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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희년] 희년의 그리스도 신앙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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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3 ㅣ No.49

희년의 그리스도 신앙적 의미

 

 

1. 이스라엘 백성과 희년 : 땅과 사람은 하느님의 것

 

구약성서 레위기 25장에 특히 잘 나타나 있는 희년의 취지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과 그들에게 주신 <땅>이 본디 하느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이 실제 삶을 통해 이 믿음을 굳게 지켜가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에집트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자유를 누리며 그분께서 정해 주신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처지를 잘 보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 없고, 그 가난 때문에 사람이 본래의 존엄성을 잃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은 사회정의를 세우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느님께서 사람과 땅의 주인이심을 믿어 고백하는 신앙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복지를 차지한 다음, 맨 먼저 한 일은 각 부족별, 씨족별 그리고 가족별로 땅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그 백성 가운데에는 실제로 가난한 이가 없었고, 따라서 남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도 없었다. 모두 자기 땅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해서 먹고 사는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재산이고 사람이고 간에 하느님만이 그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모두 분명히 의식하고, 거기에 충실히 머무를 때에만 유지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인 사람들"(창세 8,21)이 모여서 얼마 동안 세월이 흐르자, 이스라엘 사회의 이 원초적 공평과 정의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타고난 이기심으로 사람들은 남의 것을 탐내는 경향이 생겼고, 그 밖에도 가족 가운데 경제활동의 주역을 할 사람이 병들거나 죽음으로써, 천재지변으로, 한 가족이 몰락하고 가난하게 되어, 부득이 땅을 팔고, 심하면 식구들마저 남의 집에 종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어떤 이스라엘인이 본디 자기 것이었던 땅을 잃었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제 몸마저 남의 집에 종으로 팔려갔을 때, 그의 친척 가운데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이가 있으면, 그 사람이 나서서 그의 재산이나 몸을 넘겨받은 사람에게서 <되사서>, 몰락한 친척을 궁지에서 구해 줄 수 있었다. 그럴 때, 남의 손에 넘어갔던 재산이나 사람을 <되사서> 그 친척을 구해 주는 사람을 가리켜 <고엘> 곧 <구속자(救贖者)> 또는 <속량자(贖良者)>라고 했는데, <되사주는 이>라는 뜻이다. 친척 가운데 이런 고마운 사람이 마침 있으면 다행이지만, 이런 방법으로 원초의 공평과 자유가 지켜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차츰 사회에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사람들 사이에도 자유인과 종이라는 신분계급이 점점 더 뚜렷하게 되었다. 땅도 사람도 하느님만이 그 주인이라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부정되고, 땅을 더 많이 차지한 사람이 그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이 없어서 자기 집에 몸붙여 살게 된 사람들에 대해서도 실제적인 주인 행세를 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경향을 그대로 두면 부자는 점점 더 많은 재산을 차지하게 되고 가난한 이들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어 종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더구나 가족의 몰락에 직접 관련이 있던 세대가 죽고 난 다음, 그 후손까지도 단순히 그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 가난과 종의 처지를 물려받아 거기서 벗어날 희망이 없게 될 것이었다.

 

이런 정황 속에서, 땅과 사람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는 역사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이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고, 특히 인간으로서 상실한 영광과 권리를 회복함으로써, 본래의 아름답고 존엄한 참모습을 다시 지닐 수 있도록 하시려고 온갖 방법을 다 쓰셨다. 하느님께서 몸소 가난한 이들의 <고엘> 곧 구속자가 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희년 제도의 설정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의 하나이다. 어떤 사정으로 가문이 몰락하고 남의 집에 종살이를 하게 되었든지 간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이 제도에 의해, 50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희년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잃었던 재산을 되찾고 자유를 회복했던 것이다. 그 결과 삶은 지겹고 고통스런 시기를 벗어나 <기쁨>과 환희에 차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희년의 이상은 흔히 글자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장차 <메시아> 곧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실현될 꿈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신 속에 줄기차게 살아있었다. 그들은 온갖 시련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 꿈을 간직하고, 거기서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곤 하였다. 그런데 로마 제국의 침략을 받아 온 나라가 땅은 남의 것이 되고, 사람도 주권을 잃고, 말하자면 로마 황제의 노예로 전락한 처지가 되자,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 민족을 그 곤경에서 구해 주실 메시아, 민족의 <고엘>을 기다리는 마음이 한결 더 절박해졌다.

