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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희년의 사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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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60

희년의 사회성

 

 

1. 성사적 표지로서 대희년

 

1996년 1월, 교황청 2000년 대희년 중앙위원회 사목위원회는 [2000년 대희년을 향하여]라는 지침을 발표하여 전세계 교회에 2000년을 준비해 나갈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바탕 그리고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성찰과 실천 지침들을 제시하였다. 그 3부(희년의 성서적 전통) 2장(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완성되는 희년)의 내용 가운데, 희년에 관련된 문헌들 속에서 드물게 보이는 표현 하나가 눈에 뜨인다. 2000년이라는 특정한 한 해 자체가 "성사적 표지"라는 것이다. "특히 한 세기에서 다른 세기로 넘어가는 경계인 희년들과 또 아주 특별히 한 천 년대에서 다음 천년대로 넘어가는 경계인 희년은 교회와 인류 역사에 새겨진 위대한 표지, 일종의 '성사적 표지'이다." 2000년을 준비하는 기간뿐만 아니라 2000년 한 해 동안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과 역정(歷程) 자체가 매우 특별한 표지가 되어야 하며, 나아가 이 표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강력한 초대'의 역할을 하는 사회성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를 인류의 빛(Lumen gentium)으로 파악하고 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가장 먼저 강조한 것도 다름아닌 사회적 표지로서 교회의 본질과 보편적 사명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와 비슷하다. 곧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 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요 도구인 것이다"(교회헌장, 1항). 나아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가 전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교회의 모든 노력과 활동의 근본 배경으로 삼고 있다(사목헌장, 1항 참조). 한마디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체 문헌을 통하여 견지하고 있는 근본 정신 중 하나는, 교회가 그 본연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마땅히 사회성 또는 역사성을 지니도록 하자는 데 있으며, 이 점에 관한 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역사상 매우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교황청 2000년 대희년 중앙위원회 사목위원회가 대희년의 거행을 "전세계적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섭리적 기회"라 한 것은 마땅한 요청이며([2000년 대희년을 향하여], 제1부 제1장), 따라서 대희년의 거행이 나름대로의 종교적 이유를 넘어 사회적 동기를 지니고 있다고 한 것은 매우 타당한 인식인 것이다([2000년을 대희년을 향하여], 제2부 제2장).

 

 

2. 새날 새삶 운동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1998년 10월 15일 담화를 발표하여 2000년을 준비하는 '새날 새삶' 운동을 펼쳐 나감으로써, 한국 교회가 희년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를 촉구하였다. 그 후 한국 교회 특히 각 교구에서는 사목 교서나 사목 지침 등으로 새날 새삶 운동을 어느 정도 구현하고자 노력해 왔으며, 2000년도에 들어서도 대개의 교구가 사목 교서 등으로 지속적인 새날 새삶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인다.

 

새날 새삶 운동은 네 가지 기본적 차원을 바탕으로 각각 3-5가지의 실천 사항들을 제시하고 있다. 개인 차원에서 "나부터 새롭게", 가정 차원에서 "참된 가정 이루기", 사회 차원에서 "좋은 이웃 되어 주기", 민족과 국가 차원에서 "함께 가요. 우리"라는 네 가지 기본 틀과 그 실천 사항들이 그 논리나 내용에서 특별한 무리가 없어 보인다(특별한 무리가 없어 보인다는 것은 별다른 것이 없다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한국 교회의 대희년 운동인 '새날 새삶'이 2000년을 보내고 있는 한국 사회에 성사적 표지가 되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초대가 되고 있느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 긍정적인 답을 하기는 쉽지가 않다. 교회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의 2000년 삶이 새로운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어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새날 새삶 운동이 이 사회와 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의 표지로 비쳐지기엔 아직 함량이 모자란다.

