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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회2: 마태오 리치는 성직자인가, 과학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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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12-02 ㅣ No.96

[니~하오! 중국교회] (2) 마태오 리치는 성직자인가, 과학자인가?


궁중학자로 일하며 선교기반 닦아

 

 

명나라 황실에서 궁중학자로 일하며 선교 기반을 닦은 마태오 리치 신부 초상화.

 

 

명나라에 서양 과학문물을 전한 마태오 리치(Ricci Matteo, 1552~1610)를 과학자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1601년 북경에 도착한 마태오 리치는 '중국교회 창설자'라고 불리는 예수회 신부다. 그럼 동양 선교의 큰 뜻을 품고 중국에 온 이탈리아 출신의 이 선교사는 왜 유학자 옷을 입고 생활하며 황실에 서양 문물을 전했을까? 그가 로마에 있는 예수회 회원 코스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 그 답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중국 옷을 입고 중국 음식을 먹으며 중국식 주택에서 중국말을 하고 삽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선교를 위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선교는 파종이나 수확 시기가 아니라 황무지를 개간하는 시기입니다. 중국은 외국인에 대해 늘 의심을 품고 두려워합니다. 갑자기 신자를 많이 입교시키면 의심 받을 염려가 있습니다. 천천히 신복(信服)시켜 의심을 풀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입니다.…"

 

16세기 말 명나라는 강력한 절대 군주제를 바탕으로 폐쇄적 대외정책을 견지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나라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식민지가 된 데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해안에서 빈번히 소동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서양인 입국과 체류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리치 신부는 황실에 서양과학과 기술을 전해주면서 황실 묵인 하에 선교하는 적응주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선교사들은 유학자 복식을 하고, 중국 이름을 사용했다. 리치 신부의 한자명은 이마두(利瑪竇)다.

 

리치 신부가 황제에게 전달한 여러 가지 신기한 서양 물건들 가운데 가장 환심을 산 것은 자명종 시계였다. 황제는 어느날 자명종이 멈춰서자 환관을 시켜 자명종을 진공(進貢)한 서양인을 불러 들였다. 덕분에 리치 신부는 황실에서 보낸 가마를 타고 자금성 남문으로 들어갔다.

 

리치 신부는 수학ㆍ과학ㆍ천문학ㆍ지리학 등 서양 과학지식과 세계지도ㆍ천구의ㆍ망원경ㆍ프리즘 등을 전하면서 사대부 지식인층에게 천주교를 소개했다. 두뇌가 총명했던 리치 신부는 로마에서 철학과 신학은 물론 기하학ㆍ역산학ㆍ건축학ㆍ지리학 등을 두루 섭렵한 인재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특히 유교 경전을 인용해 천주교 교의를 전달하기 위해 중국 전통사상인 유학을 적극 수용했다. 조상과 공자에게 드리는 제사도 효도와 존경의 표현이라고 해석해 받아들였다. 문화적 적응주의 내지 보유론적(補儒論的)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로 인해 대유학자 구태소, 이지조, 서광계 등이 입교하는 등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적응주의 선교 방식은 1630년대 이후 중국 선교에 가세한 도미니코회와 작은형제회의 반발을 불러왔다.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은 미신이라며 교황청에 예수회 선교방식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것이 제사문제를 둘러싸고 100여 년간 격렬하게 대립한 의례논쟁이다.

 

[평화신문, 2008년 8월 31일, 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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