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병인박해기 경상도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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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2-01 ㅣ No.1187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8) 병인박해기 경상도 순교자 I



제주교구의 첫 영세자이자 첫 순교자가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16~1866)으로 밝혀진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교구에서는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자 1998년 9월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묘역에서 순교비제막식을 거행한다. 이어 1999년 1월에는 김기량 순교 약전을 정리,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 통합 추진위원회에 제출한다. 이를 위해 교구에 시복시성위원회를 구성했으며, 2005년 4월에는 조천읍 함덕리에 순교 현양비 제막식을 거행한다. 한국 순교복자성직수도회는 또 서귀포시 서흥동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수도원 및 경당을 세우고 지난 5월 축복식을 거행하기에 이르렀다.

김기량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1857년 2월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중국 광뚱성 해역에서 영국 선박에 의해 구조돼 홍콩에 다다른 것이 계기가 됐다. 영국 배에서 그를 만난 프랑스 사제들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데려가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해준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우게 되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교육에 갖은 정성을 다 기울였다. 두 달 만에 루세이유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은 그는 홍콩을 출발해 의주를 통해 조선에 귀환했고, 이듬해 5월 조천포를 통해 제주로 돌아온다. 그 사이 조선 선교사들과 접촉, 배티교우촌으로 가서 페롱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났다.

제주로 돌아온 그는 집안 사람 20명을 개종시켰고, 자신이 데리고 있던 사공들을 예비신자로 만들었다. 1865년에는 그가 탄 배가 일본 규슈에 표착하자 나가사키에 체류하면서 프티장 신부를 만났고, 이듬해 초 조선으로 귀국한 뒤에는 사공 2명이 세례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무역차 경상도 통영에 갔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발각돼 통영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혹독한 문초와 형별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증거, 1867년 1월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하느님의 종 125위 중 부산 수영(동래) 장대 순교자로는 이정식(요한, 1795~1868)과 양재현(마르티노, 1827~1868) 등 2위가 있다.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았던 이정식은 무과에 급제, 동래의 장교가 됐으나 59세 늦은 나이로 천주교에 입교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가족과 미신자들에게 열심히 신앙을 권면했고,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애긍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기장과 경주로 피신했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현 울산시 북구 농소1동)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아들 이월주(프란치스코), 조카 이삼근(베드로) 등과 함께 붙잡혀 동래로 압송돼 47일간 옥살이를 하다가 73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같은 날 그의 아들 이월주와 며느리 박조이(마리아), 조카 이삼근, 다른 교우 차장득(프란치스코), 양재현(마르티노), 서울 이 생원(야고보), 옥조이(바르바라) 등 7명도 같은 장소에서 치명했다.

이정식과 함께 치명한 양재현은 동래에서 좌수 직책을 갖고 있던 인물로, 이정식을 통해 신앙을 알게 되고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868년 동래 포졸에게 체포돼 수영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동래 관아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울산 장대 순교자로는 이양등(베드로, ?~1868)과 김종륜(루카, 1819~68), 허인백(야고보, 1822~68) 등 3위가 있다. 경상도 울산 죽령(현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교우촌 회장이던 이양등은 꿀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던 인물로, 1866년 박해를 피해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온 김종륜과 허인백을 만나 서로 신앙을 권면하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나 1868년 포졸들이 죽령 교우촌을 찾아내면서 발각돼 교우들과 함께 잡혀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이양등은 사형선고를 받고 1868년 9월 14일 울산 장대(현 울산시 중구 남외동)로 끌려가 참수를 당했다.

