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9일 (토)
(홍)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김진후(비오)와 1815년 을해박해 순교자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10-07 ㅣ No.1168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1) 김진후(비오)와 1815년 을해박해 순교자 I



한국교회사연구소(소장 김성태 신부)는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2 - 1814~1888년 순교자 58위와 증거자 최양업 신부'를 주제로 2013년도 하반기 공개대학을 개설했다. 9월 12일 서울 저동1가 평화빌딩 4층 강의실에서 김성태 신부 주례로 개강미사를 봉헌한 뒤 '순교의 대체 신심'을 주제로 한 김 신부의 특강을 듣는 것으로 막을 올렸다.
 
이어 9월 26일 방상근(석문 가롤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의 첫 강의를 시작으로 12월 5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모두 10강이 계속된다. 이에 하반기 공개대학 강의 내용을 요약 연재한다. 문의 : 02-756-1691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가문의 신앙에 대해선 맏아들 김종현이 이존창에게서 교리를 전해 듣고 형제들에게 전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덕산의 김종연('현'의 오자) 형제가 명례동에 거주하는 김 주부에게 배웠다"는 기록으로 미뤄 김종현이 1785년 이전에 김범우에게 천주교를 배웠음을 알 수 있다. 1785년이면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 1739~1814)의 나이 47세인데, 김진후는 세상의 영예, 곧 권세와 쾌락만을 갈망했기에 천주교 신앙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지방 군수 밑에서 작은 관직을 하나 얻자 자식의 권유를 강하게 물리쳤다. 그러다가 50세쯤 신앙을 갖게 되면서 모든 세상 영예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열심히 신자의 본분을 지켰다.
 
김진후가 처음으로 체포된 것은 1791년으로 체포되자마자 신앙을 고백했으나 풀려났다. 이후에도 너덧 차례 체포돼 홍주(현 홍성)와 청주, 공주로 끌려가 신문과 형벌을 받았는데도 역시 풀려났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른다.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체포돼 배교하고 유배됐으나 얼마 후 해배됐다. 이어 1805년 체포돼 해미로 압송돼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을 고백했으나 오랫동안 사형선고가 내려지지 않은 채 옥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옥중에서도 점잖고 품위 있는 처신으로 해미 관리나 옥리들에게서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드러내놓고 신자로서 본분을 지킬 수 있었다. 무려 10년이나 옥에 갇혀 있던 그는 마침내 1814년 12월 1일 76세의 나이로 옥사한다. 사망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진후의 순교에 이어 1815년 박해가 일어난다. 이에 앞서 1814년 전국에 심각한 기근이 든 데다 경상도의 경우 수재까지 겹쳐 어려움이 가중되자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배교자 전지수(혹은 전지순)의 탐욕이 박해의 빌미가 돼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일대에서 박해가 일어난다. 이것이 '을해박해'다.

박해는 1815년 부활 대축일에 청송 노래산에서 고성운(요셉, ?~1816)ㆍ성대(베드로, ?~1816) 형제 등 35명이 체포돼 경주진영으로 압송되면서 비롯됐다. 이 중 19명은 배교했고, 2명은 옥사했으며, 14명은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됐다. 같은 시기 진보 머루산에서 김시우(알렉시오, 1782~1815)를 비롯한 33명이 체포돼 안동진영으로 압송된다. 영양 우련밭과 곧은장에서도 김종한(안드레아, ?~1816), 김희성(프란치스코, 1765~1816) 등 6명이 체포돼 안동으로 갔다가 대구감영으로 이송된다. 그 결과 총 33명이 대구감영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년 5개월 뒤에야 처형이 결정된다. 그 사이에 33명이 옥사하거나 병사했다.
 
1816년에 사형이 집행된 사람은 고성운ㆍ성대 형제와 김종한, 김희성, 김화춘, 최성열, 이시임 등 7명이었다. 이로써 경상도와 전라도에 새로 생긴 많은 교우촌들이 파괴됐다.

충청도 면천 솔뫼 출신으로 김진후의 아들이자 김제준 성인의 삼촌,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한은 맏형 김종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고향에서 신앙생활이 자유롭지 못하자 영양 우련밭(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으로 이주, 17년간 숨어 지내다가 체포돼 1816년 12월 19일에 참수됐다. 같은 충청도 서산 출생인 김강이(시몬, ?~1815)는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했다가 진보 머루산(경북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으로 갔으나 을해박해 당시 체포돼 1815년 12월 5일 원주에서 옥사했다. 김희성은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의 아들로, 을해박해 때 영양 곧은장에서 체포돼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됐다.

