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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ㅣ기타

헝가리 교회: 굴라쉬 교회의 도전과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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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21

[세계 교회는 지금] 헝가리 교회 : 굴라쉬 교회의 도전과 희망

 

 

이제는 세계적인 식품이 된 헝가리 음식 ‘굴라쉬’는 짜고 맵고 걸쭉한 국물에 큼직한 고기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데, 꼭 우리의 육개장 맛이다. 첫인상부터 유럽 음식 같지는 않고, 몽고인들이 전해준 음식이라는 설이 실로 그럴 듯하다. 이제는 유럽인들의 식단에 일상적으로 올라오게 된 이 굴라쉬가 우리의 김치처럼 가장 헝가리적인 것이라고들 한다. 우리처럼 이들도 매운 맛을 무척 좋아하고,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도 갖고 있다.

 

 

구속은 없지만 탄압은 있다

 

헝가리는 비잔틴 교회 시대에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0세기의 왕이었던 성 스테파누스가 스스로 로마 교황에게서 세례를 받고 교구를 설립하면서부터, 이 나라는 체코와 폴란드와 함께 대표적인 가톨릭 국가가 되었다. 헝가리는 중세에 이슬람에게 국토의 대부분을 점령당해, 교회도 백성도 식민지의 오욕을 겪어야 했다. 식민지시대 이후 헝가리 제국을 일궈내서 1차 세계대전까지는 중부 유럽의 강자로 위세를 떨치며 살았다. 당시 헝가리 제국의 영토는 현재의 4배 이상이었고 교회도 강성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사회주의 블럭에 속하게 되었고, 교회는 다시 고난의 시기를 맞게 된다.

 

헝가리식 사회주의는 과거 동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북한이나 루마니아에서는 수천 수만 명의 군중집회, 집체예술, 일체의 종교금지로 상징되는 스탈린식 사회주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헝가리는 동독처럼 형식적으로는 법적 자유를 인정하는, 우리에게는 낯선 사회주의를 선택했다. 당시 부다페스트에는, 동유럽에서는 유일하게 유다교의 랍비 신학교가 운영되어 랍비들을 길러냈고, 가톨릭 미사나 신학교도 허용되었다. 이렇듯 표면적으로는 종교인들에게 아무런 사회적 차별과 구속이 없었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주교들은 자유롭게 전례를 집전하고 사제관에서 살 수 있었지만, 실제 많은 주교들이 사제관과 성당 외에는 일체 외출할 수 없었고, 모든 편지와 만남이 철저히 감시되는 식이었다. 사회주의 혁명 전에는 전국 중고등학교의 70% 이상을 가톨릭 교회가 운영했지만, 혁명 후에는 전국에 8개만 남기고 모두 국유화되었다. 미사와 신학교는 허용되었지만, 성당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행사는 금지되었고, 성당의 개축을 위한 예산집행도 불가능했다. 열심한 신앙인들은 이따금 당국으로부터 개인당 20kg 이하의 짐만 꾸려서 저 멀리 시골마을로 신속히 이사하라는 명령을 받곤 했다.

 

사회주의 정권에 대항하여 인민들이 ‘자유’를 외쳤던 “프라하의 봄”보다 정확히 1년 전, 헝가리에서는 그런 인민들의 저항이 있었다. 그 인민봉기도 러시아의 탱크에 짓밟히고 진압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정신적 지주로 등장했던 민첸티(Mindszenti) 추기경이 1956년 구속되어 감금되자, 교회와 정권의 관계는 급속히 나빠졌다. 사회주의 정권은 감옥에 갇혀 헝가리 인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민첸티 추기경을 함부로 처단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서구의 외교적 노력에 힘입어 21년 뒤인 1976년 해외망명길에 오른다. 이 사건은 사회주의 정권도 결국 추기경을 꺾을 수 없었다는 의미로 헝가리 인민들의 가슴에 남게 된다.

