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4: 강원도 최초의 본당 – 이천본당(伊川本堂)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079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4) 강원도 최초의 본당 – 이천본당(伊川本堂)

 

 

이천본당은 1884년 4월에 설립되었고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이다. 험준한 산악지대인 강원도 이천은 병인박해 이후 많은 신자들의 피난처로 선택되었다. 1884년 4월 드게트(Deguette, 崔東鎭) 신부가 이천의 섭골에 거주하며 강원도 동북 지역과 함경도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게 되면서 본당(섭가지본당)이 설립되었고, 드케트 신부 이후 주임으로 임명된 쿠데르(Coudere, 具瑪瑟) 신부는 이천본당은 물론 강원도 일대와 함경도와 평안도의 28개 공소를 담당하며 사목활동을 하면서 염산리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쿠데르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뒤테르트르(Léon Pierre Dutertre) 신부는 1894년 8월 15일 새로운 성당을 착공하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그 후임인 루케트(Prosper Césaire Rouquette) 신부는 본당을 망답으로 이전하고 1907년에는 삼애학교(三愛學校)를 설립하여 적극적으로인 전교활동을 펼쳤다. 이후 부임한 김윤근 신부는 각종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산간벽지에 있는 본당이었지만 박우철 신부 재임 시에는 청년회의 활동이 주목을 받아 『경향잡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1934년 한 청년회원이 중병에 걸려 농사일을 돌보지 못하자 회원들은 그의 농사일을 대신했다는 내용도 있고, 청년회 차원에서 논을 소작지로 얻어 공동 경작한 뒤 수확의 일부를 보육원과 용산신학교에 기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청년회 기금으로 적립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농사나 금주와 단연(斷煙)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큰 풍금을 사서 본당에 기증하거나 애긍, 성소후원기금으로 썼다고 한다.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가 설정됨에 따라 이천본당은 춘천 지목구에 편입되었고, 아일랜드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원 파트리치오(Patrick McGowan) 신부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골롬반 외방선교회 신부들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고초를 겪으며 활동이 어려워졌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이천본당은 휴전선으로 인하여 공산정권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 소속 한국인 최초의 성직수사로 1942년 서품을 받은 김봉식 마오로 신부는 공산정권의 박해로 간도에서 이천본당으로 사목지를 옮겨 활동하다가 1950년 6월 24일 원산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이천본당은 침묵의 본당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9년 1월 27일 연중 제3주일 · 해외 원조 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516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