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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35-37: 관상에 관한 머튼의 공헌과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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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3-08 ㅣ No.1388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5) 관상에 관한 머튼의 공헌과 평가 


옛것에서 새것을 꺼내다… 우리 시대에 맞게 현대화

 

 

지금까지 우리는 토마스 머튼이 이해한 기도와 관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가 오늘날의 영성에 어떤 공헌을 하였는가에 대해 평가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토마스 머튼은 지금까지의 관상한 개념을 ‘종합하고 이를 우리 시대에 맞게 현대화’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머튼이 처음부터 관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토미즘에 바탕을 둔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지적인 면에서 다루었다. 그러나 자신의 관상 체험이 깊어질수록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묘사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막 수도승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동양의 사상의 영향 아래에서 관상적 체험을 종합하고 자신의 시대 언어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머튼의 변화 과정에 대해 앞으로 3회에 걸쳐 머튼의 주요 저서를 중심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에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비슷

 

머튼이 관상에 대한 종합적이고 현재적인 비전을 갖게 된 것은 지적(知的)인 전망으로부터 존재론적이고 경험적인 관점으로의 변화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 변화는 관상의 영성에 대해 기록된 그의 초기 작품들과 후기 작품들을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가령, 그의 초기 소책자 「관상이란 무엇인가?」(What is Contemplation?, 1950)에서 머튼은, 관상을 “초자연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지식에 대한 직관이 하느님에 의해 영혼의 정점 안으로 주입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지상에서 순수한 관상가들이 결코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정의는 관상에 대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관점과 매우 가깝다. 가령, 십자가의 성 요한은 관상을 “영혼을 깨어나게 하는 하느님의 주입된 사랑의 지식이며 동시에 한 단계 한 단계 상승하여 창조주 하느님께 도달할 때까지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머튼은 이 소책자에서 관상의 본성에 대해 다루었으며, 성경과 성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기초 위에서 관상적 기도를 위한 실천적 지침을 제안하였다. 그는 ‘주입된’ 혹은 ‘순수한 관상’(infused, or pure contemplation)과 ‘획득된 관상’(acquired contemplation) 사이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오직 전자만이 참된 관상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인 삶의 가장 높은 목표인 하느님과의 신비로운 일치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머튼의 저서 「진리를 향한 상승」(The Ascent to Truth, 1951)은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그의 분명한 관심의 결과였다. 그의 의도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신학과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비주의적인 통찰과 교회, 성경, 전례와 계시의 지적인 유산에 기초하여 신비 신학의 교의적 본질을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교의적 전망에서 종교적 체험의 전망으로 변화

 

머튼에게 있어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의 그의 글들과 사상에서 머튼의 관상을 향한 조직신학적 접근은 변화를 맞이한다. 예를 들어, 「요나의 표징」(The Sign of Jonas, 1953)의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진리를 향한 상승」을 쓸 때, 비록 그것이 신학자들에 의해 널리 알려진 보편적이고 확실하며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기술적인 전문용어들을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종교적 체험에서 가장 개인적이고 가장 필수적인 것을 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나의 표징」에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교의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을 깨닫게 하는 영성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기에 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제 방식대로 표현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그가 교의적인 전망으로부터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의 전망으로 변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또 다른 예는 그의 저서 「인간은 섬이 아니다」(No Man Is an Island, 1955)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의 머리말에서 그는 관상적 삶에 대한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에 관한 숙고들을 나눔으로써 믿음의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다고 체험의 중요성을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관상은 신적인 것들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체험할 수 있는 이 위대한 신비 속으로 들어갑니다”라고 언급했다. 그가 관상 안에서 체험의 가치를 깨달았다고 하여 전통적인 가톨릭 관상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전통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발전시키고 있으며, 그 자신의 관상적 체험 안으로 그것을 종합하였다.

