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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베트남 교회: 교회와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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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9

[세계 교회는 지금] 베트남 교회 : 교회와 민족

 

 

지난 2000년 7월 베트남 교회에서 가장 큰 출판물인 「교회와 민족」지가 창간 25주년을 맞았다. 베트남에서 모든 출판물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서, 베트남 교회에는 이 밖에 다른 대중적 정기간행물이 없다.

 

‘교회와 민족’은 호치민시(옛 사이공)에 있는 ‘가톨릭 연대위원회’의 기관지이다. ‘가톨릭 연대위원회’는 ‘베트남 조국전선’ 산하 단체이고, ‘베트남 조국전선’은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통일전선 조직이다.

 

여기까지는 중국의 ‘천주교 애국회’와 통일전선 조직인 ‘정치협상회의’(정협)의 관계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 ‘공산당 통일전선 조직의 기관지’를 베트남 교회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교회와 민족’ 25주년 기념호에 5명의 베트남 주교들이 글을 실었는데, 먼저 호치민 대교구의 팜민만 대주교는 이 주간지에 대해 “이제 더욱 긍정적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이 출판물이 가톨릭 정체성을 지니려면 ‘예수를 증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이 주간지는 인간다운 공동체를 개발하고 정직과 정의를 소중히 여기는 나라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며, 또 오늘날의 시장 경제와 세계화 과정 속에서 발전을 위해 나라 안의 힘을 모아주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롱수옌 교구의 트란수얀티유 부주교는 이 주간지가 초기에는 ‘가톨릭적’이기보다는 ‘민족적’ 성격이 강해 난처했다고 회고하면서, 앞으로는 현대의 “쟁점이 되는” 문제들을 다루고, 농민처럼 소외된 이들의 권리를 옹호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수안록 교구의 누옌민낱 주교는 이 주간지가 전국의 교회 활동을 보도하는 데 기여했으며, 가톨릭 신앙을 다른 종교인에게 알리려고 애써왔다고 칭찬했다. 그는 ‘교회와 민족’이라는 이름 그대로, 앞으로도 가톨릭 교회와 민족이라는 양쪽 “강기슭”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트란딘투 주교는 이 주간지의 편집과 내용을 칭찬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 토착화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바랐다. 그는 아시아의 자매 교회에 관한 소식이 더 많이 제공된다면 베트남 교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뼈가 들어있는 이야기들이지만, 이는 중국과 비교해서는 매우 자유로운 모습을 반증한다. 사실 ‘교회와 민족’의 25년은 변하고 있는 현대 베트남 교회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교회와 민족’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에 베트남의 평화와 독립, 화해를 위한 투쟁을 후원하던 한 베트남 가톨릭인이 파리에서 처음 낸 일종의 (남베트남에 대항하는) 반정부 잡지로 시작해서, 1975년 4월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1975년 7월부터 베트남에서 발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3년에는 베트남 언론법에 따라 ‘가톨릭 연대위원회’의 기관지가 되었다. 이 잡지는 당시 발행부수가 7000부였으나 25주년을 맞아서는 1만 3400부로 늘어났다.

 

베트남에서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별로 안 좋은 처지에 있다. 무엇보다도 식민지배자였던 프랑스의 종교였던 것이 큰 짐이다. 베트남이 식민지화된 19세기에 프랑스는 “교회의 맏딸”로 자임하였다. 한국에서 일본계 종교인 일련정종이나 천리교가 국제법과 국내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천대받는 것을 생각해 보라.

 

남과 북으로 나뉠 때 북베트남에 있던 가톨릭 신자와 사제 가운데 상당수가 월남했다. 또한 분단과 전쟁 시절에도, 베트남 교회는 필리핀을 빼고는 아시아에서 첫 가톨릭 국가수반이라는 고딘디엠 대통령으로 상징되듯 반공 남베트남의 중요한 축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인 케네디의 ‘제거’ 명령 아래 일어난 쿠데타로 1963년에 사살되었다. 그뒤 베트남 전쟁은 확전된다.)

 

미국 CIA는 서부 고산지대의 소수 민족들을 충동해 반공 게릴라 정책을 펴기도 했는데, 이들은 또한 대개 그리스도교 선교대상이었다. 지금도 이들 소수 민족에 대한 교회의 사목활동은 심한 의심과 견제를 받는다.

 

그러므로, 세계 최강국 미국을 이겨내고 통일을 이룬 기세등등한 공산정권이 교회를 미워할 이유는 충분했다.

 

롱수옌 교구의 부이투안 주교는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공산군에 함락되던 날 롱수옌 대성당에서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주교 서품을 받은 바 있다. 투안 주교는 당시를 “무서웠다.”고 회고한 바 있다.

 

지난 1월 21일, 다른 36명과 함께 새 추기경으로 발표된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 위원장 누옌반투안 대주교는 통일 당시 나트랑 교구 주교였는데, 사이공이 함락되기 7일 전에 사이공 대교구의 부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사이공 대교구 교구장은 고딘디엠 전 대통령의 형이었기에, 교구장 유고를 예상한 일종의 비상조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5년 통일 이후 여러 신학교가 문을 닫고 사제들이 감옥에 가며 많은 수도자가 강제로 ‘환속’해야 했음에도, 베트남 공산정권은 중국에 비해서는, 그리고 북한에 비해서는 더 더욱 종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중국이 종교자유 정책을 1980년부터 폈다면 베트남은 약간 늦은 1988년부터이다.

 

한편 베트남 공산당은 지난 4월 19일 제9차 전당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에서는 신앙과 종교는 “인민 일부”가 요구하는 영적인 필요라고 인정하고, “종교를 갖거나 갖지 않을” 인민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하며, 종교단체의 전통적이고 합법적인 활동을 할 권리를 권장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가톨릭 신자인 누옌반푸옹 변호사는 종교에 관한 조항에 “새로운 것이 없다.”고 지적하고, “종교자유는 그 자체로 완전한 의미이기에, 믿을 자유나 종교를 가질 자유, 또는 믿지 않을 자유나 종교를 갖지 않을 자유 따위는 쓸데없는 개념이다.” 하고 ‘교회와 민족’지에 기고하였다.

 

이러한 토론이 공산당 통일전선의 가톨릭 부문 조직인 가톨릭 연대위원회의 기관지에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에서 현재의 베트남 교회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경향잡지, 2001년 6월호, 박준영 요셉(아시아 가톨릭 연합통신(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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