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사제를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친 최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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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69

사제를 위해 목숨을 대신 바친 최인길

 

 

포청의 나졸들이 몰려온다는 놀랍고도 화급한 전갈을 받고 최인길(崔仁吉 마티아 1764-1795년) 회장은 몹시 난감했다. 마른하늘에 웬 날벼락인가! 황망한 가운데 신부님의 은신처가 얼른 떠오르지 않아 안절부절했다. 우선 믿을 수 있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에게 막무가내로 신부님을 부탁했다. 그러나 포졸의 추적으로 늦출 수 있어야 했다. 사제가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는 시간을 얻어야 한다. 그는 잠시 호홉을 멈추고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정조 18년 2월, 북경을 떠난 주문모 신부는 얼음이 얼기를 기다렸다. 그 해 12월 변문에 이르러 윤유일과 지황의 안내를 받은 그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깊은 밤에 압록강 얼음을 타고 외주관문을 넘었다.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12월만인 1795년 정월 서울에 도착한 주 신부는 사제를 기다리던 조선 교우들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처음으로 사제를 맞이한 우리 나라 교우들은 마치 천사를 맞은 것처럼 기뻐하며 즐거워하였다.

 

최인길 회장이 서울 북쪽에 마련한 집에 머물며 주문모 신부는 조선 교우들의 열의에 깊이 감동하여 쉬지 않고 조선말을 배웠다. 그해 주 신부는 부활성야 첫미사를 봉헌했고, 성체를 받아 모신 교우들은 감격에 겨워하였다. 이러한 흥분과 희열에 찬 교우들은 조심성을 소홀히 하였고, 그 틈에 배교자가 밀고를 했다. 배교자는 진사 한영익이었다. 몇 일전에 개심을 약속하고 찾아온 그는 신부를 만나 조선에 들어온 경로를 알아냈고, 이를 광암 이벽의 형이며 박해자인 병사 이격에게 밀고한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임금 정조는 그해 6월 27일 포도대장 조진규에게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을 은밀히 내렸다.

 

밀고자 한영익의 수상한 거동을 보고 그의 뒤를 살피던 열심한 한 교우가 형조에 내려진 체포령을 미리 정탐하였고 이 사실을 급히 알렸다. 최인길 회장은 몹시 난감해졌다.

 

일찍이 김범우의 집에서 가졌던 집회에서 한국교회 창립을 함께 하며 회장의 직무를 맡았던 그는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평신도만의 교회에서 사제의 필요성을 통절히 깨닭고 윤유일과 지황이 구만리길 북경으로부터 사제를 모셔올 때 그는 철저히 빈곤했던 당시의 어려움 속에서 사제를 모실 집과 경비를 마련하느라 무진 애를 썼다. 그런데 목자를 맞이한 양떼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밀고를 당하다니….

 

최인길 회장은 고개를 들어 십자가를 우러러보았다. 순간 굳은 결의를 마음속 깊이 다졌다. 신부가 피신할 시간적 여유를 주고자 자신이 신부인 양 변장하기로 한 것이다. 옷을 바꾸어 입고 마치 주문모 신부인 것처럼 꾸민 최 회장은 신부를 체포하러 들이닥칠 포졸들을 기다렸다.

 

포교는 수하 포졸을 거느린 채 신부가 머물던 집을 에워싸고 동정을 살폈다. 그리고 중국 옷을 입은 사람이 유유히 앞뜰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중국인 신부가 있다는데 누구냐?"고 물었다. 최인길 회장은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듯 거닐기만 했다. 포교가 다가서서 다시 확인 할 때 역관이었던 회장은 유창한 중국말로 대답했다. 포교는 중국신부임에 틀림없으리라 생각하고 최인길 회장을 포청으로 압송했다.

 

사제를 대신해 최인길 회장이 잡힌 사실이 밝혀지자 화가 난 포청에서는 가혹하고 모진 매를 쳤다. 거듭된 심문과 참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는 끝내 사제의 행방을 숨겼고, 손바닥을 제외하고는 성한 곳이 없도록 비참한 상처를 입었다. 1795년 6월 최인길 회장은 피끓는 동지 윤유일 지황과 함께 사형언도를 받았다. 최인길 회장의 영웅적 인내와 침묵은 그 뒤 6년동안 주문모 신부의 사목을 가능케 한 밑바탕이 되었다.

 

[경향잡지, 1997년 5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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