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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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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 구세주 강생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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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8

구세주 강생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며

 

 

1. 사람은 기념하기를 좋아하는 존재이다. 기념이 없이는 오늘의 자신도 바로 알 수 없고 앞으로 갈 길도 잘 안 보인다. 나라가 서거나 도시가 세워진 때에서 생일이나 혼인일에 이르기까지 민족이나 공동체나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을 주기적으로 기념한다. 첫돌이나 환갑을 크게 지내기도 하고, 50주년이면 금혼식이나 금경축을 지낸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경우에는 서품일과 서원일을 기념하는 관행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7년마다 안식년을 지냈고, 안식년이 일곱 번 돌아오게 되는 50년째에는 <희년>이라고 이름붙인 큰 축제를 성대하게 지냈다.

 

2. 금혼식이나 금경축을 맞으면 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우선 배우자에게 한 약속이나 하느님과 맺은 서약을 떠올리고, 지나온 세월 동안 배우자나 하느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은혜에 감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에 제대로 보답하지 못하고 신의를 저버린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 것이다. 그 다음에는 여생을 더욱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기로 다짐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희년에도 이런 요소들이 다 들어있을 뿐 아니라 더욱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있다.

 

 

희년의 유래

 

3. 희년은 히브리말로 <요벨>이라고 하는데, <숫양>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희년을 선포할 때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을 사용했기 때문에 희년을 숫양이라고 부른 것 같다. 레위기 25장에 희년의 유래가 잘 나와있다. 이스라엘은 희년에 앞서 안식년을 지켜야 했다. 안식년 제도는 밭과 포도원을 일곱 해째에 놀려 저절로 자란 곡식과 포도를 남종과 여종과 품팔이꾼, 그리고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머무르는 거류민의 양식으로 내주게 하는, 자연과 남을 아끼고 살리는 해, 오늘의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인도주의에 따른 제도였다. 희년은 이 안식년을 일곱 번 거듭하고 난 다음에 찾아온다. 이 마흔아홉 해 일곱째 달 열흘날 속죄일에 나팔을 불어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선포하였다(레위 25,8-10).

 

4. 이 해가 왜 사십구년이 아니라 오십년이 되는가? 바빌론인들은 봄이 시작되는 니산달(우리네 음력 3월경)을 한 해의 시작으로 보았으나, 히브리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한 해의 시작은 수확이 끝나는 일곱째 달이었다. 이 일곱째 달은 바빌론의 티쉬리달과 같고 우리 식으로 치자면 음력 9월경이다. 따라서 사십구년 일곱째 달은 오십년의 새해가 된다.

 

5. 희년에는 안식년처럼 밭에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어 소출을 거둘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풀려나고 그 이전 50년 동안 가난 등의 이유 때문에 팔린 땅이 제 주인에게 다시 돌아간다. 희년은 안식년 바로 다음에 오기 때문에 연이어 이태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소출을 얻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이를 미리 내다보시고 마지막 여섯째 해에 안식년과 그 이듬해인 희년 몫까지 포함하여 소출을 세 배로 늘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레위 25,20-22).

 

6. 희년은 본래 일종의 경제사회 제도로서 이스라엘 친족 구조의 재산과 인명을 보호할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이스라엘의 친족 구조를 보면 부족과 씨족과 가족으로 이루어졌다. 부족은 공동 조상을 모시는 씨족들의 집합체이고, 씨족은 친·인척의 여러 가족들이 모여 이룬다. 가족은 한 사람의 가장이 거느리는 이스라엘 사회의 기초 집단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족은 단순히 남편과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로만 이루어진 오늘의 핵가족을 뜻하지 않고, 이삼대가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는 가정 안에 한데 모여 사는 대가족을 뜻한다. 대가족 안에는 집안의 종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의지할 데 없는 독신 친척들이나 소박맞고 돌아온 딸들도 포함된다. 희년 제도가 주목하는 대상은 씨족과 가족이다. 안식년 제도가 땅을 쉬게 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구제하기 위하여 마련된 제도라면, 희년은 씨족과 가족을 보호하는 데 힘쓴다.

 

7. 에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히브리인들은 약속된 땅에 들어오자 이곳의 토지를 씨족의 숫자와 수요에 따라 부족들에게 분배하였고, 씨족 안에서 다시 가족 수와 그 수요에 따라 가장들에게 분배하였다. 토지 분배의 원칙은 공정과 처분불가였다. 이 원칙은 가나안의 토지 제도와 전혀 다르다. 그곳에서는 토지의 주인이 도시국가의 임금들이나 귀족들이었고, 백성은 도지를 받아 농사짓는 소작인에 불과하였다. 이스라엘에서는 모든 씨족과 가장에게 그 크기와 필요에 따라 토지를 공정하게 분배하였고(민수 26,53-56; 여호 13-21), 이렇게 분배된 땅은 아무에게도 팔 수 없었다. 빚 때문에 또는 생계 유지가 어려워서 땅을 처분해야 할 경우가 생기면, 가까운 친족이 나서서 그 땅을 사준다.

