건, 고해 158건, 성체 147건, 병자 7건, 혼인 6건.

 

36) ‌여항덕 신부가 1835년 11월 29일에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서한 : 전수홍, 앞의 글, 90~91쪽.

 

37) 주문모 신부 역시 당시 유일한 선교사제였고 신변 안전을 위해 사목 활동에 제한을 받았지만, 신자들의 안내로 경기도의 양근과 여주, 전라도의 전주와 고산, 충청도의 남포, 공주, 온양, 연산 등지를 방문해서 성사를 집전했다. 주문모 신부의 선교 방침을 기본적으로 준수하던 여항덕 신부도 먼 지방까지 사목 방문을 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38) 2명은 김 베네딕타(1826년생), 이 베드로(1814년생)이다.

 

39) 23명은 글라라, 민 노인, 아이, 김 막달레나(1825년생), 김 아가타, 김 프란치스코(1812년생), 김성서(1808년생), 김성우(1794년생), 김 베드로 알강다라, 김효임(1813년생), 김효주(1817년생), 남명혁(1802년생), 변 아나스타시아(1811년생), 엄 체칠리아(1801년생), 오 바실리오(1812년생), 원귀임(1819년생), 이 글라라(1814년생), 이 루치아(1805년생), 이간난(1813년생), 이광헌(1787년생), 이신규 마티아(1793년생), 장 로사(1817년생), 한 바울라(1819년생)이다. 이중 원귀임은 15세 때(1833년경) 어느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데 시기로 보아 여항덕 신부로 보인다.

 

40)‌ 황 마리아의 증언(13회차, 1권 42하)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187쪽)에는 이광헌이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의 모친, 아내 권희(1794년생), 딸 이 아가타(1823년생), 아들 두 명(1828년생과 1832년생)도 여항덕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41)‌ 오 바실리오의 증언(69회차 3권 89상, 70회차 3권 93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17·329쪽.

 

42)‌ 남 데레사의 증언(57회차 3권 29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151쪽. 1821년생인 남 데레사는 남경문 회장의 딸이다.

 

43)‌ 1836년 부활절이 4월 3일이므로 사순절이 시작할 무렵은 2월 24일(재의 수요일) 경이다.

 

44) ‌ 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게 보낸 서한 : 제제구 신부 번역, 〈모방 신부 서한〉 5, 《상교우서》 56호, 2017년 가을호, 35~36쪽.

 

45) ‌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ff.340~341)(이하 《다블뤼 비망기》로 약칭)에는 정약용이 여항덕 신부에게 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연숙진 번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22〉, 《교회와 역사》, 2015년 8월호, 8~9쪽). 정약용이 ‘회개’했는지 여부는 논란이 있으나 당시 정약용이 거주하는 마재에 신자들이 있었다는 점은 확인된다. 모방 신부가 조선 신자들로부터 전국에 흩어진 신자와 지역에 대해 보고 받을 때 마재(Matke, 70~80명 신자와 예비자 거주)가 언급되었다(위의 모방 신부 서한 : 제제구 신부 번역, 《상교우서》 53호, 2016년 겨울호, 34쪽). 이로 볼 때 적어도 여항덕 신부가 마재에 살던 신자를 서울로 불렀거나 자신이 마재로 가서 성사를 집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46) ‌ 여항덕 신부가 1834년 9월 18일에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 : 전수홍, 앞의 글, 85·87쪽.

 

47) ‌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2월 8일에 마카오 극동대표부 르그레주아 신부에 보낸 서한 ;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8월 7일에 포교성성 장관에 보낸 서한 : 정양모 신부 · 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07, 304·308·326쪽.

 

48) ‌ 전수홍, 앞의 글, 102쪽.

 

49) ‌ 여항덕 신부가 1835년 11월 29일에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보낸 서한 : 전수홍, 앞의 글, 89~90쪽.

 

50) ‌ 앵베르 주교의 서한에 의하면, 여항덕 신부는 신자의 헌금을 사용해서 공소 가옥 다섯 채를 구입했다.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 1일에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수원교구, 2011, 379쪽(이하 《앵베르 주교 서한》으로 약칭).