 

하지만 이런 형식적인 자유라고 하더라도, 일체 금지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나은 면도 있을 수 있다. 적은 숫자이지만 성소는 이어졌고, 교회는 어떻게든 꾸려나갈 수는 있었다. 이를테면, 신학교 입학생이 100명이라면, 그 가운데 대다수는 가족과 친구와 본인에게 쏟아지는 정권의 탄압에 못 이겨 중도에 포기하고, 대략 10명 정도는 결국 성품성사를 받았다고 한다. 교회는 양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지만, 질적으로는 더 고양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소련 정부는 이런 느슨한 사회주의에 대해서 늘 탐탁하지 않아 해서 “굴라쉬 사회주의”라는 별명을 붙이며 좀더 스탈린식으로 운영하기를 종용했지만, 순하고 정 많은 헝가리인의 기질 때문인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헝가리 사람들은 러시아의 영향 아래 사회주의 제도를 수입한 것일 뿐, 사회주의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지는 않았다는 말도 있다.

 

 

종교세를 내는 평신도

 

1990년 이웃 사회주의 국가들과 함께 큰 변화를 겪은 헝가리의 상황은 큰 틀로 보아 이웃 나라인 폴란드, 체코와 엇비슷하다. 세 나라 모두 큰 가톨릭 교회가 있고, 중부 유럽에 위치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서유럽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웃 러시아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도 반대편에 자리잡은 이웃 게르만 민족과도 거리를 두려는 자세를 보인다. 유럽 연합 후보국 가운데 이 세 나라가 현재 1순위이며, 몇 년 내에는 정식가입이 확실해 보인다. 이 세 나라 모두 나토에 가입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이런 움직임은 러시아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서구의 발전된 자본주의 문화를 동경하고, 서구의 문화는 매우 강한 영향력을 지니며, 서구로 빠져나가는 인구가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하지만 이 세 나라의 가톨릭 교회는 그 처지가 매우 다르다. 폴란드는 원체 신심이 강한 민족성에 교황의 독특한 역할까지 더하여 폭발적인 성소를 기록하는 등, 교회의 앞날이 절대 어둡지 않다. 한편 체코 교회는 서너 곱의 어려움에 처해있다. 헝가리 교회는 이들의 중간쯤 된다고 할 수 있다.

 

헝가리 교회도 현재 성소가 턱없이 모자라서 고민 중이다. 특히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지 못해 고민이다. 사회주의 치하에서 길들여진 교회 운영방식은 현재의 자유분방한 세대들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다. 사회주의 교육을 받은 세대들인 대부분의 부모들은 교리지식이 거의 없고, 청소년 세대는 서구의 물질주의 문화에 넋을 뺏기고 있다. 교회는 아직 이런 큰 변화에 대한 효과적인 대안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교회의 경제적인 어려움도 큰 문제다. 과거 사회주의 시절 돌보지 못한 건물과 문화재를 관리할 재력과 인력이 많이 부족하다. 교리교사, 신학자 등 교회의 일꾼들도 크게 모자란다.

 

그러나 다른 면도 있다. 최근 헝가리 교회는 독일처럼 종교세를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가난한 나라의 아무런 강제조항이 없는 세금인지라 아직 액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 가지 반가운 희망의 징조는 이 종교세를 내는 평신도들의 숫자와 금액이 해마다 조금씩 늘어난다는 일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정권 치하에서 견뎌낸 고난과 지켜낸 도덕성에 대한 보답일까, 이웃 폴란드처럼 성직자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이라고 한다. 현재 통계는 인구의 대략 60% 가량이 가톨릭 신자이고, 1990년 사회주의 붕괴 당시 전무하던 교회 계통의 초중고 교육기관이 급속히 그 숫자를 늘려나가고 있다. 이제 자라나는 세대들은 종교교육을 받고 있다.

 

이렇듯 도전과 희망이 교차하는 ‘굴라쉬 교회’의 미래는 헝가리 신자들의 노력과 은총에 달려있다. ‘김치 교회’가 우리 나라 신자들에게 그런 것처럼.

 

* 주원준 토마스 데 아퀴노 -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경향잡지, 2002년 7월호, 주원준 토마스 데 아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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