 

 

2. 예수님의 나자렛 선언 : 그분께서는 과연 메시아이신가?

 

그런데 어느날 나자렛 회당에 모습을 나타내신 예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8-19).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민족적 비원이 이루어질 때가 바야흐로 다가왔음을 널리 알리는 선언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이 말씀 속에 들어있는 표현들을 뜯어볼 때 사람들의 그런 반응은 무리가 아니었다.

 

이를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자. 이사야 예언서(58,6: 칠십인역 60,1-2)를 인용하셔서 예수께서 당신의 사명을 선언하시는 이 대목에서, 먼저, 주님께서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을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게 성령을 기름처럼 흠뻑 부어주심으로써 <메시아>로 삼아 가난한 이들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음을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은총의 해>라는 표현은 사실상 희년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명백하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는 오셨고 희년은 당도한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제 온갖 모양으로 가난의 멍에를 쓰고 살던 이들이 그것을 벗어 던질 수 있는 때가 마침내 다가왔다. 마치 그 옛날 가문이 몰락하여 재산을 잃고 몸마저 남의 집에서 종살이하는 처지로 떨어져 살던 사람에게 힘겨운 50년의 세월이 흐르고 애타게 기다리던 희년이 돌아와서, 잃었던 땅과 자유를 도로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처럼, 이제는 온갖 형태로 자신의 참모습과 존엄성을 잃고 묶여 살았던 사람들이 풀려날 때가 마침내 돌아왔다. 한마디로, 가난한 이들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희년>이 온 것이다.

 

 

3. 엇갈린 평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서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사람들 사이에 펼쳐 보이신 갖가지 <활동>과 그 하시는 품을 지켜보면서도, 어떤 이들은 그분께서 메시아이심에 틀림없다고 믿었다. 그분께서는 온갖 질병에 매여있는 이들을 치유해 주시고, 사회적 편견과 멸시의 사슬에 묶여있던 이들이 거기서 풀려나 떳떳한 인간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셨으며, 죄악의 오랏줄에 묶여있던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셨다. 그렇게 해서 이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안겨주셨다.

 

그들이 보기에, 기쁨을 주시는 그분의 솜씨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고장나고 손상되었던 생명들이 그분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모두 되살아났다.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껑충껑충 뛰었으며, 죽었던 사람이 소생했다. 세리가 사도로 변하고 창녀가 성녀로 바뀌었다. 폭도가 양민으로 변하고 강도가 천국의 시민이 되었다. 침략국의 앞잡이로서 반민족적 부정부패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던 인물이 한꺼번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지난날의 잘못을 네 배로 기워갚는 선량한 시민이 되었다. 틀어지고 엇나갔던 것들이 그분의 손길에 닿자마자 모두 제 모습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죽을 병에 걸려 마지막 숨이 넘어가기 직전에 용한 의사의 치료를 받고 씻은 듯이 건강을 회복한 환자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메시아의 풍모를 찾아냈다고 믿는 사람들과는 정반대 편에 서서, 그가 메시아일 수는 결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예수라는 인물이 과연 메시아인가, 아닌가? 그가 메시아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네 복음서 어디에서나 이 물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탕을 이루면서, 사람들에게 <그렇다>는 쪽이나 <아니다>는 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내몰고 있다.

 

예수님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내리는 이 상반되는 평가와 태도는 십자가에서 그 절정에 도달했다. <아니다>를 선택한 사람들은 예수께서 힘없이 십자가형을 받아 죽음을 당하시는 모습은 그분께서 메시아가 아님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보았다. 그런가 하면, <그렇다>를 선택한 사람들은 십자가야말로 예수께서 참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믿기 시작하였다. 갓 태어난 예수님을 가리키며 그분께서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지"(루가 2,34)가 되리라던 예언자 시므온의 말은 십자가에서 가장 분명히 입증되었다. 그런데 그분을 결국 메시아로 믿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도, 그 믿음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성령을 받고서야 확실해졌다.

