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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심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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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3 ㅣ No.38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심수녀회 (1)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사회가 큰 혼란에 빠졌던 18세기말, 교회는 박해와 수난의 큰 위기를 겪어 전례가 금지됐으며 수도회들도 해산되는 등 종교적으로 대혼란을 겪었다. 

 

이 같은 혼란의 시기를 살았던 성녀 마들렌 소피이(1779∼1865)는 혁명의 여파로 갈라지고 상처난 프랑스 사회 한 가운데서 상처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성녀 마들렌 소피이의 이같은 개인적인 체험은 쇄신이 요구되던 당시 성심수녀회 창설로 이어졌고 진보적인 자세로 변화의 물결을 이끌어갔다.

 

어린 시절 오빠로부터 받은 예수성심 성화를 바라보며 하느님의 또다른 신비를 체험했던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수도회 창립 후 인류의 한복판에서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성심을 알아보도록, 그분 심장의 뛰는 박동을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도록 세상에 눈길을 고정시키라고 회원들에게 자주 권고했다. 이 정신은 지난 2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변화하는 시대의 징표를 읽어가며 항구히 자리매김해 온 성심수녀회 영성의 큰 줄기가 됐다.

 

관상생활을 열망했던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어느날 기도하는 가운데, 상처받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공경하며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여성교육에 투신할 것을 다짐하고 여성수도회 창립을 생각하게 됐다.

 

가르멜수녀회에 대한 소명을 포기하고 성심교육이라는 새로운 사도직을 전개한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시대상황과 지역사회의 필요에 신속히 응답하고자 젊은 여성들을 위한 기숙학교, 각종 기술학교, 장애인학교, 고아원 등을 세웠고 나아가 교사배출을 위해 교육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관상생활을 추구했던 그녀는 수녀회를 이끌고 학교를 운영하면서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깊이 끌렸지만 '세상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해야할 많은 일들을 고민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교육 사도직에 전념해왔음에도 여전히 관상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세상 사람들과 가질 수밖에 없는 관계들이나 꼭 해야할 일들이 있더라도 내적 생활은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며 균형없는 활동생활을 내적생활로 바로잡도록 회원들에게 당부했다.

 

이는 성녀 마들렌 소피이가 활동하는 가운데 직접 경험을 통해 내적생활의 중요성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며, '관상생활에 대한 매력이 일종의 유혹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았기 때문이다.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일상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리스도의 마음에 드는 도구가 되기 위해 자주 성체 조배를 했고,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기 위해 기도생활에 철저했다.

 

그리고 예수 성심 안에서 한없이 너그러움을 발견한 그녀는 그 너그러움을 공동체 안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또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발력 있게 적응하는 것 또한 너그러울 때 가능하다고 말한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한 예수 그리스도를 공동체의 모범으로 삼았다.

 

세상 안에서의 예수성심의 발견, 내적인 기도생활과 아울러 성녀 마들렌 소피이의 또다른 영성은 바로 마음을 교육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마음이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중심지, 즉 자신과 성심수녀회가 근본적으로 뿌리내야하는 내적 정신의 중심지다. 그녀는 마음을 교육하는 일에 일생을 투신해왔으며 이는 참된 인간성장과 사회변혁을 이루는 근원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하는 마음을 교육하는 일은 먼저 교육받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예수 성심의 한없는 사랑을 발견해, 그가 사랑을 인격 전체로 깨닫도록 돕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마음의 교육자는 교육받는 대상을 소중히 여겨야 하며, 이것은 아이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표현돼야한다고 강조했다.

 

교육받는 개개인의 마음에 변혁이 일어날 때 비로소 사회변혁이 가능하다고 말한 성녀 마들렌 소피이는 진정한 변혁을 위해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 특히 젊은 여성을 교육하는 것이 사회변혁을 위한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했다.

 

성녀 마들렌 소피이의 이같은 정신은 비단 18세기뿐 아니라 전쟁과 폭력, 환경파괴, 인권탄압 등이 만발하는 작금의 21세기에도 여전히 세상 한가운데서 구현돼야하며, 이를 위해 성심수녀회 회원들은 그 영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녀는 오늘도 수도회 전 회원이 '예수 성심 안에서 한마음 한 뜻'이라는 모토 아래 마음의 자유를 누리면서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며 응답하기를 원한다.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9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심수녀회 (2)

 

 

종신서원식 장면.