 

8. 그러나 본래의 땅 주인에게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밭을 사준 친족은 그동안 자신이 이 밭에서 얻은 소출 값을 뺀 나머지 금액을 받고 그 밭을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이때 땅을 사고 파는 값은 다음 희년까지 남은 햇수의 소출 값으로 환산한다. 남은 햇수가 많으면 땅값은 그만큼 비싸고, 햇수가 적으면 땅값은 그만큼 싸진다(레위 25,16). 결국 사고 파는 대상은 땅 자체가 아니라, 해마다 땅에서 거두는 소출이다. 희년이 되면 매매 계약의 효력은 정지되고 땅은 본래의 임자에게 되돌아간다. 그러므로 친척이 땅을 잠시 맡아두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한번 분배된 땅은 가족이나 씨족의 범위 안에만 머물렀다. 나봇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포도밭을 아합에게 내주기를 거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1열왕 21).

 

9. 땅과 사람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특히 땅에서 나오는 소출에 삶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농부들에게는 땅이 곧 생명이다. 땅이 다른 부족에게 넘어가면 그 자신도 그 땅을 다시 얻게 될 희망으로 그 부족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이 땅이 씨족과 가족에 속해 있는 한, 그는 언젠가는 그것을 되찾거나 되돌려 받으리라는 희망 때문에 친족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농가도 땅과 같이 취급된다.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도시의 주택은 한 해까지만 되살 권리가 인정되었지만, 토지와 더불어 생계의 터전인 농부의 집은 언제나 되살 권리가 인정되고 희년이 되면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레위 25,29-31). 토지와 집이 간접으로 인간의 생명과 연결된다면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나가는 상황은 직접으로 인간의 생명에 저촉된다. 씨족이나 가족의 구성원 가운데 누군가 빚 때문에 종으로 팔리게 되면, 가까운 친족 중에 히브리말로 <고엘>이라고 부르는 후견인이 나서서 그의 몸값을 지불하고 그를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그가 계속 종살이를 해야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그를 맡은 주인은 그의 빚을 삭쳐 주고 무조건 그를 풀어주어 자유민이 되도록 해야 한다.

 

 

희년의 근거

 

땅은 하느님의 것

 

10.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께서는 땅과 사람을 보호하고자 마련하신 희년 규정에 두 가지 근거를 제시하신다. 먼저 땅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요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사는 땅이 하느님의 소유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있었고(출애 15,13.17), 예언서들과 시편과 그 밖의 이스라엘 경신례 전승 안에 되풀이되어 나온다. 하느님께서는 이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11. 곧,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정당한 상속자가 되고 가나안 땅은 상속의 내용이 되었다.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스라엘의 성조들을 선택하시는 과정에서 핵심을 이룬다. 이 약속된 땅은 출애굽 사건의 중요한 목표이기도 한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분에게 속한 땅이지만 그분께서 상속으로 넘겨주신 땅에서, 그분을 마음껏 섬길 수 있다는 것은 남의 땅 에집트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 노예들에게는 더없는 축복이요 기쁨이요 구원이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요 거류민"일 따름이다. 약속의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 입장에서 본다면 거류민은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인들과 함께 거주는 하되 이스라엘 종족이 아닌 백성을 말한다. 이들은 땅을 빼앗긴 가나안족의 후예들이거나 이주민들이다. 그들은 땅이 없기 때문에 고용인들 밑에서 품을 팔아 생존한다. 이스라엘 가장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리면 고용된 자들은 보호와 안정을 보장받는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의 위치가 위태롭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율법은 그들의 취약한 지위를 특별히 보호한다(출애 20,20). 그런데 이스라엘인들 자신 또한 하느님 앞에서는 이런 거류민들의 처지와 같다. 그들은 자기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 땅의 임자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겨레의 임자는 하느님

 

12. 사람을 보호하려는 희년의 두 번째 근거는 출애굽 사건과 관련된다. "그들은 내가 에집트 땅에서 이끌어낸 나의 종들이니, 종이 팔리듯 팔려서는 안된다"(레위 25,42.55; 출애 20,2 참조). 이 25장에는 출애굽 사건이 세 번이나 언급된다(38.42.55절). 바로 그 다음 26장에도 두 번이나 나온다(13.45절).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자신을 위해서 에집트에서 빼내셨다. 에집트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된 이들은 이제 하느님 자신의 종들이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제 동료 이스라엘인을 자신의 개인적 소유로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비싼 값으로 사서 당신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종들>은 서로를 노예로 삼아서는 안된다(25,39.42).