 

 

3. 대희년 행사의 현실

 

전세계 국가와 교회를 통틀어 '2000년'이라는 이름을 걸고 행해졌고 행해지고 있으며 또 앞으로 계획된 일들이 참으로 많을 것이다. 필자의 교구를 예로 들자면, 교구 차원에서 대희년의 이름을 걸고 지금까지 치른 행사가 8건 정도며, 또 앞으로 이 해가 가기까지 여러 행사가 계획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연례적인 교구 행사에 "2000년 대희년"이라는 표현이 수식어로 붙었을 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희년의 정신과 의미가 개별 단위 교회의 2000년 사목 활동과 노력 속에 깊이 스며들고 있으며, 나아가 신앙인들의 삶 속에 진정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는 자각을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2000년이 분명한 '성사적 표지'가 되어 사회적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평가는 언감생심(言感生心)이다.

 

한국 교회의 2000년 대희년 전국 행사로는 4개가 계획되어 있다. 6월 25일 춘천교구가 주관하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7월 25-27일 대구대교구가 주관하는 '청소년 대회', 9월 24일 안동교구가 주관하는 '생명?환경 신앙 대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10월 14-15일 청주교구가 주관하는 '가정 대회' 등이 그것이다. 앞으로의 일이기에 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이나 정황으로 미루어 이 4개 대회가 장차 교회와 사회에 강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던져 주는 표지(Sign)로 기능하기보다는, 나름대로의 일정한 행사성(Event)을 지니는 것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그 두 가지 이유를 들면 우선은 2000년을 지내는 교회, 곧 교회 구성원들의 자의식 결핍이요, 다음으로는 '2000년'이라는 연도에 대해 사회 일반이 지니고 있는 인식의 평범성이다.

 

 

4. 2000년의 평범성

 

1996년, 미국이 대통령 예비 선거를 거쳐 공화당의 밥 돌(Bob Dole) 후보와 현직 대통령 빌 클린턴(Bill Clinton)의 맞대결로 뜨거웠던 때다. 8월 29일 시카고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후보 수락 연설을 하며 클린턴이 구호로 내세운 멋진 구호가 '21세기를 향한 다리'(Bridge to the 21st Century)였다. 클린턴 자신이 그 다리를 놓고자 하니 자신을 밀어 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 토론 방송의 유명한 사회자 러쉬 림보(Rush Limbaugh)가 방송중에 책상을 쳐가며 목청을 높여 클린턴의 구호를 비난하던 말이 있다. "도대체 21세기가 어떤 허깨비란 말이냐?" 그 사회자의 말에 따르면, 대통령 후보가 씨알머리도 없는 선거 구호로 주권자들을 기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2000년 1월 1일이 되었다 해서 새 하늘 새 땅이 열릴 리도 없으며, 또 반드시 그래야 할 필연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 날이 된다 해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해가 뜨고 질 것이며, 그저 그런 일상들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낭만에 초 쳐 먹는" 소릴랑 집어치우라는 것이었다. 그럴 듯한 구호로 현실을 호도하거나 국민을 현혹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 지는 오래며,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5개월이 지난 지금 '21세기를 향한 다리'가 어디에 세워졌는지 알 수가 없다. 기억에 남는 것은 화려한 구호 '21세기를 향한 다리'가 아니라 러쉬 림보가 호통치던 말뿐이다. "도대체 21세기가 어떤 허깨비란 말이냐?"

 

이렇게 일반 사회인 또는 비신앙인들이 2000년이라는 한 해를 여느 해와 다름없이 인식하며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들에게 2000년은 자신의 생애 속에 편입되어 지나가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시간의 한 단위일 따름으로, 2000년이 남달라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고작해야 20세기와 21세기 또는 한 천년대와 한 천년대라는 인위적 구분을 편의상 수긍하고 있을 뿐으로, 2000년이라 해서 그들이 자신의 삶과 역사에 독특한 의미 부여를 할 당위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이 2000년 새해를 맞아 지녔던 특별한 시간 의식은 2000년의 첫 주간도 채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떠들썩했던 2000년 새해 맞이는 하나의 행사로 지나간 지 오래며, 하루하루는 지극히 평범할 따름이다.