 

 

역사와 사도직 활동

 

성심수녀회는 1800년 성녀 마들렌 소피이 바라가 청소년 교육을 통해 예수 성심의 사랑을 전파하고자 프랑스 아미앵에서 창립됐다. 

 

어릴 때부터 예수 성심에 대한 독특한 신심을 길러 왔던 마들렌 소피이는 어느날 기도 가운데, 죄로 상처받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바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투신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성소임을 깨닫게 됐고 이것은 바랭 신부를 만나면서 구체화됐다. 그런 후 1800년 11월 21일 파리 아미앵 투렌느 가의 작은 성당에서 세 명의 수녀와 첫 서원을 함으로써 성심회 창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성심'이라는 말은 반혁명의 표지로 인식돼 정치적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었으므로 초창기 성심회 이름은 '예수의 사랑받는 자매회'로 했다. 이후 성심회는 1815년 총본부를 로마로 옮겼고, 1826년 교황 레오 12세로부터 수녀회 인가를 받았다.

 

성심회는 창립 이듬해인 1801년 10월 아미앵에 미래의 사회 지도층을 형성할 귀족 자녀들을 위한 기숙학교인 '성심학교'를 열었는데 이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크리스천 교육 수녀회'로 많이 알려졌다.

 

1802년에는 학교 내에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한 무상학교를 열어 더 많은 청소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 같은 학교교육은 점차적으로 확대돼 1806년 그르노블에서부터 1850년 파리지역까지 이어졌다. 아울러 성심회는 직업학교, 청각 장애 청소년 교육기관, 지체 부자유 청소년들을 위한 의료기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또 1836년에는 교육대학을 설립하고 1854년에는 사범대학을 세웠는데 이것은 성녀의 사후에 성심회가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성심회는 이탈리아, 스위스, 벨기에를 비롯해 영국, 아일랜드, 스페인, 네덜란드 및 독일 등 유럽 각국에 성심교육을 전파했다.

 

한편 이에 앞서 성심회는 1815년 첫 선교사인 로즈 필립핀 뒤센 수녀를 미국 미주리에 파견해 미대륙에서 교육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 성심교육을 전해온 성심회는 성녀 마들렌 소피이 생존시 이미 16개국 122개 분원 3천 5백여명의 회원 증가를 낳았으며, 프랑스에서만 84개의 기숙학교와 74개의 무상학교에서 1만 여명의 학생들에게 성심교육을 전했다.

 

성심회의 활동은 예수 성심께 대한 봉헌과 청소년 교육에 대한 봉헌으로 요약된다. 성심회는 19세기의 '예수성심' 영성과 '성체'에 대한 신심에서 교육 사도직 활동의 힘을 얻었고 이를 창립정신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교육은 성심회의 사명을 실현시키는 수단이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고유한 방법이기도 했다.

 

회원들은 기숙학생의 교육, 가난한 청소년들에 대한 무상교육, 사회인들을 위한 피정, 일과 관계된 세상 사람들과의 접촉 등으로 예수 성심의 영광을 드러냈다.

 

성심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 동안 획일적인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각국의 문화와 전통 및 특수성을 고려해 '다양성 안의 일치'를 강조하게 됐고, 점차 유럽중심의 세계관에서 탈피해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대륙에도 관심을 돌리게 됐다. 그리고 성심회가 실시해온 신앙교육 및 학문교육은 신앙에 바탕을 둔 정의교육이 강조되면서 보다 통합적인 교육으로 변모했다.

 

또한 회원들은 세상과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수도복을 사도직 활동에 편리한 평상복으로 바꿨고, 사회의 긴급한 필요와 지역사회의 부름에 응답했다.

 

'세상의 긴급한 필요와 지역교회의 부름에 창의적으로 응답할 것을 촉구할 것'이라고 82년 회헌에서 언급한 성심회는 앞으로의 사도직을 교육과 양성, 인간발달과 정의구현, 신앙생활지도 등으로 활동의 폭을 넓혀갔다.