 

머튼에 따르면, “전통은 살아 있고 활동적이다… 오래된 전통은 항상 매우 새롭기도 하다. 그것은 각 세대에 다시 태어나며, 새롭고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 있고 적용되어 항상 활기를 되찾고 있기 때문이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226)

 

그러나 머튼은 ‘진정 살아 있는 전통적 내용이 텅 비워진’ 전통주의에 대해 저항하라고 경고를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3월 8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6) 관상에 관한 머튼의 공헌과 평가 ②


추상적 개념 · 종교적 경계 넘어 체험의 영역으로

 

 

지난 호에서 우리는 전통적 관상을 배운 토마스 머튼이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제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머튼의 저서들, 가령, 「내적 체험」, 「새 명상의 씨」, 「수도승적 기도의 사조」, 「활동의 세상 안에서 관상」 등의 저서를 통해 어떻게 그가 자신의 전통을 ‘종합’하고 다른 종교적 전통, 특히 동양의 관상 전통들의 영향 아래에서 우리 시대의 언어로 관상을 ‘현대화’하게 되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추상적 하느님 넘어 사랑의 친밀한 포옹으로

 

먼저, 「내적 체험 : 관상에 관한 기록」(1959)이라는 저서는 대부분 1958년 ‘루이빌 영적 체험’ 후 1959년에 기록되었다. (실제로 이 책은 1968년 「내적 체험」이 출판되었지만, 1959년에 기록된 텍스트에 몇몇 부분을 수정하거나 첨가했다). 머튼 자신의 관상 체험이 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머튼은 관상이라는 주제에 대해, 초기 전통적인 가톨릭 저술들에 따르는 관점으로 표현했던 관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 책에서 수정하고 있다. 이 책이 기록되는 동안 1959년 7월 12일, 머튼은 자신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번 주에 나는 「관상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썼다…. 이전의 나의 지나치게 단순화된 모든 생각이 얼마나 빈약했던가….” 그는 또한 “많은 선(禪) 불자들이 나의 장황하고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공허한 책이었던 「진리를 향한 상승」을 읽었다”고 후회하고 있다.

 

그는 「관상이란 무엇인가?」 는 관상적 삶에 대해 개발되지 않고 미성숙한 전망에서 기록되었고, 「진리를 향한 상승」 역시 참된 관상은 말들과 개념들을 초월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기 때문에 한계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머튼 학자 윌리엄 샤논은 1959년 텍스트는 초기 머튼과 후기 머튼 사이의 ‘다리’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책 제목에 붙은 ‘체험’이라는 단어는 관상에 대한 신학적인 접근에서 체험적인 접근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내적 체험에서 그는 논리와 이성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조직신학적 접근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는 관상가는 추상적인 하느님을 넘어, 사랑의 친밀한 포옹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체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앞선 두 책의 접근 방식과는 달리, 그는 관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관상 체험은 어떤 단계적인 과정을 통해 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보는 것’ 혹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혜성처럼 갑자기 당신에게 나타나 그곳에 있습니다.”

 

 

동양 종교에서도 관상적 체험의 보편성 발견

 

토마스 머튼은 획득된 관상과 주입된 관상 사이에 전통적인 구분을 피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나눔의 타당성은 신학자들이 뜨겁게 논쟁해 왔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관상을 ‘본성적 관상과 신학 혹은 하느님에 대한 관상으로 나누는 희랍 교부들의 구분’에 기초해 묘사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하느님 사랑을 향한 숨겨진 증인으로 세속에서 살아가는 ‘활동적 관상가들’을 존중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이 세상에서’ 관상적 삶의 가장 중요한 개발은 남녀의 작은 그룹들의 성장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현존하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도 현존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엄격한 관상적인 관점입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내적 체험은 교회의 교부들, 성경, 라인강 지방과 스페인 지역의 신비주의자들, 현대 심리학과 실존주의 철학에 기초한 전통적인 관상의 개념들에 대한 머튼의 깊은 이해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 처음으로 머튼은 ‘동양 종교에 관한 생각’을 구축하고 있다. 선(禪) 불교와 도교와 같은 비그리스도교 전통에 관한 그의 발견과 경험 사이의 연결점을 찾고 있다.

 

그는 동양의 관상적 전통들이 서구의 관상적 전통에 상당 부분 기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동양 종교의 지식과 진가 안에서 우리가 성장해 나갈 때,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관상의 깊이와 풍부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내적 체험」이라는 저서를 통해 관상에 대한 그의 견해는 종교적 경계를 넘어, 내면의 자아에 집중하는 것으로부터, 내면의 영적 체험을 통하여 우주적 실재에로 깨어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게다가 관상적 체험의 보편성을 발견함으로써, 초기의 관상에 대한 로맨틱한 환상이 사라지고, 더 경험적이고 부드러우며 다양하고 풍부해진 모습을 이 책에서 볼 수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3월 15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37) 관상에 관한 머튼의 공헌과 평가