 

희년의 실천

 

13. 희년은 한 세기에 두 번 있는 거국적 사건이다. 그러나 과연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 희년이 실제로 실천되었는가? 구약성서에서 가까운 친족이 빚으로 넘어갈 땅이나(예레 32) 의지할 데 없는 과부를 구제한(룻 4) 예는 있지만, 국가적으로 희년을 실천한 구체적 증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희년은, 동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을 반대하여 후대의 예언자들이나 사제들이 만들어낸 이상의 반영인가? 희년과 관련하여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축제를 실천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정 아래에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임금들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왕족과 귀족들과 소수 특권층이 일반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이 너무 폭넓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희년을 선포하여 이를 한꺼번에 바로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정제도 이전에는 희년을 실천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구체적 실천의 고증을 찾기 어렵다고 해서 아예 없었다고 단정할 일은 아니다.

 

14. 희년에 대한 암시와 희년의 정신은 예언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시드키야 임금 시절, 예루살렘 주민들은 나중에 다시 옛 악습으로 돌아갔지만, 안식년에 히브리인 남녀 종들을 풀어준 적이 있었다(예레 34). "너희가 올해에는 떨어진 낟알에서 난 곡식을 먹고 내년에는 뿌리지 않고 저절로 난 곡식을 먹으리라."는 이사야서 37장 30절의 말씀은 희년에 대한 분명한 암시이다. 특히 이사야서 58장과 61장의 내용은 희년의 정신과 잘 들어맞는다. 이 두 장의 메시지는 나중에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예수님의 첫 설교의 주제가 된다. 58장은 사회정의의 실천이 빠진 경신례를 지탄하고(1-5절), 억눌린 자들의 해방을 요구하며(6절), 친족에 대한 의무를 강조한다(7절). 이 58장의 내용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단식에 대한 가르침이다. 레위기에 따르면 희년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단식해야 하는 속죄일에 선포되었다. 58장에서 예언자는 아마도 단식하러 회당에 모인 군중을 향해 서서 이 설교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언자는,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자들의 권리를 찾아주지 않으면서 하는 형식적 단식을 꾸짖고,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참다운 회개의 단식이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자비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61장에서는 주님께 기름부음 받은 이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로잡힌 이들에게 해방을 알리며(1절),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한다(2절).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한다는 2절의 내용은 희년에 대한 뚜렷한 암시라 할 수 있다.

 

15. 이사야서는 희년의 두 가지 중요한 개념을 부각시킨다. 자유를 되찾아 주는 해방과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회복이 그것이다. 이사야서 35장의 저자는 해방과 회복의 이 두 개념을 자연의 아름다운 변형을 묘사하는 가운데 행복한 미래의 전망에 연결시킨다. 이사야서에서 이 미래의 전망은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질서 회복을 뜻하는 완세적(完世的, 종말론적) 차원으로 이어진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65,17).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65,25). 그리하여 이사야서에서 희년의 암시는 현재의 윤리적 실천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완세적 표상을 끌어들인다.

 

예수님의 희년 선포

 

16. 희년의 개념과 메시지는 예수님의 나자렛 삶과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수께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개념 안에는 희년의 메시지 전체가 수렴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전도활동 안에서 완세적 하느님 나라가 동터 오고 있다고 선언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나자렛 첫 설교 장면(루가 4,16-30)은 하느님 나라와 희년이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레위기의 희년 개념에 강한 영향을 받은 이사야서 61장과 58장을 인용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데 스스로 바치실 공생활 전체의 청사진을 제시하신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여기서 주목할 낱말은 "해방"과 "자유"이다. 이들은 우리말에서는 두 가지 다른 낱말로 옮겼으나, 그리스말에서는 <풀어줌>이라는 뜻의 <아페시스>라는 한 낱말로 되어있다. 희년의 기본 개념인 이 <풀어줌>은 신약성서에서 빚의 탕감과 죄의 용서 둘 다를 가리킨다. 이 희년의 개념과 메시지는 예수님의 나자렛 설교뿐 아니라 주요 가르침과 담화, 병자를 낫게 하고 악령들린 자들을 자유롭게 풀어준 은혜로운 행적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비유에 나타난다. 몇 가지 구체적 예를 든다면, 참 행복 선언(마태 5,3-12; 루가 6,20-23), 감옥에 갇힌 세례자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마태 11,2-6; 루가 7,18-23), 큰 잔치의 비유(루가 14,12-24), 죄의 용서 이야기와 빚 탕감에 관한 가르침(마태 18,21-35; 루가 7,36-50) 등이다. 하느님이 그 임자이신 사람과 땅을 풀어주어 살리라는 안식일의 본 뜻에 대한 예수님의 거듭된 강조도 모두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출애 23,12; 신명 5,12-15; 마르 2,27).