 

 

4. 땅은 남의 것이 되고 사람은 노예로 전락했는데

 

그만큼, 사람들이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깨닫고 믿기까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이 있었다. 사람들이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의 처지에서 풀려나 <자유>를 누리며 <기쁘게> 사는 것이 메시아가 선포할 희년에 얽힌 사람들의 본래 기대였음을 기억할 때,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가 그렇게나 어려웠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생각해 보자. 당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메시아에게 걸고 있던 이런 기대와 희망 사항들은 모두 손에 잡히고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다. 땅은 사람이 두 발을 그 위에 딛고 서서, 농사를 지으면 빵을 주고 양을 기르면 젖을 주어, 그가 실제로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 그런 땅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을 때 이를 되찾게 된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생명을 되찾는 셈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남에게 팔려 그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을 때, 누군가 강력한 사람이 들어서서 주인의 손에서 그를 빼내어 그에게 자유를 되돌려 준다면, 몸뚱이를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어지면서 주는 홀가분한 느낌이 뼛속까지 전달된다. 이처럼, 희년과 관련한 <땅>, <노예>, <자유>, <기쁨> 등은 모두 눈으로 확인하고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것들을 주시는 대신,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것들을 약속하신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주실 때조차, 그것은 당신께서 사람들에게 참으로 주고자 하시는 것을 넌지시 가리켜주는 표지일 뿐, 주고자 하시는 것 자체는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먹어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밀가루 빵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을 주러 오셨고, 몸뚱이를 묶고 있는 쇠사슬이 아니라 영혼을 옥죄고 있는 사슬을 풀어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세계에 갇혀 사는 인간들은 그런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밀가루 빵을 주실 때에는 그분께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 들던"(요한 6,15)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에 대해 말씀하시자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고 수군거리며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과연 그분의 말씀, 그분께서 사람들에게 해주고자 하시는 것, 그분께서 가져오신 <나라>는 인간에게 너무나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고등 수학이어서가 아니다. 그래서 어려웠다면 머리가 뛰어난 사람들만이라도 이해했을 것이다. 지능이 뛰어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넘쳐난다. 그런데 머리는 그것을 이해하는 데 별 의미가 없다. 몇 사람이 그 나라의 한 끝을 깨달았을 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루가 10,21).

 

그분께서 가져오신 나라를 보려면 누구나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새로 만들어지는 변화를 겪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런 근본적 변화를 <새로 난다>는 말로 표현하신다.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그래서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사람들을 실제로 새로 태어나게 해주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군중,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 친척들이 차례로 그분을 의심하여 떠나가고, 열두 제자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재목이었던 베드로마저 예수께서 십자가 형을 받아 죽음에 놓여지실 것이 확실해지면서 스승을 배반했다. 그분께서는 온 세상이 배척하거나 의심하는 가운데 죽음으로 이어지는 외로운 길을 혼자서 가셨다.

 

그런데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죽음에서 부활시켜 주심으로써 그분의 말씀과 하신 일이 옳았음을 확인해 주셨다. 그제서야 스승을 버리고 떠나갔던 제자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성령의 파견으로 제자들은 모든 것을 확실히 깨달았다. 메시아를 통해 잃었던 땅을 되찾고 노예의 처지를 벗어나 자유를 회복함으로써 삶의 기쁨을 맛보고 싶어했던 자기들의 소망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그 뿌리에서부터 넘치도록 채워졌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잃었던 땅을 되찾고 싶어한 것은 결국 무엇 때문이었던가? 그것은 땅이 빵을 주기 때문이며, 빵을 찾는 것은 그것이 생명을 지탱시켜 주기 때문이다. 결국 땅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생명에 대한 욕망으로 귀결된다. 또 노예의 처지로 떨어졌던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사람을 묶어두는 일체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고 싶은 희망 때문이다. <생명>과 <자유>, 그리고 그것이 주는 <기쁨>, 이 세 가지는 희년에 메시아에게 걸고 있던 사람들의 기대를 대변하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죽음을 쳐 이기심으로써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어주셨고, 죄의 사슬에서 사람을 해방시키심으로써 그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셨으며, 그렇게 해서 사람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얻게 되었다. 결국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메시아이셨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홈페이지, 대희년 길잡이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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