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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교회, 필리핀인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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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14

[세계 교회는 지금] 필리핀 교회, 필리핀인의 교회

 

 

미국 남북전쟁 때, 멋모르고 그저 용감한 남자가 되고자 의용병으로 나선 한 고장 10대 소년들이 겨우 죄없는 나그네 하나만 쏴 죽이고 만다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뒤 그 마을에서 다시 전쟁에 나서는 병사들을 파견하는 교회당에서의 예배 장면으로 끝난다.

 

“우리는 다시금 피흘리는 전쟁이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노예 상태인 필리핀인들의 자유를 위해 우리는 이제 다시 싸워야 합니다.” 목사는 이렇게 열띤 설교를 하고, 대중은 우리에게도 “영광, 영광, 할렐루야.” 후렴으로 유명한 남북전쟁 때의 전송가를 부른다. 교회 밖에서는 조그만 꼬마들이 불쌍한 필리핀인들을 구하는 용감한 자유의 전사를 그린 그림과, “필리핀인에게 자유를”이란 작은 플래카드를 들고 젊은 병사들을 환송한다.

 

홍콩의 파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지 연감에 따르면, 필리핀은 “1898년 6월 12일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얻었으나, 곧바로 미국 지배 밑에 들어간다.” 필리핀은 1946년에야 미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우리는 이 역사를 미서전쟁으로 배우지만 필리핀 역사에는 대스페인 독립혁명에 이어지는 대미전쟁이라는 것이 있다.

 

 

곰부르자

 

마르코스 독재정권 아래인 1978년, 예수회의 로욜라 신학교 신학생들은 ‘곰부르자(GOMBURZA)’라는 단체를 만든다.

 

곰부르자는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인 1872년에 지하 독립단체에 참여했다가 반역죄로 사형당한 필리핀인 교구 사제 세 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898년에 독립을 얻게 된 1896년의 봉기를 필리핀인들은 독립혁명이라 부르는데, 이 혁명은 멀리 1872년에 이 세 신부가 사형당한 데서 그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현재 사제 회원만 약 500명에 이르는 이 단체는 남녀 수도자와 신학생도 회원으로 삼고 있다.

 

1996년 필리핀 주교회의 성소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던 로베르토 레예스 신부는 신학생 시절 이 단체의 창립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이 단체는 필리핀 사회와 교회 안에서 민족주의 정신을 되살리고 사회정의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레예스 신부는 “우리 신학생들은 당시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와 학교 담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자 했다.”고 말한 바 있다.

 

곰부르자는 마닐라의 하이메 신 추기경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필리핀 독립교회

 

1896년에 스페인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하려는 필리핀 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위대의 요구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직자의 필리핀화”였다. 스페인인 신부와 수사들이 지배하던 당시 필리핀 교회는 스페인 식민통치 기구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독립은 짧은 봄날처럼 지나가고, 곧 미국이 새로운 식민통치자가 되었다. 새 미국 식민통치 아래 필리핀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에 적대적인 교계제도에 절망한 일부 필리핀인들은 1902년에 아예 독자적인 “필리핀인의 교회”를 만들었다. 이 교회는 ‘필리핀 독립교회(PIC)’라고 부른다. 이 교회 독립운동은 한 노동운동 지도자가 주도했다.

 

마닐라의 판다칸 본당에서는 여성들이 필리핀 독립교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스페인인 사제를 끌어내고 독립교회로부터 새 사제가 올 때까지 교회를 이끌기도 했다.

 

이들은 로마로부터 독립했을 뿐 대체로는 가톨릭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로마의 고삐가 없는 만큼 자유로워, 현재 그 성직자들은 결혼을 하고 있다. 영국의 성공회와 비슷하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이들은 개신교로 취급되며, 전체 인구의 15%라는 개신교 숫자에는 약 300만의 독립교회 신자수가 포함된다.

 

그런데도 지난 1998년에 있었던 필리핀 독립기념 100주년 기념식에 필리핀 정부는 이들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 가톨릭의 눈치를 본 것이다.

 

필리핀 교회는 그 역사가 수백 년이나 되었지만 필리핀 독립교회가 등장한 지 3년 뒤인 1905년에서야 첫 필리핀인 주교가 나왔다.

 

필리핀의 미국 식민정부는 1907년에 반국기법이란 것을 만들어 독립 필리핀의 국기 게양을 금지했다. 그럼에도 필리핀 독립교회는 성모상에 국기로 옷을 입히고, 미사 마침성가로 국가를 부르는 등 저항을 계속했다.

 

같은 해에 필리핀 대법원은 독립교회측이 장악한 모든 교회 재산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곰부르자는 필리핀 독립운동의 맥을 이어 마르코스 치하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다. 그런데 독립교회의 알베르토 라멘토 총대주교에 따르면, 마르코스는 원래 독립교회 신자였으나 정치에 나서면서 출세를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카이로스

 

지난 1998년 필리핀 독립 100주년을 맞아 필리핀 주교회의 전 의장 레오나르도 레가스피 대주교는 UCAN 통신이 내는 주간 ‘Asia Focus’에 실린 기고문에서 그 역사적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필리핀 교회에게 1898년 6월 12일은 단순한 정치적, 사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아메리카 복음화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강조했듯이 그것은 하나의 구원의 순간, 곧 ‘카이로스(kairos)’였다.”

 

레가스피 대주교는 지난 100년 동안 필리핀 가톨릭 교회가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에서 국민들의 활력과 창조정신을 소생시키고 통합시키는 수단으로 부상”했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가 (스페인과 다른) 미국의 통치 하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달리 규정하고 “권력분산”의 원칙을 받아들인 뒤 “새로운 성장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식민통치 초기에 (여전히 스페인식에 익숙한) 교회와 (정교분리의 미국) 식민정부는 “긴장된 시험기간”을 거쳤지만, 점차 사법권을 둘러싼 잡음을 이기고 실용주의와 초월성을 어떻게 관련시키는지 배워나갔다.

 

그에 따르면, 독립이 되었어도 “투쟁은 계속된다.” 이 투쟁은 지난 1991년의 제2차 필리핀 사목총회가 필리핀 교회를 “가난한 자들의 교회”로 재정립하려는 방향을 확립하고, 각 교구 단위 사목총회에 직접 영향을 줌으로써 이어진다.

 

[경향잡지, 2001년 11월호, 박준영 요셉(아시아 가톨릭 연합통신(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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