 

17.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그처럼 증언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가 그 증언의 내용이셨다. 이웃을 풀어주고 그 소유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사랑으로 다 내어주는 것을 당신 삶과 죽음의 의의로 삼으셨던 것이다.

 

18. 한마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희년은 하느님 나라의 구체적 모형이나 표상을 마련해 주고, 희년의 실현은 그분 사명의 내용을 이룬다. 하느님 나라와 희년의 이러한 결합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해 들어오신다는 종말론적 전망과, 하느님의 은혜로운 개입에 인간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요구를 제시한다. 사랑의 계명의 이 요구를 제대로 실천한 초대교회의 모습이 사도행전(4,32-34)에 잘 그려져 있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희년의 풍요한 뜻

 

19. 레위기에서 출발한 희년의 개념과 메시지는 예언서 전승을 거쳐 예수님의 가르침에 이어지면서 그리스도교의 핵심 사상으로 자리잡는다. 희년의 풍요로운 뜻은 이를 이루는 주요 요소들을 간추려보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 희년은 인간을 당신 자녀로 부르시어 강복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 에집트 종살이에서 해방하여 당신 소유인 가나안 복지를 주신 하느님께 대한 기념과 감사의 해이다.

 

- 그처럼 은혜로이 상속받은 땅은 주님의 것이니, 백성은 그분의 자녀답게 토지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도리이다.

 

- 더욱이 그 백성은 하느님께서 비싼 값으로 속량하신 당신 종인 만큼, 아무도 빚 때문에 동족을 종으로 삼을 수 없고 서로 생명의 존중을 의무로 삼아야 한다.

 

- 인간에게 삶의 터전이 되어주고 소출로 양식을 내어주는 땅 또한 엿새의 천지창조 끝에 이렛날은 쉬신 하느님의 안식일 법에 따라 칠년마다 한 해씩 놀림으로써 자연보호를 해야 한다.

 

- 그렇게 안식년이나 희년에 저절로 자란 것은, 주님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에서, 남녀 종들과 품꾼과 소외당한 거류민과 외국인 등의 몫으로 돌아간다.

 

- 다만, 이처럼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은혜에 바르게 응답하기 위하여 동족의 소유와 생명을 존중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제대로 보살펴주려면, 오만과 이기심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 잡는 회심이 꼭 필요하다. 속죄일에 희년을 선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 속죄일은 죄를 벗는 날이다. 희년과 속죄일의 결합은 빚의 탕감과 죄의 용서를 동시에 드러낸다. 자비 지극한 구원의 자유, 갚을 수 없는 빚과 죄를 <풀어줌>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알리신 예수께서 나자렛에서 하신 첫 설교의 핵심이다.

 

- 그렇기에 희년(禧年)은 무엇보다 기쁨의 축제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떠올리고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일도, 땅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고 동족을 종살이에서 풀어주는 일도, 힘겨운 노동에서 인간과 자연을 풀어주고 가난한 이들에게 그 혜택을 돌려주는 일도, 빚을 탕감하고 죄를 벗는 일도 모두 다 새 삶을 맛보는 신명나는 일이다. 그래서 행복을 뜻하는 <복 희(禧)>자 희년인 것이다.

 

- 이사야가 말한 이 복된 "주님의 은총의 해"를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은 온 인류에게 <풀어줌>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평소 하느님의 의(義)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는 백성에게 희년의 참뜻을 일깨우고 그 실천을 촉구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서 안에서도 새로운 창조 질서를 지향하는 미래의 희망으로 발전한 희년의 뜻을, 예수께서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어야 할 하느님 나라의 개념 안에 수렴하신다. 새로운 창조 질서에 대한 하느님의 결정적 의지(이사야서)와 인간의 윤리적 실천(희년)이 하나로 이어지면서, 하느님 나라의 완세적(종말론적) 전망은 한갓 먼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의 구체적 삶 안에서 실현되어야 할 하느님 자녀의 소명으로 자리잡게 된다.