 

 

5. 새로운 출발로서의 대희년

 

일반 사람들의 인식이야 어떠하든, 2000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은 아무래도 다른 점이 있고 또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2000년을 '대희년'으로 살고 있다는 매우 강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이 자의식이 비그리스도교인들이나 일반 사회인들이 지니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인식과 일상을 두드려 일깨울 수 있을 만큼 강력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강화되고 있는가? 반복하지만, 아니다가 그 답이다.

 

그리스도인들의 2000년이 그야말로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으로 선포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2000년이 대희년으로 다가서는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일이 필요하다([2000년 대희년을 향하여], 제1부 제2장).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2000년을 대희년으로 받아들여 그 의미와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2000년에 거행되는 모든 행사는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탄생을 회상하거나 기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주신 구원 현실을 새롭게 현존시키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모든 행사는 근본적으로 교회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현실을 하느님께 대한 신앙심과 그로 말미암은 구원의 충만한 현실로 이끌어 가는 데 그 초점을 두어야만 한다.

 

여기서 '새로운 복음화'의 개념이 절실해진다. 사실 지금까지의 신앙 형태와 신앙인 공동체의 모습으로는 2000년 대희년의 깃발이 결코 올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2000년 운동인 새날 새삶 운동이 이제부터라도 담아 내야 할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새날 새삶 운동이 시대적 요청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복음화의 기폭제가 되도록 하는 일이 급선무로 보인다. 믿음이 '새롭게' 삶의 뿌리가 되며 또 그 믿음에 따르는 철저한 신앙 생활이 진정 새롭게 영위되는 특별한 계기가 이 2000년 대희년에 부여되어야 한다. 적어도 2000년 대희년이 교회 공동체가 새로운 출발(Exodus, 해방)을 시작하는 원년(元年)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교회는 모든 노력을 모아야 할 것이다.

 

 

6. 해방으로서 대희년

 

그 기원을 구약성서에 두고 있는 희년의 목적은 본래 왜곡된 인간 관계와 수탈된 자연의 원상 회복(原狀回復)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적으로는 모든 예속에서 해방이라는 귀결을 요청하였다(레위 25,8-55).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 희년은 그 내용상 아주 강력한 사회성을 지니고 있다. 휴경(休耕), 노예 해방, 부채 탕감 등의 요구는 인류 역사상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아주 강력한 사회 구조 개혁 조치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희년에 요청된 개혁 조치의 이유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나 야훼가 너희의 하느님"(레위 25,17.55)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종교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의 근원적인 통합, 이 놀라운 이해가 바로 희년의 근본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현실과 이상, 실제와 이론, 신앙과 사회 사이엔 언제나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구약성서의 저자가 희년을 통하여 목적하였던 바가 바로 그 괴리와 대립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유로 하느님의 또 다른 피조물인 다른 인간과 자연을 학대하거나 부당하게 대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성서 저자는 예속이 또 다른 예속을 부르고 만다는 진리를 터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이 삶의 모순과 갈등, 예속을 극복하고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길은 오직 '해방'뿐이다. 이러한 해방의 노력 없이 인간은 절대로 하느님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희년의 해방이 부르짖는 신앙과 삶, 종교와 사회의 통합이 또한 한국 교회의 새날 새삶 운동이 담아야만 할 또 다른 내용이다. 곧 한국 교회의 대희년과 새날 새삶 운동이 한국 사회와 민족에 성사적 표지가 되기 위해서는 희년 해방이 부르짖고 있는 사회성을 반드시 담보해야만 한다.

 

 

7. 대희년에 필요한 사회적 접근

 

교회의 사회적 기능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른바 선도(先導)와 분석(分析)과 통합(統合)의 기능이다. 교회는 언제나 "복음의 빛"(사목헌장, 1항)으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를 선도하기도 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분명한 분석을 바탕으로 전체를 제대로 통합해 낼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기능을 상실했던 종교나 신앙은 인류 역사에서 언제나 배척되거나 도태되어 왔을 뿐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사목헌장"에서 "교회가 전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다."라고 한 것은 필연성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위성까지도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기 위해서는 그 시대와 사회마다에서 담론의 초점이 되는 것을 선도하고 분석하며 통합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전문성이 교회의 선도와 분석 그리고 통합 기능을 저하시키고 있다는 것은 수긍이 가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어려움을 핑계로 마땅한 노력을 회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희년의 해방'이 놀랍게 보여 주고 있는 예리한 사회 분석과 통합 그리고 선도 기능을 상기해야만 한다.