 

51) ‌ 판공(判功)은 부활 대축일과 성탄 대축일을 앞두고 천주교 신자가 의무적으로 받는 고해성사를 말한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봄 판공’과 ‘가을 판공’이라고 불렀다.

 

52) ‌ 《기해일기》, 98a~98b ;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80회차 4권 46하)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483쪽.

 

53) ‌ 황 마리아의 증언(15회차 1권 48하~49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207쪽.

 

54) ‌ 이영희의 학다리골 집에 그 모친 허계임과 고모 이매임이 매번 판공 때마다 올라왔으며, 1839년에는 인근에 사는 김성임과 김 루치아도 같이 있었는데 이들도 판공을 보기 위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볼 때 여항덕 신부가 설립한 학다리골 공소가 1839년까지 유지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선 막달레나의 증언(64회차 3권 67상, 65회차 69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253·259쪽. ;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 〈1839 · 1846년 박해 순교자들의 행적〉, 《페레올 주교 서한》, 2012, 천주교수원교구, 753쪽).

 

55) ‌ 황 마리아의 증언(13회차 1권 42하~43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187쪽.

 

56) ‌ 《다블뤼 비망기》, f.508 : 연숙진 번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66〉, 《교회와 역사》, 2019년 4월호, 9쪽.

 

57) ‌ 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게 보낸 서한 : 제제구, 앞의 글, 34쪽.

 

58) ‌ 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포교성성에 보낸 서한 : 전수홍, 앞의 글, 98쪽.

 

59) ‌ 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게 보낸 서한 : 제제구 신부 번역, 〈모방 신부 서한〉 3, 《상교우서》 54호, 2017년 봄호, 36쪽.

 

60) ‌ 여항덕 신부는 1836년에 자신이 세운 8개 공소를 관리들에게 발각될까봐 ‘파괴’(철거)했다고 했다. 공소 가옥 자체를 처분했다는 뜻인지 공소 안에 설치한 ‘경당’(성물, 제대)을 치웠다는 의미인지 애매하다(여항덕 신부가 1834년 9월 18일에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 : 전수홍, 앞의 글, 100~101쪽).

 

61) ‌ 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 1일에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 : 《앵베르 주교 서한》, 379쪽.

 

62) ‌ 이 사실을 여항덕 신부에게 직접 들은 앵베르 주교는 조선 입국 이후 다섯 가족에게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앵베르 주교가 1838년 12월 1일에 포교성성 장관에게 보낸 서한 : 《앵베르 주교 서한》, 379~381쪽).

 

63) ‌ 1835년 1월 19일, 조선 신자들(파발꾼)은 북경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대리인 왕 요셉을 만나 당시 조선 교회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조선 신자들은 (별도의 집회 장소가 없이) 가정에서 기도하고 있었지만, 신자들과 예비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교리교사(회장)가 있었고 젊은 처자들의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세운 동정녀들도 몇 명 있었다. 조선 대목구장인 브뤼기에르 주교의 존재는 6명 회장(핵심 지도자)만이 아는데 그중 4명은 주교의 입국을 강하게 지지하고 2명은 반대했다(《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33~335쪽).

 

64) ‌ 모방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1801년 이후 조선 신자들이 스스로 뽑은 회장들은 각자 사는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치고 비신자들에게 전교했고, 그 결과 교세가 주문모 신부가 있을 때 만큼 회복되었다고 한다(모방 신부가 1836년 12월 9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게 보낸 서한 : 제제구 신부 번역, 〈모방 신부 서한〉 9, 《상교우서》 60호, 2018년 가을호, 28쪽).

 

65) ‌ 모방 신부는 자신이 입국한 1836년 이전에 조선 신자의 자체 조직이 해체되었다고 두리뭉실하게 언급했는데, 사실상 여항덕 신부가 사목하던 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게 보낸 서한 : 제제구, 앞의 글, 35쪽).

 

66) ‌ 〈여항덕 신부의 보고서〉, 20쪽.

 

67) ‌ 여항덕 신부는 중국으로 귀환한 후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모방 신부의 잘못된 사목 활동에 대해 비난했다. 그중 모방 신부가 ‘조선 회장들의 좋은 조언들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여 신부가 조선 회장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여항덕 신부가 1834년 9월 18일에 마카오 포교성성 대표부 움피에레스 신부에게 보낸 서한 : 전수홍, 앞의 글, 100쪽).