모든 사람 안에 심어진 관상의 씨앗을 발견하다

 

 

토마스 머튼의 새로운 실존적이고 경험적인 접근은 「명상의 씨」(1949)의 개정판인 「새 명상의 씨」(1962)에서 활짝 꽃피었다. 이 저서에서 그는 훨씬 풍부해진 자신의 관상 체험에 기초하여 관상에 대해 정의하면서 이전의 책을 재구성하였다. 머튼은 ‘하느님’이라는 표현 대신 ‘충만한 원천’, ‘궁극적 실재’ 그리고 ‘궁극적 존재’라는 용어들을 사용함으로써, 관상의 보편성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해를 드러내고 있으며, 동시에 같은 책에서 ‘悟(오)’, ‘깨어남’, ‘空’(공), ‘無’(무), ‘비움’ 그리고 ‘해탈’ 등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가 선(禪) 불교에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 저서의 마지막 장 ‘다 함께 춤을’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관상을 선(禪)의 해탈에 연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교 관상과 해탈 연결

 

“늙은 개구리가 땅에서 홀로 첨벙거리며 고요한 연못에 뛰어드는 소리를 듣는 바로 그 순간, 깨어남의 그 순간, 모든 가치관이 전환점을 맞고, 이 ‘새로움’과 ‘비움’은 우주적 춤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게 해 줍니다.”

 

머튼이 「새 명상의 씨」에서 제시한 관상에 관한 새로운 견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자기 비움의 체험과 동양의 전통을 마주함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머튼은 자신의 관상적 체험과 선불교와 만남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관상에 대한 그의 전통 그리스도교적인 관점이 불교-그리스도교적 관점으로 재구성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머튼의 관상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1963년에서 1965년 사이에 기록된 「수도승적 기도의 사조」(이 책은 1969년에 관상적 기도, 한국어로는 「마음의 기도」라는 제목으로도 출판됐다)라는 저서에서 더욱 발전되었다. 이 저서는 더 통합적이고 육화적인 뼈대 위에 관상의 체험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적인 방법을 수도승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는 진정한 관상적 기도에서 관상적인 삶과 활동적인 삶을 더 이상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관상적인 사람이 영의 순수함으로 깊이 기도할 때 관상과 활동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의해 하나의 실재 안으로 융합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나 ‘신비들’에 관한 교의에 대해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직접적인 존재론적인 이해와 가장 깊은 삶과 믿음의 진리들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얻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어둔 밤은 해탈이며 ‘완벽한 빛’

 

이 책은 또한 사막의 교부들, 위-디오니시우스,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전통적인 영성을 현대의 언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기와 후기의 저서에서 머튼이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의 영성을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그의 초기 작품, 진리를 향한 상승에서 머튼은 ‘금욕주의’와 ‘욕망의 통제’를 강조했다. “금욕적 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규칙들에 대한 각각의 핵심어는 ‘욕망’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수도승적 기도의 사조에서 머튼은 이 ‘어둔 밤’을 ‘해탈’과 ‘완벽한 빛’으로 설명한다.

 

“지고하고 순수한 빛으로 사람들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어둔 밤 안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 따라서 어둠은 동시에 해탈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둠은 엄청난 빛이라는 이 실재 안에 있다고 말했듯이, 신앙의 빛이 그 영혼에게 어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 책의 머리말에 그가 한 다음의 말을 증명한다. “우리는 경우에 따라 고대의 텍스트들에 관심을 가질 것이나, 이 주제에 대한 우리의 개발은 본질적으로 현대적이 될 것이다.”

 

 

교회 외적 활동의 근본은 관상

 

이렇듯이 머튼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관상에 대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도록 그 개념을 현대화하였다. 나아가 이 저서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는 “관상과 내적인 기도 없이 교회는 인류를 변화시키고 구원하기 위한 선교를 완수할 수 없습니다”라고 언급하면서 교회의 모든 외적 활동의 근본은 관상이라고 강조했다.

 

요컨대, 후기 머튼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과 타 종교와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모든 이들 안에 심어져 있는 관상의 씨앗을 발견했으며, 이 씨앗이 자라고 성장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문화와 종교를 넘어 현대적인 언어로 이를 표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관상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이고 영적인 유산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성령의 활동임을 일깨우고자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0년 3월 22일,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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