또한 충청도 청양 출신 김시우는 1815년 5~6월께 굶주림과 형벌에 이질까지 겹쳐 옥사했고, 충청도 덕산 출신 이시임(안나, 1782~1816)은 4살짜리 아들이 품 안에서 옥사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다가 1816년 12월 19일 대구에서 참수됐다. [평화신문, 2013년 10월 6일, 방상근 석문 가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정리=오세택 기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년 하반기 공개대학 지상중계] '하느님의 종 125위의 삶과 신앙 II'


(21815년 을해박해 순교자 II



1815년 을해박해는 △ 지역적으로 경상도에 한정된 국지적 박해였고 △ 박해 원인이 정치적 이유보다는 기근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 따른 배교자의 밀고에서 기인했으며 △ 박해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을해박해 순교자 가운데 김윤덕(아가타 막달레나, ?~1815)은 경상도 상주 은재(경북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 태생으로, 연풍고을 안배에 사는 김씨와 혼인해 순득(운빈)을 낳았다. 장성한 뒤 고향 인근에 전해진 복음을 듣고 입교, 훗날 노래산 교우촌(경북 청송군 안덕면 노래2동)으로 이주했으나 1815년 부활대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다. 당시 관헌이 "너같이 무식한 자가 어떤 생각으로 죽으려 하느냐?"는 질문에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조물주이신 천주님 은혜를 모를 수 있겠으며 그분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하며 용기있게 답변했다. 그러나 대구로 이송돼 형벌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한 뒤 석방돼 막 대구감영 문을 나서던 중 안동에서 이송돼 오던 김종한에게서 "지금 훌륭한 죽음을 맞을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말을 듣고 다시 관장 앞에 나서 신앙을 고백한 뒤 '살점이 떨어지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하게 매질을 당하고 옥중에서 숨을 거뒀다.

같은 노래산 교우촌 출신인 서석봉(안드레아, ?~1815) 순교자는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지, 언제 신앙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과부 구성열과 혼인한 뒤 사위인 최봉한 부부와 함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해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1815년 부활대축일을 지내던 중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다가 아내, 사위와 함께 대구로 이송, 형벌을 받았고 신앙을 고수하며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중 옥중에서 순교했다.

역시 노래산 교우촌 출신인 구성열(바르바라, ?~1816)은 원래 충청도 홍주 한내장벌(충남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서 태어나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입교했으나 첫 남편과 사별하고 서석봉과 재혼한다. 부부는 사위 최봉한 부부와 함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했으나 역시 1815년 부활대축일에 체포돼 경주로 압송됐고, 이듬해인 1816년 12월 19일 참수됐다. "비록 그는 여자의 몸이었지만 마음의 강직함은 결코 남자에 뒤지지 않았고 몸을 온전히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증거할 줄 알았다"는 훗날의 평가가 오늘까지도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됐다가 1817년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이장됐다.

충청도 홍주 다락골(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태생인 최봉한(프란치스코, ?~1815)은 서석봉ㆍ구성열의 사위로 입교 뒤 공주 무성산으로 이주했으나 주문모 신부 입국 소식을 듣고 모친, 누이와 함께 상경한다. 모친이 성사와 병자성사를 받고 얼마 뒤 사망하자 누이를 정약종의 집에 머물게 하고 시골로 내려간 그는 서석봉의 딸과 혼인, 장인 부부와 함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했다. 역시 1815년 체포돼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돼 의식을 잃은 적이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그의 놀라운 열의와 용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되는 형벌을 이겨내지 못하고 1815년 5월께 옥사했다.

고성대(베드로, ?~1816)ㆍ성운(요셉, ?~1816) 형제는 충청도 덕산 별암(충남 예산군 고덕면 상장리) 태생이다. 형은 본래 성격이 포악해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렸으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격이 바뀌었다. 동생은 본래 성격이 착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언제나 합심해 성경을 읽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적 권면을 하는 데 열심이었으므로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됐다. 다만 한때 고산 저구리(전북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로 이주했던 형은 1801년 전주 포졸에게 체포된 뒤 처음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다가 목숨을 보존해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가 석방됐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우와 함께 청송 노래산으로 이주했다. 1815년 부활대축일 때 체포돼 경주로 압송된 형제는 대구로 이송돼 형벌의 고통을 참으며 기꺼이 신앙을 증거했다. 당시 죽기로 먹은 마음이 목석과 같았고, 고통과 궁핍에도 항상 기쁨 안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816년 12월 19일 참수됐다.

끝으로 충청도 청양 수단이(충남 청양군 사양면 신왕리) 태생인 김화춘(야고보, ?~1816)은 본성이 온순하고 참을성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전주에서 순교한 김대권(베드로)의 동생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워 입교한 그는 장성한 뒤 교회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키며 기도생활과 성경 읽기에 부지런해 교우들의 주목을 받았으나, 1815년 체포돼 경주를 거쳐 대구로 이송돼 1816년 10월 21일 참수됐다. [
평화신문, 2013년 10월 20일, 방상근 석문 가롤로(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정리=오세택 기자]



1,634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