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자신의 운명을 예측한 증거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71

자신의 운명을 예측한 증거자 이보현 프란치스코

 

 

조선시대 한양에 곧고 바른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동리 어린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며 스스로 훈장이 되었다. 어느 날 학동들이 훈장님께 여쭈었다. "훈창님, 훈창님께서는 서학도를 어떻게 보십니까?" 훈장이 답하길 "나는 아직 서학에 대해 특별히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첫째 이 땅에도 많은 종교들이 허다히 있는데 굳이 서양 종교를 믿는 것이 과연 옳은가 싶고, 둘째로는 이 나라의 백성은 모름지기 임금께 충성해야 하거늘 임금께서 금하는 종교를 굳이 믿는 일은 마땅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했다.

 

며칠 뒤, 당고개에서 서학도들을 처형한다는 소식을 들은 훈장은 '임금의 뜻을 거스른 자들의 최후를 내가 한번 봐야겠다' 하는 생각에 형장으로 나갔다.

 

깊은 사념에 잠긴 채 돌아오는 그는 학동들은 불러놓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서학에 대해 특별히 아는 바가 없다. 그러나 오늘 나는 서학도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마리 새도 죽음에 울부짖는 소리가 애처롭고 슬프다 하였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본 서학도들은 너무나도 평화롭다 못해 오히려 웃는 모습으로 죽어갔다. 어떻게 그토록 거룩하게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반드시 까닭이 있으리라. 이제 나는 그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서당문을 잠시 닫고 떠난다."

 

이 선비가 본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한국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죽음은 확실히 비범했다. 수많은 죽음 가운데 하나인 이보현 프란치스코의 죽음 또한 비범한 죽음이었다.

 

이보현(李步玄, 1768-1795)은 충청도 덕산고을 황보실(현재 당진군 길덕면)의 부유한 양갓집 자손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고집스럽고 꿋꿋한 면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보현은 마음이 비뚤어져 제멋대로 행동하며 망나니로 자랐다. 몹시 난폭하고 참을성 없이 욕정을 충족하는 그를 어느 누구도 억제시키지 못했다.

 

본능적인 욕구대로 살던 가련한 젊은이가 스물네 살이 되던 해였다. 그때 이보현은 열심한 신자이며 뒷날 황사영과 함께 순교한 황심(黃沁)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운 그는 세례성사를 받고 입교하였다.

 

교리를 배우고 천주교 신자가 된 짧은 시간 동안 프란치스코는 모근 사람이 놀랄 만큼 자기 변신을 했다. 그는 지난날 저지른 몹쓸 소행을 말끔히 고치고, 본성을 억제하며 단정하고도 조용하게 처신했다. 프란치스코의 변모된 모습에 이웃사람들은 감회하였다. 그는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려했지만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결혼해서 가장이 되었다.

 

그의 열심은 날로 더해졌고, 보속과 고행에 열중하였다. 때로는 고향을 떠나 산중에 들어가 나물만 먹고 지내며 하느님을 섬겼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금욕을 엄격히 실천했으며, 순교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는 방법이라고 마음을 거듭 다졌다.

 

마침내 진산사건이 일어나고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족과 동네 교우들을 격려하였다. 날마다 그는 예수 그리스토의 수난을 강론하고 신앙을 고백하며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교우들을 격려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사람들에게 술을 많이 담그라고 일렀다. "마지막 잔치를 차려서 온 동네 사람들을 대접하려는 것이니 빨리 해야 한다."

 

며칠 뒤 정말로 포졸들이 나타났다. 그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는 포졸들 앞에 나서며 말했다. "나는 천주교인일 뿐 아니라 당신들이 나를 잡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소." 그는 포졸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그런 뒤 이보현은 관장 앞으로 끌려가 심문당하였다. "네 선생은 누구이고 공범자는 누구이며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느냐?"고 관장이 묻자 이보현은 대답했다. "제 선생과 동료들은 고향에 있습니다. 책은 몇 권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만 모두가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사또께 바칠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일이기에 그 책을 내게 보일 수 없단 말이냐?" "그 책들은 만물의 대군이신 천주님께 대하여 말하는 것이기에 함부로 사또의 손에 맡길 수 없습니다." 관장은 매질하여 옷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이 사건을 통지 받은 감사는 이보현을 그의 출생지로 넘기라고 명했다. 그래서 이보현은 해미로 이송되었다. 해미의 영장은 "어찌하여 고약한 도(道)를 따름으로써 국왕이 금하시는 것을 하느냐?"고 심문하였다. 이보현 프란치스코는 "임금과 관장들이 알지 못하는 성교(聖敎)를 어찌하여 그렇게 모욕적으로 규정하십니까? 사람의 기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의 기원이 태초에 그들을 창조하신 천주님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대군대부이신 천주님을 공경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응답했다.

 

영장은 형리를 불러 갖가지 형틀을 준비시키며 거듭 말하였다. "모든 것을 숨김없이 고백하라." 이보현은 거절했다. "어디나 선생과 제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면 저처럼 다루실 테니 차라리 제가 죽을지라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한나절 동안 계속되는 형벌로 몇 하례나 까무러쳤지만 꿋꿋이 버티며 굴복하지 않았다. 상처투성이가 된 프란치스코는 큰 칼을 쓴 채 옥에 있으면서도 만족스런 표정으로 기뻐하였다. 늘 하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신비를 강설하며 함께 기도드리고 갇힌 사람들을 격려한 것이다.

 

두 번째 심문에서 영장은 무서운 형구들을 늘어놓고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피할 수 없으니 모든 것을 고백하고 천주를 배반하라." 그러자 이보현은 강하고 다부진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왜 그런 말을 또 하십니까? 신민(臣民)이 자기 임금을 배반하면 그에게 벌을 주십니까, 상을 주십니까? 사또께서는 임금의 녹을 받으시니 저를 법대로 다스리십시오."

 

그는 혹독하게 계속되는 심문과 형벌을 용감히 견디어냈다. 너무도 굳은 그의 의지에 관장도 탄복하였다. 마침내 이 프란치스코에게 장살형(매를 무수히 맞고 죽는 형벌)이라는 선고문이 내려졌다. 그는 이 무서운 선고문에 기쁘게 서명하여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다음날 그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기쁘게 먹고, 장터에 조리돌려졌다. 그리고 망나니들의 참혹한 매질이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는 1795년 음력 12월 15일이었다.

 

장하에서 처참한 상처로 숨진 그의 시신을 거둘 때 그의 얼굴은 싱싱하고 웃음을 띠고 있어 동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신비롭고도 평화로운 그의 미소를 보고 많은 이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은 증거자의 죽음을 보고 오히려 늘어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경향잡지, 1997년 8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



41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