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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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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7-02-13 ㅣ No.42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상)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들.

 

 

창설과 한국진출

 

1877년 1월 6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짐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 교황 비오 9세가 '마리아의 전교자'라는 이름을 주면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Franciscan Missionaries of Mary)는 이 땅에 태어났다.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최초의 여자수도회로서 오늘날 국제적인 수도공동체로 자리매김하는데 겨자씨 역할을 한 사람은 수녀회 창립자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다.

 

1839년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엘렌 드 샤뽀땡은 열두살 되던 해, 아버지의 동창인 샨스 주교로부터 미국 미시시피주 인디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깨닫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전교자'의 꿈을 키워왔다. 수도성소의 부름에 따라 21세 때 글라라회에 입회한 엘렌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단순정신을 체험하면서 침묵과 기도 속에서 관상성소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병으로 인해 수도생활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도생활을 갈망하는 그녀의 열망은 1964년 '마리아의 속죄회' 입회를 가능케했고 이 때 마리 드 라 빠시옹(수난의 마리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당시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는 곧 인도 선교지의 관구장으로 임명됐고 여학교 기숙사, 고아원, 의원 등을 설립하는 등 지칠 줄 모르는 선교열을 불태워갔다. 이같은 선교열정과는 달리 선교지의 복잡한 상황으로 수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선교와 공동생활을 갈망한 결과 '마리아의 전교자'로서 세계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새로운 수도회가 탄생하는 기회를 맞았다.

 

1877년 총장으로 선출된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는 오랫동안 교회 안에 영성의 뿌리를 내려온 수도회의 보호 아래 수도회를 두고자 프란치스꼬 성인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는 1882년 10월 4일 프란치스꼬 수도3회에 가입했다. 이로써 수녀회는 1885년 교황 레오 13세의 허락을 받아 '마라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 수녀회'라는 명칭으로 수도회명을 변경하고 1890년 7월 17일 최종승인을 받았으며, 1896년 회헌에 대한 최종 인가를 받았다.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는 창립 석달만에 프랑스를 시작으로 아프리카, 스리랑카, 중국, 영국, 스위스로 진출하는 등 명실공히 세계선교의 수도사명을 실천해나갔다. 1904년까지 전세계 26개국에 3000여명의 수녀들이 파견돼 학교, 병원, 무료 진료소, 검역소, 기숙사, 양로원 등 지역에서 필요로하는 사도직을 실천하면서 마리아의 전교자가 됐다.

 

이들의 세계선교는 일찍이 1886년 중국으로 진출했다가 순교한 7명의 수녀들에 의해 검증되고 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순교한 예수의 마리아 에르민 수녀를 비롯해 7명의 수녀는 46년 교황 비오 9세의 의해 시복됐고, 200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다.

 

73개 국적을 가진 8000여명의 '마리아의 전교자'들은 1958년 한국교회에도 뿌리를 내렸다.

 

58년 6월 일본에서 입회한 한국인 수녀 6명을 포함해 11명의 수녀가 당시 부산 대목구장 최재선 주교의 요청으로 한국에 진출하게됐다.

 

성모여자중고등학교를 시작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가운데 머물고, 그들을 위한 활동에 힘써왔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는 부산 양정동 수녀원을 거쳐 현재 서울 가리봉동에 본원을 두고 있다. 78년 관구로 승격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꼬회 한국관구는 30여명을 선교의 첨병으로 전세계 각국에 파견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며 마리아와 프란치스칸의 영성을 실천해가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3월 24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중)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해외선교사 파견식을 갖고 있다.

 

 

영성과 사도직 활동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전세계적인 국제 수도회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영성의 원천이 된 것은 조건없이 「예」 하는 마리아의 순종적인 자세와 프란치스코 성인의 「작은 자」의 정신이다. 

 

창립자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는 글라라 수녀회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과 단순, 복음정신을 배웠으며, 속죄회에서 선교활동 동안 전교자로서의 사명을 깨달았다.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의 이같은 체험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영성의 근간을 이뤘고, 그녀는 회원들이 언제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살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회원들은 세상의 구원과 교회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며, 매일의 성체조배를 통해 선교활동에 필요한 힘을 길러내고 있다. 즉 선교의 도구가 되기 위해, 또한 하느님의 조력자가 되기 위해 회원들은 제물자, 전교자, 조배자로서의 하나된 삶을 살아간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한 성모님의 모범은 마리 드 라 빠시옹 수녀와 그의 뜻을 잇는 회원들 안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여기 있나이다(Ecce), 그대로 되소서(Fiat)」라는 성모님의 자세는 「살아있는 복음으로 걸어가십시오」라는 창설자의 정신을 실천케했고, 이것은 곧 수녀회의 사도직 사명인 선교로 드러나고 있다.

 

평화의 도구로서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했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 또한 수녀회를 지탱하는 큰 힘이다. 따라서 회원들은 그 영적인 힘을 바탕으로 진정 「작은 자」로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선물로 인식하면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곳,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즉 프란치스코적인 가난정신으로 복음적인 형제생활과 간단한 생활양식 안에 복음전파에 온전히 순응하고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며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하며 살고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는 선교적 소명에 따라 특히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 다른 전교자들이 미치지 못하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파견해 복음을 전파했다.

