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8일 (금)
(홍) 성 이레네오 주교 학자 순교자 기념일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선교ㅣ복음화

복음화의 기원과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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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8-03-14 ㅣ No.85

[복음화,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화의 기원과 본질

 

 

나는 어릴 적에 동네 우물 앞을 지나면 그냥 지나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꼭 우물을 한 번 들여다보고 지나는 습관이 있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냥 보고 가야 할 것만 같아서였다. 끝도 한도 없는 듯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함과 아무리 물을 퍼내도 꼭 그 만큼만 차는 신비함이 호기심 많은 나를 그리로 이끌지 않았나 싶다. 이후로 나는 깊고 신비한 것이면 무엇이건 우물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복음화의 기원과 본질을 묵상하는 나의 뇌리에 우물이 클로즈업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복음화(Evangelizatio)”는 말 그대로 ‘희소식을 전’하거나 ‘희소식이 되도록 함’을 의미한다. 그 근거는 구약성경의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qui evangelizas Sion), 너 예루살렘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Qui evangelizas Jerusalem)”(이사 40,9), “희소식을 전하는 발길이 산을 넘고 달려온다(evangelizantis)”(나흠 2,1)와 신약성경의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시종 가브리엘이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분부를 받들고 너에게 와 일러주었다.”(루카 1,19), “나는 너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왔다.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다.”(루카 2,10),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루카 4,43), “예수께서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는데 열 두 제자도 같이 따라 다녔다.”(루카 8,1),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등에 있다.

 

복음화는 사도들의 “선포와 전함”의 행적(사도 5,42; 사도 8,4; 사도 15,35)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개념이고, ‘선교(mission)’를 뜻하는 동사 “Mittere(미테레: 파견하다, 보내다)”와 ‘사도’를 뜻하는 “apostello(아포스텔로 - ‘파견된 자’라는 뜻)”와 “보내는 사람(요한 20,21 참조)”이라는 의미의 “pempo(펨포)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도 동일한 연장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복음화의 기원에는 하느님의 세 주체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서 계신다. 구약성경은 성부의 업적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계획을 계시하시고 실현하기 위해 당신 백성을 선택하시고 형성하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창조주이시며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예언자들의 파견’으로 대변되는 당신의 “외향적 파견(ad extra)”을 계속하심으로써 끝없는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셨다. 백성의 입장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하며, 그 친교는 그분의 법을 준수함으로써 이루어짐을 의미하였다. 그의 법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주고, 떠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신명 10,18), “생활태도를 고쳐 인간관계 안에서 억울한 일이 없게 하며,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는 것, 그래서 그들의 조상에게 길이 살라고 준 땅에서 사는 것”(예레 7,5-7)이다. 또 몸을 씻어 정결케 하며, 그분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에서 깨끗이 손을 떼며,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사는 것. 그리고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며(이사 1,16-17), 법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울하게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건져주며, 더부살이와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고…(예레 22,3), 야훼께서 좋아하시는 일,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을 하며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미가 6,8)이었다. 그리하여 백성은 그분의 법을 준수함으로써 얻는 친교를 통해 구원된 삶을 살고 신적 구원사업의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느님 말씀의 육화인 그리스도(성자)는 하느님의 자발적인 계시이자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신 하느님의 실존이다. 하느님의 내어주심과 계시가 동시에 이룩된 엄청난 사건은 바로 그리스도의 파견으로 꽃을 피웠다. 즉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으로부터의 파견을 구체적이게 하며 인간을 위한 참된 공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루카 4,43)는 그리스도의 고백은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건설로 대변되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느님의 뜻에는 루카 4,14-21(레위 25,8-13)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하느님의 영을 받아 파견된 기름 부음 받은 자(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 것” 등이 포괄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예수 자신이 기쁜 소식이라는 점과 아울러 그 기쁜 소식의 내용까지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인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으로써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 안에서 이미 구원의 기쁨을 맛보는 동시에 그 기쁨을 잃지 않을 방법까지 알게 된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는 말씀과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 3,16)라는 말씀은 하느님이 바로 이러한 복음적 실천의 기원이 되시고, 원천이 되시며 최종 종착점이며 결국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당신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당신이 사랑 자체이심을 드러내 보이심으로써 애덕의 행위로 질서를 마련하시고 정의를 바로 세우신 분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심을 밝힌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기쁜 소식인 그리스도 안에서 메신저와 메시지가 동일한 것이고, 말함과 행함과 존재함이 동일한 것이 되었다. 그분의 행위를 효과 있게 하는 힘은 그분이 전하는 메시지와 그 자신의 완전한 동일성에 있으며, 그분이 선포하는 기쁜 소식은 단순히 그분이 말하거나 행하는 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존재에 있었던 것이다.(『교회의 선교사명』 13항)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인간들을 소외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 참 자유를 주시는 분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끝으로 성령께서는 메시아 - 예수의 강생사건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으신 분”으로 이미 현존하고 계심을 보여주었다. 성령으로 인한 예수의 탄생, 성령을 충만히 받은 요르단 강에서의 세례,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받은 유혹, 성령이 내리시어 기름을 부으시고(l’Unto) 드러내 보이신 그리스도의 사명 등 예수의 모든 선교활동은 성령의 활동적인 현존 하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예수의 부활사건도 성령의 작용이었다.(로마 8,11) 그러나 성령의 이러한 활동은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이제 더 이상 ‘어떤 힘’이나 ‘사람의 은사’가 아니라, ‘인격적 - 은사’로 구체화 된다.

 

그 결과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으로 인하여 “사도”로 거듭나 각자의 사명(mission)을 완수하게 하셨다.(요한 7,39; 20,21-22) 그리고 이후에도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선교사들과 교회를 인도하고, 그들의 새로운 빠라클리토(Paraclito)가 되어 그들 안에서 기도하는 동시에 불고 싶은 대로 부시는 당신의 능력 안으로 그들을 초대하였다.

 

결국 복음화는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는 분이며 국수주의적인 울타리에 갇혀있지 않는 분이신 하느님께서 복음화의 실제적인 주체이고, 보내는 분인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한 보내지는 분이며, 보냄의 내용이 되시고, 성자의 사명을 통해 (이미)실현되고 도래한 구원을 성령으로 (아직)완성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일(Opera Dei)이다. 그러므로 복음화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재림 사이에서 온 교회가 삼위일체를 이정표로 걸어가야 할 길인 것이다.

 

[월간빛, 2008년 2월호, 김혜경 세레나(가톨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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