 

이제 5개월이 지난 한국의 2000년만을 돌아보자. 대희년을 지내고 있다는 한국 교회가 2000년을 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성사적 표지'를 제공해 왔는가? 사회적 통합을 해치는 괴리나 갈등을 방치하거나, 사회적 일탈을 수수방관해 오지는 않았는가?

 

먼저 한국의 경제 질서 문제다. 약 한 세대가 넘게 왜곡될 대로 왜곡되어 온 한국의 경제 질서, 급기야는 1997년 말 이른바 IMF 체제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경제 현실과 그에 따른 사회 붕괴 현상에 대해 한국 교회가 체계적으로 시도한 분석이나 선도의 노력은 아직도 찾아볼 수가 없다. IMF 한파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안전 지대에 남아 있었을 뿐이다.

 

다음은 지난 번 16대 총선이다. 한국 정치사에 기록될 16대 총선의 중요한 현실은 공명 선거와 올바른 정치인 선출을 위한 총선 시민 연대의 활동과 그 결과라 할 수 있다. 만약 한국 교회 전체가 공식적(?)으로 총선 시민 연대에 동참하였다면 그 결과는 어떤 것이었을까? 총선 후에라도 총선 시민 연대의 활동에 감사하고 치하하는 교회의 발언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러했을 경우 교회가 '사회적으로'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일까? 어떻든 한국 교회는 16대 '총선을 식상할 대로 식상한 정치 놀음의 하나로 간주'한 꼴이 되고 말았으며, 총선에 관한 한 교회가 아무런 선도 역할도 하지 못한 채 사회를 비켜 가 버렸다(사목헌장, 75항 참조).

 

마지막으로 역사적이라 하고 있는 2000년 남북 정상 회담이다. 그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남북 분단 이후 처음으로 개최된다는 점에서 남북 정상 회담은 이 민족 전체에 역사적인 사건임에 틀림없다. 민족사와 민족 현실에 원죄로 자리하고 있는 남북의 분단과 대립, 그래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는 정치 사회적 차원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지상 명제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이 역사적 현실 앞에 어찌하여 그 흔한 9일 기도 한 번을 한국 교회 전체가 정성껏 바치겠다는 시도조차 없는가? 특별 기원 미사는 어떤 경우에나 봉헌되는 것인가? 정상 회담이 열리는 동안 모든 교회가 날마다 특별 지향으로 기원 미사를 봉헌한다면 잘못인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겠다는 심보와 다름이 없다. "교회가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 또는 "함께 가요. 우리" 따위는 말로나 듣고 글에서나 찾아볼 일이다!

 

 

8. 맺는 말

 

대희년을 지내고도 교회와 사회는 여전히 같은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사실 경제 문제는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호구지사(糊口之事)로 언제나 남을 것이며, 16대 총선 이후에도 정치나 사회 지도자를 정하는 일은 계속해서 복잡하고 어려울 것이다. 또 남북의 진정한 화해와 일치는 또 다른 반세기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교회가 이 사회 속에서 진정한 믿음의 공동체로 기능해야 할 일은 언제나 남아 있을 것이다.

 

2000년이 한국 교회에 진정한 대희년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 스스로 신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성사적 노력'을 진정으로 새롭게 해야 하며, 교회가 '성사적 표지'로 사회에 세워지도록 본연의 사회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적어도 2000년이 그러한 노력을 시작하는 '해방과 출발'의 기원이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시도가 없는 한, "2000년 대희년, 무슨 허깨비란 말이냐!"라는 말이 들려 올지도 모른다.

 

[사목, 2000년 7월, 이현로(청주교구 관리국장,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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