충청도 공주 양반 집안 출신으로 상주 멍에목(현 문경시 동로면 명전리)을 거쳐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했던 김종륜, 경상도 김해 농부 집안 출신으로 언양을 거쳐 죽령 교우촌으로 이주해 살기까지 '신덕자(信德者)'라고 불리며 수계의 삶을 살던 허인백도 이양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1일, 양인성(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정리=오세택 기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9) 병인박해기 경상도 순교자 II와 1888년 순교자 윤봉문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경상도 상주 지역에선 병인박해기에 박상근(마티아, 1837~67)이 순교했다. 경상도 문경에서 아전을 지낸 그는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착실히 교리를 지키며 살았다. 1866년 3월 예비신자였던 자기 자형과 함께 한실 교우촌(현 경북 문경시 마성면 상내리)에서 칼레 신부를 만나 문경 읍내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모셨고 사흘 뒤 다시 칼레 신부가 한실 교우촌으로 되돌아가기까지 함께했다. 얼마 뒤 홍 마리아, 박 막달레나와 함께 체포돼 상주로 끌려간 그는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천주교를 믿는다고 분명히 고백했으며 함께한 교우들을 권면하다가 1867년 1월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대구에선 신석복(마르코, 1828~66)과 박대식(빅토리노, 1812~68)이 대표적이다. 경상도 밀양 명례(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에서 살았던 신석복은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중 천주교에 입교해 10년간 신앙생활을 했다.
 
1866년 창원 마포로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던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김해 가산(김해시 한림면 가산리)에서 대구 포졸들에게 체포돼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으며 1866년 3월 31일(또는 3월 18일)에 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경상도 김해 예동(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출신인 박대식은 천주교에 입교한 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1868년 대구에서 온 포졸들과 김해 포졸들에게 체포돼 1868년 10월 12일 조카와 동료 2명과 함께 대구 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았다.

함안 순교자로는 구한선(타대오, 1844~66)이 있다. 함안 미나리골(경남 함안군 대산면 하기리) 중인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만나 교리를 듣게 된 후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교리를 배운 뒤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이후 10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리델 신부의 복사가 돼 거제도 선교에도 동행하기도 했다. 1866년 리델 신부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와 지내던 중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그곳 관아로 압송됐으며 모진 형벌을 받은 뒤 석방돼 집으로 돌아왔으나 7일 만에 죽었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진주 순교자로는 정찬문(안토니오, 1822~67)이 있다. 경상도 진주 허유고개 중촌(경남 진주시 사봉면 중촌리)에서 태어난 그는 먼저 세례를 받고 입교한 아내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듣게 됐으며, 41세 때인 1863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3년간 열심히 계명을 지키며 살았다. 1866년 가을에 진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진주로 끌려간 그는 25일간 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주 형벌을 받았고, 1867년 1월 25일 옥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45세였다.

병인박해 당시 중국으로 피신했던 리델 신부는 1870년 6월 5일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고 제6대 조선대목구장이 된다. 리델 주교는 이후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입국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먼저 1876년 5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입국해 서울에 도착했다. 병인박해 이후로 본다면 10년 만에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온 셈이었다. 선교사들은 다시 교우촌과 신자들을 방문해 교회 재건에 매진했다. 그로부터 또다시 10년이 지나 드디어 1886년 6월 4일 조선과 프랑스가 13개 조항으로 구성된 한불수호통상조약 체결하면서 가톨릭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나 선교의 자유를 향한 의미 있는 첫걸음을 뗀다.

그러나 1888년에도 순교자가 발생한다. 진주에서 순교한 윤봉문(요셉, 1852~88)이다. 경상도 경주 인근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에 열심이었으며 병인박해 때 집안 재산을 몰수당한 뒤 양산으로 이주했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거제도로 건너가 진목정(경남 거제시 옥포동)에 정착했다. 그의 부친 윤사우는 그 이전부터 비밀리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했으며, 진목정으로 이주한 뒤에는 진 요한 가족에게 복음을 전해 입교시켰다. 이 인연으로 진 아녜스와 혼인한 윤봉문은 1887년 겨울 경상도 사목을 맡고 있던 로베르 신부가 거제도를 방문하자 회장에 임명돼 로베르 신부를 안내하면서 성인 15명에게 세례성사를 주는 데 함께했다. 로베르 신부가 떠난 이듬해 봄 거제에서 박해가 일어나 동료 신자 3명과 함께 통영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그럼에도 혼자만 통영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던 그는 1888년 4월 1일 옥중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마산교구는 올 들어 지난 4월 윤봉문의 유해를 기존 족박골(거제시 옥포2동) 묘소에서 새로운 묘소(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 산 103-12)로 이장했으며, 순교자 기념성당과 유물전시관, 순례자의 집 등을 조성해 성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평화신문, 2013년 12월 8일, 양인성(한국교회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정리=오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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