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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 영성: 예수 수도회 -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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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5-21 ㅣ No.126

[수도 영성] 예수 수도회 -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예수 수도회와 메리 워드

 

예수 수도회는 1609년 영국인 메리 워드(1585 l645년)가 창설한 최초의 여자 활동 수도회이다. 창설자는 수도회가 예수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를 바랐지만 교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아 동정 성모회(Institutum Beatae Mariae Virginis, I.B.M.V.)로 인가를 받았고, 494년이 지난 2003년 6월 7일, 비로소 교황청에서 수도회 본질적인 정신이 담긴 예수 수도회로 거듭나게 되었다.

 

메리 워드는 가톨릭교회가 극심히 박해를 받던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 영국 귀족 가문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지켜나가는 신자들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신앙의 가치는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체득하며 성장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수도생활에 부르심을 받은 메리는 21세에 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생토메로 건너가 자신의 ‘온 존재’를 오롯이 하느님께 봉헌하려는 열망으로 가장 엄격한 수도회에 입회하기를 원했다.

 

당시의 통념대로 관상수도회인 글라라 수도회에 입회한 메리는 하느님의 다른 이끄심을 내적으로 체험하고, 총장이 통솔하는 중앙집권적 체제의 봉쇄가 없는 새로운 수도생활 형태를 여자 수도회에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메리 워드는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1491-1556년)처럼 세상 안에서 시대적 요구에 응답하며, 신앙을 옹호하고 전파하면서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리는 봉사의 삶을 택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의 영향으로 여자 수도회에는 관상생활만을 요구하던 17세기에, 세상 안에서 활동을 수도생활 양식으로 받아들이려는 시도는 당대에 매우 혁신적이었다. 따라서 많은 고난을 겪기는 하였지만, 여자 활동 수도회의 선각자로서 첫걸음을 내디뎠기에 영성사의 큰 전환점이 되기도 하였다.

 

메리 워드는 영국에서 감옥에 갇힌 가톨릭 신자들을 방문하고 이교에 빠진 사람들을 신앙으로 안내했으며 환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메리의 탁월한 인품은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그 후 메리는 자신을 따르는 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하느님의 영광을 삶의 목표로 생토메에서 새로운 수도회를 시작하였다.

 

분원과 학교를 설립하면서 창설자로서 적극적인 활동도 하였지만, 봉쇄생활만이 인정되는 시대인 만큼 활동을 금지당하는 쓰라린 실패도 경험하였다. 메리 워드는 수긍할 수 없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과 헛소문을 퍼뜨리는 중상 모략가들, 심지어 몰이해로 몇몇 동료마저 돌아서는 고통을 받았지만, 하느님께서 용서와 사랑을 요구하시기에 어떤 반대자도 수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육화되신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사랑을 드러내시면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지혜를 몸소 가르치며, 소명에 성실히 응답하였다.

 

새로운 수도생활 형태의 인준은 비록 수백 년 후에나 가능하였지만, 교회 안에서나 세상 안에서 여성의 활동영역이 전개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메리 워드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1645년, 순교자와 비할 바 없는 삶을 산 메리 워드는 동료들이 둘러선 가운데 하느님의 무한하신 선에 감사드리며, 주님께 찬미의 찬가를 부르자고 초대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난한 이를 사랑하고 / 그 사랑에 머물며 / 그들과 함께 살고, 죽고, 부활하는 것이 / 삶의 모든 것이던 메리 워드 / 60년 8일 동안 살다가 / 1645년 1월 30일 여기에 잠들다”(메리 워드의 비문).

 

 

교회의 여성으로서 사도적 영성을

 

사도적 열성으로 가득 찬 메리 워드는 동료들과 함께 청소녀들을 복음의 정신에 따라 적극적이고 신앙적인 여성으로 키우고자 하였으며, 장차 여성들이 남성에 못지않게 위대한 일을 하리라 확신하였다. “남성과 여성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 주님의 진리는 영원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진리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여성도 남성도 마찬가지로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이런 진리의 결핍 때문이지 우리가 여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 우리가 여성이기 때문에 위대한 일을 못하게 되는 차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 앞으로 여성들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기를 하느님께 법니다”(메리 워드).

 

참으로 메리 워드는 교회 안에서 여성의 몫을 중시하였고 교회에 성실한교회의 여성이었다. 로마 교황청의 오해로 심한 고통을 받고, 심지어 이단의 혐의로 독일 뭔헨의 글라라회 앙어 수도원에 감금* 당했을 때에도, 선한 의지로 시작한 수도회가 해체되었을 때에도, 항상 교회 편에 선 교회의 딸이었다.

 

수도회를 해체하고 메리 워드를 감금시켰던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나와 모든 추기경들은 그대의 순종에 만족할 뿐만 아니라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대가 수도회를 신앙으로 이끌고 있음을 알고, 우리가 수도회를 폐쇄하려고 했을 때도 그대는 우리의 결정에 즉시 순종함으로써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라는 말로 이단의 혐의에서 벗어난 메리를 치하하였다.

 

메리 워드가 시작한 새로운 성소의 빛은 수도생활의 거룩함이 세상 안에서 활동으로 실현되는 장이며, 기도생활에서 식별된 하느님의 뜻이 외적인 개방과 자유, 기쁨과 적극적 투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예수 수도회 회원은 메리 워드의 내적 깨달음에서 얻은 열매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그에 따라 봉사하려는 영적인 자유, 성실(솔직), 정의를 내적인 자질로 삼는다. 그리하여 일상생활 안에 현존, 활동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삶을 온 세상 사람과 함께 나눔으로써 하느님께 더 큰 영광(Ad Majorem Dei Gloriam, A.M.D.G)을 드리는 삶으로 초대받는다.

 

“네 삶이 다할 때까지 하느님께 봉사하는 데 항구하라. 그리고 네 삶이 어디서 마치게 되든지 걱정하지 마라. 네가 성실하기만하면, 울타리 안이나 구렁이나 또는 침대에서 죽든지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메리 워드).

 

 

한국 예수 수도회

 

1964년에 독일의 뭔헨 님펜부르그 관구에서 한국에 진출한 예수 수도회는(당시 동정 성모회) 교회 역사상 이례적으로 9년만에 관구로 승격하였다. 이것은 각 나라의 문화와 풍토를 존중하는 토착화 정신과 자율적인 운영을 중시하는 예수 수도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현재 대전에 관구를 둔 예수 수도회는, 대전 성모초등학교와 성모여고에서 지적인 교육에만 치중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가꾸어갈 줄 아는 ‘건전하고 슬기로운 생활인’이 되도록 교육하고 있다.

 

예수 수도회 한국 회원들은 영성 사도직은 물론, 의료, 사회복지, 몽골 · 중국 선교, 해외 교포사목을 통하여 일찍이 봉쇄를 뛰어넘어 세상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세상 사람들을 위한 파견의 삶을 산 메리 워드의 후예로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

 

* 1631년 2월 7일 감금되었다. 9주 후 메리는 무혐의로 물려났고 동료들과 로마로 가서 다시 공동체를 이루어 살 수 있도록 허락을 얻었다. 그녀는 조건 없이 교회에 순종하먼서도 거짓 탄핵을 변호하고자 두 번이나 로마에 갔다. 하느님에 대한 희망이 매우 깊었기에 흔들림 없이 갖가지 시련을 겪어냈다.

 

[경향잡지, 2007년 3월호, 글 · 사진 예수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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