 

68) ‌ 모방 신부는 여항덕 신부가 너무 많은 신자들(21명)을 신부댁의 일꾼(식구)으로 두고 있고, 다른 사람들까지 여항덕 신부의 식구들처럼 늘 신부댁에서 식사를 했다고 비난했다. 이 사람들에 대해 여항덕 신부는 ‘교회 안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는데, 여 신부가 교회 직책을 부여한 신자들이었을 것이다(모방 신부가 1836년 4월 4일에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부에게 보낸 서한 : 제제구, 앞의 글, 35쪽).

 

69) ‌ 남 데레사의 증언(57회차 3권 29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151쪽.

 

70) ‌ 황 마리아 증언(14회차, 1권 46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197쪽.

 

71) ‌ 이 루치아의 증언(47회차 2권 85하)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601~603쪽.

 

72) ‌ 황 마리아의 증언(13회차 1권 42하~43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1, 187쪽.

 

73) ‌ 《기해일기》, 98a~98b ;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80회차 4권 46하)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483쪽.

 

74) ‌ 《기해일기》, 121a ;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75회차 4권 21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403쪽.

 

75) ‌ 이 베드로의 증언(96회차 5권 45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725쪽.

 

76) ‌ 김 프란치스코의 증언(79회차 4권 43하)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473쪽.

 

77) ‌ 오 바실라오의 증언(69회차 3권 90하)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21쪽.

 

78) ‌ 오 바실리오의 증언(70회차 3권 93상) : 《기해 · 병오 순교자 시복재판록》 2, 329쪽.

 

79) ‌ 《병인치명사적》 51~52쪽.

 

80) ‌ 《기해일기》, 72a. 정하상의 누이동생 정정혜도 신부댁 복사로 활동했는데, 앵베르 주교가 그를 보고 여회장 소임을 감당할만하다고 했다. 현경련과 함께 정정혜도 앵베르 주교에 의해 여회장으로 임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기해일기》, 75a).

 

81) ‌ 《다블뤼 비망기》, f.394 : 연숙진 번역,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본 137〉, 《교회와 역사》, 2016년 11월호, 6쪽.

 

82) ‌ 다블뤼 주교,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30~31쪽.

 

83) ‌ 《기해일기》, 93a.

 

84) ‌ 여항덕 신부의 ‘조선인 사제 양성 제안’은 세 가지 측면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격노케 했다고 생각한다. 첫째 제안의 주체, 둘째 제안의 방식, 셋째 제안의 내용이 그것이다. 사제양성의 고유 권한은 선교지의 장상(조선 대목구장)에게 있는데, 브뤼기에르 주교의 보좌 역할을 부여받은 여 신부가 이를 제안하고 주도하는 것은 ‘월권행위’라 할 수 있다. 조선 대목구장이 아닌 북경교구 서리인 남경 주교에게 제안한 것은 여 신부가 자신의 장상으로 조선 대목구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브뤼기에르 주교 입장에서는 ‘불복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지인 사제 양성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포교성성의 기본 방침이며 적절한 시점이 되면 현지인 사제에게 선교지를 맡긴다는 것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전까지는 전교회 소속 서양인 사제의 관할과 지도가 필수적이며 현지 사제에게 넘겨주는 시점도 결국 전교회가 결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여 신부의 현지인 사제 양성은 철저하게 서양 전교회와 선교사제를 배제하는 것이며, 중국인 사제 역시 조선 선교지를 담당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는 파리 외방전교회와 포교성성의 방침과는 배치되는 것이며, 조선 교회의 ‘자립’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서양인 선교사제의 지도 없이 동아시아 현지인 사제만으로 구성된 교회는 망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여 신부의 제안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85) ‌ 역주본은 다음 책을 말한다. 다블뤼 주교, 유소연 역,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내포교회사연구소, 2014.

 

86) ‌ 역주본은 다음 책을 말한다. 서종태 번역, 《추안급국안》 82, 흐름, 2014.

 

[교회사 연구 제54집, 2019년 6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이석원(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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