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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인도와 파키스탄 교회: 성서냐, 전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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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7

[세계 교회는 지금] 성서냐, 전쟁이냐?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서의 전투. 지난 1999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지방을 놓고 또 한번 싸웠다. 만년설로 뒤덮인 높이 6,000미터의 히말라야 산맥 고봉, 그 위로 솟아오른 곡사포 포신. 그 험한 자연조차 인간의 전쟁의지를 가로막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평시에 동상이나 고산병으로 죽거나 다치는 군인이 전사자보다 많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한 해 전에 앞서거니 뒷서거니 핵실험을 해서 서로 힘자랑을 했던 터라, 두 ‘핵강국’ 사이의 전투는 핵전쟁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었다.

 

두 나라는 이미 1947-48년, 1965년, 그리고 1972년, 모두 세 번이나 전쟁을 해 적대감과 불신이 남북한 못지않다. 인류는 또다시 핵폭탄의 비극을 맞을 것인가?

 

전통적으로 소련과 친했던 인도를 견제하려고 파키스탄을 지원해 왔던 미국도 다급했던지 파키스탄에게 “침입자들을 철수시켜라.”고 요구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핵전쟁을 걱정하며 평화를 호소했다.

 

결국 파키스탄은 후퇴하고 말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 반발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민선정부가 무너지고 말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벌이는 동안, 두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또 다른 마음 고생을 했다.

 

파키스탄에서는 주민 다수가 이슬람인 카슈미르의 실지를 회복한다는 열망에 덧붙여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인도에서는 1998년에 처음으로 힌두교 민족주의 정당인 인도인민당이 집권한 뒤 갈수록 인도는 곧 힌두교라는 이념 선전이 강화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소수종교일 뿐 아니라, 서구세력의 앞잡이, 비파키스탄, 비인도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두 나라가 전면전을 벌이면 압박은 더욱 거세질 것이 뻔했다.

 

그런데 로마의 교황이 평화를 호소했다고 해서 파키스탄 교회나 인도 교회가 똑같이 전쟁중지와 평화를 호소한다면, 그리스도교는 곧 외세, 비애국이라는 선입견에 불을 붙일 것이 아닌가?

 

두 나라 교회는 각기 자기 나라 안에서 적절한 ‘균형’을 잡아야 했다.

 

당시 인도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뉴델리 대교구의 알란 드라스틱 대주교는 전사자와 부상자, 그 가족을 위한 모금을 촉구하는 공지문을 전국의 각 교구에 보냈다. 그는 또 인도 기독교협의회에도 모금운동을 촉구하면서 이를 통해 인도의 그리스도인들은 “애국심과 사랑을 증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사자 가운데 그리스도교 부족인 나가족 군인 숫자가 모두 16명으로서 두번째로 많다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애국심”의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파키스탄에서도 마찬가지 처지에 있었다. 교회는 전투에 나선 군인들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가톨릭 교회의 고위 관계자들은 카슈미르에서 주민투표를 해서 그들이 파키스탄에 속하든 인도에 속하든, 아니면 독립국가를 원하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자는 파키스탄 정부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공개했다.

 

조국이 우선인가, 신앙이 우선인가? 이 질문 앞에서 과거 1차 세계대전 때 국제주의를 외치던 사회주의자들과 평화주의를 외치던 그리스도인들은 대거 조국을 택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가톨릭 신자들도 서로 싸웠다. 이상과 현실이 별개라면 도대체 우리에게 신앙은 무엇인가?

 

물론 두 나라의 교회는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지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각기 자기 나라의 이슬람 근본주의와 힌두 근본주의 세력에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두 나라 사이의 대화와 평화를 촉구했으며, 모금 같은 것도 ‘희생자’를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애국심을 증명할 기회를 찾으려 했고, 또 그래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이런 경우 교황과 보편교회의 입장이 원론적 차원에 그치는 것은, 이른바 선교의 국제성에 따르는 제약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어느 한편이 옳다 해도, 다른 전쟁 당사국 안에 있는 신자들의 피해를 생각한다면 어느 한편을 들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보편교회의 입장은 추상화되고 탈정치화된다. 나아가 이러한 종교정치학에 따라 현실에 대한 구체적 언급과 실천을 피해나가다 보면 신앙 자체도 추상화, 관념화된다.

 

또한 지역교회가 자꾸 애국심을 증명하려 애쓰는 것도 거꾸로 교회의 보편성, 선교의 국제성 때문이다. 파키스탄 교회는 애국적인데 인도 교회는 전쟁에 머뭇거린다면, 인도 교회는 인도에서 ‘파키스탄편’으로 보일 것이다. 반면에 가톨릭 신자가 인도에만 있다면 적어도 그런 걱정은 없이 전쟁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교 서구 열강과 갈등을 빚던 일제하의 신사참배와 애국 비행기 헌납운동 등, 우리 교회도 경험한 바 있다(참조: 강인철, 「식민지 정권과 교회: 토착화의 종교정치학」,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2000,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흔히 이슬람은 “코란이냐, 전쟁이냐?”며 폭력으로 신앙을 강요한다고 잘못 알려져 왔다. (사실은 “코란이냐, 전쟁이냐, 세금이냐?”다.) 이 질문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려 “성서냐(평화냐), 전쟁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전쟁을 택해왔다.

 

물론 좀더 다른 목소리들도 있었다.

 

예수회 인도 사회연구소의 핀토 신부는 “카슈미르 주민들이 문제 해결과정에 어떻게든 참여하여야 한다.”고 파키스탄에 기운 의견을 내놓았다.

 

인도의 평신도단체인 인도 가톨릭 연맹은 “인도와 파키스탄 11억 민중의 첫째가는 요청은 발전과 식량, 공중보건, 교육, 주택과 일자리”라고 지적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야 할 돈을 전쟁에 쓴다는 것이다. 평시에 이런 말 하기는 쉽지만, 전시라면 전사자들을 모욕한다고 돌 맞을까 두렵다.

 

한국교회는 평시에조차 일부 군사전문가들이 낭비라고 반대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 도입이나 이번에 한미, 남북한 사이에 쟁점이 된 NMD(국가 미사일 방어체제)에 대해 아무 관심도 지식도 내비치지 않고 있지 않은가?

 

한편 파키스탄과 인도의 인권운동가들이 만든 ‘평화를 위한 민중포럼’은 “평화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지적하며 전투중지를 호소했다. 서구 언론에 ‘호전적’으로 반복 표현되는 이슬람인과 힌두교인들이 각기 이슬라마바드와 뉴델리에 있는 이들의 사무실을 불태우지 않은 것은 참 이상하다. 그들이라고 이적 혐의가 두렵지 않았을까?

 

[경향잡지, 2001년 4월호, 박준영 요셉(아시아 가톨릭 연합통신(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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