 

세계선교를 위한 수도회의 사명은 한국에서도 예외없이 81년 프랑스와 컬럼비아 선교를 시작으로 미국, 에콰도르, 페루, 가나, 이디오피아, 아르헨티나, 리비아 등으로 34명의 수녀들을 파견하고 있다. 이와 아울러 국내에서 치중해온 사도직 활동은 교육 · 의료사업 · 사회복지분야다. 수녀회 입국 초기에는 성모여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운영했고, 60년에는 부산 양정동 수녀원내 「성모의원」을 개원했다. 이에 따라 수녀회는 15년간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의료 봉사를 해왔고 이후 폐쇄했다. 이듬해에는 강원도 정선에 「성 프란치스코 의원」을 개원해 역시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데 힘을 다했다. 수녀회는 초창기부터 오랜 시간 동안 일반 진료는 물론 이동진료를 실시하기도 하는 등 의료사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다. 90년대 들어서도 한국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는 역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며 시대의 필요에 따라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사도직활동으로 대신해왔다. 특히 행려자·무의탁 노인·근로자·여성복지, 도시빈민, 농촌, 탄광 지역에서의 활동을 넓혀왔다. 인천, 서울, 강원도, 전라도, 대구, 경북 등지의 본당에 파견된 회원들은 본당사도직 또한 지역사회에 보다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역을 중점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4월 7일, 이진아 기자]

 

 

[영성의 향기를 따라서]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의 종신서원식 장면.

 

 

사도직 활동

 

1954년 한국에 진출해 교육, 병원사업을 펼쳐왔던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의 사도직은 크게 해외선교, 행려자, 무의탁 노인복지, 근로.여성복지, 지역민들을 위한 종합복지, 도시빈민.농촌.탄광지역민들을 위한 복지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수도회는 지난 91년부터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 내에 「정하상 바오로의 집」을 시작으로 천호동본당 근처의 「강동 프란치스꼬의 집」, 안동의 「요셉의 집」 등을 운영, 행려자들과 노인들에게 점심을 제공해오고 있다. 또한 수도회는 사회의 관심 밖에 머물러 있던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지난 92년부터 경기도 광명시에 「글라라의 집」을 마련,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모시고 있다. 수도회는 작은형제회가 운영하는 프란치스꼬 요양원과 산청 성심원에도 수녀들을 파견하고 있다.

 

여성 및 근로자들을 위한 복지에도 투신해온 수도회는 서울 구로공단 내 위치해 지역사회의 필요에 부응하고자, 지난 77년 수도회 설립 100주년을 맞아 공단 여성 근로자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를 설립했다. 이에 따라 근로자들의 숙식은 물론 영어회화, 성서공부, 풍물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그들의 지적욕구를 충족시켜줬다. 또한 사회악으로 만들어진 매매춘 여성들을 보살피기 위해 천호동 윤락지대에 「소냐의 집」을 마련해 그들의 결혼, 취업 등을 알선하며 사회복귀를 돕고 있다. 이와 함께 가출청소녀들의 단기보호소 「희망의 샘」 쉼자리도 함께 운영하고 있으며, 어려운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했던 이들을 위해 「마리스타 야간학교」를 통해 학업의 장을 마련하고 있다.

 

지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다양한 복지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는 수도회는 지난 96년부터 부산교구 위탁으로 부산 당감 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복지관에서는 가정, 아동, 청소년, 장애인, 지역복지 전반에 걸친 업무를 관장하고 있으며, 무료진료실과 생활보호 대상자 및 영세민을 대상으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점심식사를 제공해주는 무료 급식소, 법률 상담소를 마련하고 있다.

 

지난 80년대부터 도시빈민들과 함께해 온 수도회는 주거문제 개선을 위해 지역민과 연대해 정책적인 일을 진행하는 한편 맞벌이 부부를 위해 탁아소, 공부방, 실직자들을 위한 「평화의 집」 등을 운영해왔다.

 

이농현상이 급증하는 농촌을 위해 80년대 중반부터 농촌 공소 사도직을 시작해온 수녀회는 경남 거창, 강원도 정선, 평창, 전라도 해남 등지에서 매년 실시되면서 큰 호응을 얻자 구체적인 농촌 사도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껴왔다. 그리하여 수도회는 경북 상주 화령본당 관할 공소에 공동체를 설립, 농번기에는 농민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신자 재교육에 전념하며 비신자들을 위해 한글교실과 노인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80년대 말부터 탄광지역 폐광이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가정파괴현상이 급증하자 수도회는 지역사회에 실질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왔다.

 

가장 소외된 곳에서 힘없는 이들과 함께 복음화를 이뤄가는 수도회이고 보면 해외선교 사도직은 빼놓을 수 없는 사도직이다. 지난 78년 수도회 관구 승격 이후 해외선교에 힘쓰고 있는 이들은 현재 페루, 쿠바, 케냐, 리비아 등지에 30여명의 수도자들을 파견하고 있다.

 

온 세상 누구에게든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않은 곳, 교회가 세워지지 않은 곳, 그 가운데서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 복음의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의 수도사명은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02년 4월 21일, 이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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