 

20. 이스라엘에서 희년은 한 세기에 단 두 번 지내는 민족적 종교 축제였지만 희년의 참뜻과 모든 윤리적 요구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실천해야 할 도리였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감사하고 회개하며 나눔과 섬김으로써 내일을 이루어나가는 하느님 겨레의 복되고 기쁜 삶을 의미한다.

 

다가오는 2000년

 

21. 이제 인류는 바야흐로 2000년이라는 대희년을 맞게 된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신(갈라 4,4-5) "주님의 은총의 해"가 시작된 지(정확한 연대 문제는 논외로 하고) 2000년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 되기를 지향하는 모든 희년들은 이 충만한 "때"를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사명과 관련된다(「제삼천년기」, 11항). "사실, 육신을 취하신 말씀(요한 1,14)의 신비를 떠나서는 인간의 신비가 참되게 밝혀지지 않는다.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리시는, 바로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고 인간의 지고한 소명을 그에게 밝혀주신다"(사목헌장, 22항).

 

22. 인류가 예로부터 여러 종교와 구도의 길을 통해 그토록 염원해 온 구원을 몸소 가져다 주시고자 스스로를 낮추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지 2000년, 이제는 전세계가 이른바 서기(西紀)를 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세주 강생이라는 역사의 이 엄청난 중심 사건이 일어난 지 2000년이 되어가는 오늘, 인류사는 과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세계는 어디에 와있나

 

23. 고마움과 아울러 책임감을 가지고 흐른 세월을 되돌아볼 때, 그것은 하느님의 가이없는 은총을 입은 인간의 놀라운 예지와 사랑과 창작력의 신장과 더불어 그의 비극적 미명과 경악할 죄악으로 뒤얽힌 빛과 어둠의 역사, 비참과 희망의 미완 역사로 드러난다. 바로 우리 세대가 이루어왔고 지금 살고 있는 20세기는 또 어떠한가? 온갖 분야에서 꿈도 못 꾸던 눈부신 발전과 동시에 일찍이 없었던 대규모 침략과 수탈, 무신론의 체제화와 가치 붕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끊임없는 국지전, 미증유의 민족 말살과 종교 분쟁, 구조적 불의와 인권 유린, 배금주의와 자연 파괴 등, 실로 찬란하면서도 참담한 한 세기였다.

 

24. 저물어가는 20세기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고 전한다는 교회 공동체는 그러면 그동안 무엇을 해왔으며, 이제 제삼천년기에 접어들면서는 진정 어떻게 변신함으로써 온 누리에 희년의 참뜻을 알리고, 어떻게 새 복음화의 신기원을 마련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25. 격변의 20세기의 소용돌이 안에서 우리 겨레는 일제치하에 놓이는 국치를 비롯, 참혹한 태평양 전쟁을 거쳐 광복과 분단을 함께 맞은 이래 6.25 동란의 민족 비극을 치르고 무려 반세기 동안이나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어오면서, 우리 세기의 명암에 함께 휘말려 있다. 초고속 경제성장만을 내세운 산업화가 빚어낸 사회의 황폐화와 환경 오염, 약육강식으로 인한 부의 편중과 계층간의 갈등, 균형잃은 도시화가 초래한 농어민의 몰락과 이향과 가족의 와해, 무너져 가는 인간성과 생명 경시에까지 이르는 약자의 소외, 극도의 이기주의와 향락주의가 빚은 도덕성 상실,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냉대와 착취, 곳곳에 늘어가는 난민의 절망, 부정한 권력과 불의가 낳은 불신과 불화 등 우리 모두 몸과 마음의 집을 잃은 실향민이 되어가는 것 같아 두렵다. 반면, 어둠이 짙을수록 작은 빛도 더욱 밝게 빛나듯, 희년의 뜻을 거스르는 현실이 극한에 달할수록 의롭고 선한 마음이, 참된 행복에 대한 갈망이 우리 안에 그만큼 더 일게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구원이 거기 있다.

 

26. 바로 이런 오늘의 우리 현실은 특히 신앙인들에게 오히려 희년의 깊은 뜻을 더욱 뼈저리게 깨닫고 자신부터 회개하여 그 안에서 모두를 위해 참 생명의 길을 구체적으로 찾아 나서는 더없이 좋은 <삶의 자리>가 된다. 우리는 희년의 절실한 요구에 저촉되는 현실을 겸허하게 의식하고, 또 그럴수록 과감히 바로잡고, 더 나아가 희년이 지향하는 하느님 자녀다운 삶의 미래를 향하여 실천적으로 꿋꿋하게 거듭나는 은혜로운 전기를, 교회의 새봄을, 2000년 대희년을 기하여 맞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어라"(히브 13,8).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대희년 길잡이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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