 

전세계로 활동을 넓혀갔던 성심수녀회의 한국진출은 1956년 당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초청으로 일본 극동관구에서 7명의 회원이 파견돼 옛 성심신학교 자리에 첫 성심공동체를 이루면서 시작됐다.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16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성심수녀회 (3)

 

 

성심회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진출과 사도직 활동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4가에 위치한 성심수녀회. 예전 용산 예수 성심학교 자리인 이곳에서 1956년 일본에서 파견된 7명의 회원과 1명의 한국인 회원으로 한국교회 안에서 성심공동체의 싹을 키워나갔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갖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성심회는 교육사도직을 비롯해 노동, 영성교육, 청소년 사도직에 주력하며, 서울과 역곡, 경기도 파주 등 9개 공동체에서 사회와 교회의 필요에 따라 응답하며 수도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교육사업을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공동체는 57년 성심여자중학교를 시작으로 같은 해 8월 성심국제학교, 성심국제유치원 등을 개교했다. 또 60년에는 성심여자 고등학교, 62년에는 성심국민학교의 문을 열었으며, 64년에는 강원도 춘천에 성심여자 대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성심학교에서는 성심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소수의 학생들만 선발해 교육해왔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이 전통은 점차 바뀌게 됐다. 아울러 69년 중학교 평준화 교육이 실시되면서 더 많은 청소년들에게 성심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게됐다. 그리고 정규 학교 교육 외에도 65년부터 3년간 봉천동에서 천막학교를 열었으며, 67년부터는 성심여자고등학교 안에 수도자를 위한 야간 중·고등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던 가운데 70년대 초 성심여중과 수도자 야간 고등학교를 폐교시켰고, 지방 편재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성심여자대학을 서울로 이전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75년부터 부천에 교사를 짓고 성심여자대학교 일부를 이전했으며 80년에 완전히 학교를 옮겼다.

 

한편 78년 탄광지대인 강원도 고한에 4명의 회원을 파견해 지역사회 복지활동과 본당사도직을 시작한 성심회는 83년 두문동 보건소를 개원했고 93년부터는 지역 불우 청소년들을 위해 '흑빛 공부방'을 운영해왔다. 82년에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철거민촌이었던 상계동에서 본당사도직과 도시 빈민활동을 전개했으며, 88년 3월에는 경기도 부천과 인천 부평에서 노동사도직을 시작했다. 또 92년에는 상계동본당에서 운영하는 '마음터 공부방'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처럼 성심회의 비제도 교육사도직인 '두레사목'은 본당, 노동, 청소년, 의료사도직을 두루 포함하였으며 이것은 70, 80년대에 걸쳐 더욱 성장하게 됐다.

 

성심회는 91년 교육법 개정령에 의해 '성심여자대학교'로 교명을 바꿨고 94년에는 가톨릭대학교와 통합, '가톨릭대학교'로 교육부의 인가를 받게되면서 이듬해부터 남학생들의 입학이 가능해졌다. 통합 이후 학교의 운영권을 서울대교구에 양도한 성심회는 이때부터 교육사도직을 점차 비제도 교육으로 전환,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사회의 긴급한 필요에 원활히 응답하는 '교육사도직의 다양화' 방법을 실천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교육활동으로는 성심여고 운영과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에 교수지원 및 학생 사목활동에 주력하고 있으며, 소외된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사회사도직으로는 상계동과 강원도 고한에서 본당과 공부방 및 보건소 진료활동, 그리고 경기도 부천에서 노동사도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적인 변화로 인해 강원도 고한에서 활동의 필요성이 줄어들자 지난해 공부방과 진료소를 모두 철거하고 부천에서 새롭게 공부방을 운영하게 됐다.

 

이외에도 경기도 부천에서 노동사도직을 계속하고 있으며 경기도 파주에서 피정지도 및 인간발달 상담 및 애니어그램 연구활동을 하고 있고, 부천시 괴안동에서는 99년부터 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세계교회의 요청에 따라 아프리카 챠드, 인도네시아, 호주에 3명의 회원들을 선교사로 파견, 해외선교의 부름에도 응답하고 있다. 아울러 성심회는 지난 95년부터 성심자매회를 구성, 평신도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성심의 영성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올해로 창립 201주년, 한국진출 46주년을 맞는 성심회는 현재 60여명의 수도회원들의 성심의 영성을 교회와 사회 곳곳에 전파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1월 20일, 이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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