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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7-9: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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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1-12 ㅣ No.1081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7)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 I

 

 

이 서한집에는 세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들과 조선인들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기록들은 우리들도 미처 알지 못했던 어쩌면 생소할 수 있는 19세기 조선 역사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낯선 선교지역으로의 출발은 돌아온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회칙 194항을 숙지하고 자신들의 선교지 강원도로 파견되었던 세 선교사들은, 돌아갈 수 없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낯선 선교지에서 활동을 하도록 자신을 이끄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주교에게 축복을 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서한의 내용을 비롯해 그 외에 몇 편을 발췌하여 3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편견에 얽매여 조선을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앞서 오로지 조선이라는 나라에 하느님을 알리고자 시공간을 초월하여 헌신했던 그들의 굳은 선교 의지는 지금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뮈텔주교 조선입국 2주년을 축하하며

 

“주교님께서 조선에 입국하신 날은 제게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날입니다. 오래 전부터 기다려온 저의 소망이 이루어진 날이지요. 지상에서의 재물은 없지만 하늘로부터 풍부한 재물을 받은 용감한 산골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선교지로 저를 보내주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그들의 설날이 다가옵니다. 그들과 저를 위해 주교님께 엎드려 축복을 청하나이다.”

 

서울로 여행 갔던 신부가 동학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절망했던 신자들과 뒤테르트르 신부와의 해후

 

“누구도 내가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서울과 중부지방이 완전한 무질서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자들은 매우 놀라고 기뻐하며 저를 만나러 한걸음에 달려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습니다. 조금 진정이 된 후 저는 신자들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교님, 저의 소중한 양떼 속에 다시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말로 다 표현드릴 수 없습니다.”

 

뒤테르트르(Dutertre, 1866~1904)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1890년 9월 사제로 서품된 후 이듬해 2월 초 한국에 입국하였다. 1892년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염산리에 위치한 이천 본당으로 전임되었다. 12년 동안 이천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하였고 1904년 홍역으로 사망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뒤테르트르」 항목). [2019년 2월 17일 연중 제6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8)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 II

 

 

새로운 정착지 이천에 강당을 지으며 축성식에 주교님이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신자들

 

“신자들은 새로운 정착지 이천 땅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강당 한 채를 짓기로 결정했고 산골사람들은 강당 건축에 매우 열심입니다. 이 곳은 겨울에 눈이 많이 와서 사방이 온통 눈밭입니다. 신자들은 산속 여기저기서 아름드리나무들을 베어 직접 손으로 끌고 와 저의 집 마당과 작은 채소밭에 잔뜩 쌓아 놓았습니다. 마치 산 전체가 저의 집에 내려온 듯 나무들로 가득합니다. 목수들과 석공들의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자 강당이 완성되기 전인데도 신자들은 마냥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을 가득 채우는데 무엇인가 부족한 듯 저에게 말합니다. ‘주교님께서 저희 강당을 축성해 주시고 저희들에게 축복을 내려 주시러 언제쯤 오시나요? 저희가 죽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주교님을 뵐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주교님, 제가 그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저희 신자들은 주교님을 뵐 수 있다면 매우 행복해할 것입니다. 주교님께서 다른 지역을 순회할 계획이 없으실 때 이 곳의 선한 어린 양들을 방문해 주신다면 저희 모두는 기쁨의 찬가를 부를 것입니다.”

 

여러 가지 병으로 고생하는 뒤테르트르 신부

 

“두 달여 전부터 기본적인 신심활동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열병이 저를 괴롭히더니 올해는 치통과 신경통이 번갈아가며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심하게 아픈 치아 두 개는 고철장수의 집게를 빌려 불에 달군 후 뽑아버렸더니 더 이상 통증이 없어지고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이를 뽑을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픈 치아가 하나 더 있지만 피정 후에 뽑으려고 합니다. 온몸에 걸쳐 저를 아프게 하는 신경통은 한국식 부항을 뜨며 치료를 받는데도 여전히 낫지 않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통이 너무나 심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데 그러면 눕지도 못하고 선채로 꼬박 밤을 새우기도 합니다. 또한 추위는 저에게 큰 적입니다. 추위를 이겨내고 빈대에 물린 것을 참아내는 인내심이 필요한데 저에게는 그것이 매우 부족한 것 같습니다. 신경통이 몇 달이나 지속되니 죽어 연옥으로 가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됩니다. 그러나 주교님, 다른 걱정거리도 산재해 있으실 텐데 저 때문에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루케트(Rouquette, 1880~1914)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한국명 盧大有. 1903년 6월 사제로 서품된 후 그 해 10월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1904년 봄, 뒤테르트르의 후임으로 염산리 이천 본당에 전임되었다. 1914년 이질과 폐결핵으로 투병하다 사망했다(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 역,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 해제). [2019년 2월 24일 연중 제7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9) 강원도 프랑스 선교사 서한집 III

 

 

조선어로 신자들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된 신부의 다짐

 

“이제는 신자들과 조선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여 매 주일마다 지침을 전달하고 이렇게 하는 것을 신자들도 좋아합니다. 저의 사랑하는 산골 사람들은 결점도 있지만 장점도 많아 그 모든 것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저의 소망은 죽을 때까지 이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저의 산골 사람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물론 다른 곳으로 가서 사목활동을 하라는 주교님의 지시가 있으면 저는 그대로 따를 것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산골 사람들과 같이 있겠다는 것은 저의 희망일 뿐이오니 주교님께서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뮈텔 주교가 첫 선교지에 파견되는 루케트 신부에게 당부하는 말

 

“이제 지역 본당을 나누어 주었으니 마음 편하게 먹고 앞으로 사목할 계획을 세우고, 지체 없이 사목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내주세요. 근면하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초자연적으로 활기찬 노동을 하세요. 이는 선교지에서 사목할 때 매우 필요한 덕목이지요. 어느 면에서도 가치가 없는 인간적 상태로는 주어진 소임을 잘 이행할 수 없으니까요. 성무와 기도가 일치하기를…”

 

루케트 신부가 로마의 아버지 신부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

 

“당시 신학생에 불과했던 제가 이제 어엿한 조선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조선의 선교사라는 직분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신자 수 1,500명 이상, 길이 약 100 킬로미터, 넓이 60~70 킬로미터가 되는 넓은 곳을 관할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어린 선교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넓은 지역이지만 항상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곳은 강원도의 깊은 산골이지만 사람들은 가난해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합니다. 제가 성인다운 선교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학식이 많고 일을 많이 하는 신부보다는 성인 신부가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에 따라 진정한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선하신 예수님께 기도드려 주십시오.”

 

2016년에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하여 다큐멘터리 영화 <시간의 종말>이 상영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조선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벽안의 선교사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를 담아 전하고 있는데 그들이 죽음으로 전한 그 신앙의 길을 과연 우리들은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일까? 몇 편의 서한 내용을 읽으며 숙연한 마음으로 다시 묻게 된다.

 

부이수(Bouyssou, 1872~1949)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한국명 孫以燮. 1895년 6월, 사제로 서품된 후 그 해 10월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1896년 초, 강원도 이천의 염산리 본당 관할의 포내(捕內)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자 초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28년 5월에 경기도 청계리의 하우고개 본당 주임으로 전임되고, 1930년부터 용산 성심신학교에서 휴양하였고, 1936년부터 대신학교 영성지도 신부로 활동하였다. 1949년 7월에 사망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부이수」 항목). [2019년 3월 3일 연중 제8주일 춘천주보 2면, 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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