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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교회: 학살 뒤에 남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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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1 ㅣ No.24

[세계 교회는 지금] 캄보디아 교회 : 학살 뒤에 남은 자

 

 

지난해 크리스마스 전날인 12월 24일,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즈 이래 가장 많은 사제가 서품되었다. 네 명! 3000명이 넘는 캄보디아 가톨릭 신자가 참석한 가운데 사제품을 받은 이 네 명은 모두 캄보디아의 중심민족인 크메르족 출신이다.

 

이날 사제서품 미사는 캄보디아의 천주교 사제는 물론 캐나다와 프랑스, 인도, 일본, 태국, 베트남 등에서 온 사제와 주교 70여 명이 공동으로 집전하였다.

 

캄보디아는 1975년에 베트남이 공산 통일될 무렵 함께 공산정권이 수립되었고, 저 비참한 킬링 필드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인구의 3분의 1인 200만 명이 처형되고 굶주림으로 죽었다. 일반 지식인마저도 쓰레기 취급을 당하며 논두렁에 처박히는 상황에서 종교인들, 특히 성직자들이 살아남을 길은 없었다. 그로부터 겨우 4년 뒤인 1979년에 베트남군이 침입하면서 학정을 일삼던 크메르루즈 정권은 무너졌지만, 다시 크메르인 사제가 나온 것은 1995년까지 무려 20년을 기다려야 했다.

 

현재 캄보디아에는 프놈펜 대목구를 비롯해 콤퐁참 지목구와 바탐방 지목구 등 모두 3개 교구가 있다. 그러나 신자수는 그리 많지 않고, 교회 복구도 쉽지 않다.

 

 

장터에서 복구된 교회

 

캄보디아에는 1850년에 프놈펜 대목구가 설립되어 캄보디아 전역을 맡았다. 그뒤 프랑스 식민지가 되면서 신자가 늘기는 했지만 그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고 종종 미군이 캄보디아를 폭격하기도 했던 1968년에야 프놈펜 대목구에서 바탐방 지목구와 콤퐁참 지목구가 분리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1968년에 콤퐁참 지목으로 임명된 앙드레 레수에프 몬시뇰(파리 외방전교회)은 1975년에 다른 외국인 선교사와 함께 추방되었다. 1991년에 캄보디아에서 종교자유가 되살아나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신자가 한 명이라도 살아있는지 알아보려고 곧장 콤퐁참의 장터로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지팡이를 짚은 한 늙은 프랑스인이 다리를 절며 장터에 나타나 누군가를 찾는 것 같았다.”는 소문이 장터 부근에 퍼지면서 마침내 분 나스라는 한 여인이 그 소문을 들었다. 그녀는 어릴 적에 레수에프 몬시뇰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고, 그곳에는 가톨릭 사제도 없었기 때문에 분 나스는 한 개신교 목사에게 부탁해서 가톨릭 교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나중에 이 목사를 통해 레수에프 몬시뇰에게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레수에프 몬시뇰은 자신의 지목구에 적어도 신자가 한 명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콤퐁참으로 되돌아왔다.

 

전쟁과 크메르루즈 때문에 남아있는 교회 건물은 하나도 없었다. 레수에프 몬시뇰은 집을 하나 빌려 정기적으로 미사를 드렸고, 분 나스도 이 미사에 참여하였다. 그뒤에 태국의 난민수용소로 피난을 갔던 크메르족 난민들이 고국으로 되돌아왔으며, 수용소에서 새로 세례를 받은 이도 있었다. 나이가 많아진 레수에프 몬시뇰은 1997년에 은퇴하였다.

 

 

이민족의 교회

 

캄보디아는 프랑스가 물러간 뒤에도 공산반군과 싸우던 내전과 우익 쿠데타, 공산 크메르루즈의 국가파괴, 베트남군의 침공(1979년), 베트남의 철군과 잇따른 내전으로 거의 50년 동안 혼란이 이어졌다.

 

종교자유가 다시 보장된 지 11년이 지났고 교황청과 외교관계도 복구되었으며, 프랑스를 비롯해 적지 않은 외국인 선교사와 지원이 이어지고 있으나 사회 자체가 혼란하기 때문에 전체 신자수도 다만 추정할 뿐이다. 신자수는 2만 5000명인데, 이 가운데 베트남계가 1만 7000명이나 된다. 캄보디아의 주종족인 크메르족은 약 5000명, 나머지는 서양인 등 외국인이다.

 

베트남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캄보디아 동부지방에는 베트남계가 많다. 역사적으로 국경이 여러 번 바뀌었을 뿐 아니라, 1979년에 캄보디아를 점령한 베트남이 베트남인을 20여만 명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베트남에는 현재 전체 국민의 6%가 가톨릭 신자이며, 따라서 캄보디아로 이주한 베트남 농민들 가운데에도 가톨릭 신자가 섞여있었다. 크메르루즈 때문에 이미 크메르인 신자들이 전멸한 상태에서 이들 베트남 이주민 신자들이야말로 거의 유일한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과거에 캄보디아와 베트남은 서로 땅을 빼앗고 빼앗기고 했다. 1979년에 전쟁이 났던 까닭도 베트남이 캄보디아 동부지방을 제 땅으로 생각하는 마당에 캄보디아가 남쪽 바닷가 국경부근의 조그만 섬 하나를 먼저 점령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의 캄보디아 정부는 내전을 수습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제사회의 지원을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베트남과도 좋은 관계를 맺고 있고 국경문제도 해결되었다.

 

글머리에서 크메르족 사제 4명의 서품을 얘기한 것처럼, 캄보디아 교회 재건은 신자수 60%를 차지하는 베트남계가 아니라 크메르족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장래를 내다볼 때 다행스런 일이다.

 

 

난민사목의 기여

 

크메르루즈 치하의 학정과 잇따른 내전을 피해 사람들이 피난할 곳은 서쪽 이웃 나라인 태국뿐이었다. 때문에 태국은 국경지대에 난민촌을 만들어 이들을 수용했는데, 여기에서는 예수회가 주도하는 난민사목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아시아에서는 일시적인 피난민 구호를 넘어서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친 난민사목이 처음 소개되고 실행된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밀려난 성직자와 수녀 일부도 여기에 가세했으며, 태국 교회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난민사목은 식량을 주고 병을 고치는 수준을 넘어 지적, 영적 교육을 하고 난민촌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라는 한 세대를 책임지는 일이었다. 난민촌에서는 기왕에 있던 소수의 신자와 더불어 새로 세례를 받는 이들이 생겨났고, 이들 가운데에서 성소자도 나오기에 이르렀다.

 

앞서 서품식을 치른 크메르족 사제 4명 가운데 2명은 난민촌에서 사제 양성과정을 시작했다. 라이파울 신부는 1961년에 프놈펜에서 불교인 가정 8형제의 맏이로 태어났으며, 1984-1992년 난민수용소에서 사는 도중에 프랑스인 신부를 만나 함께 성서공부를 시작했다. 운손 신부(41세) 또한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은 뒤 넉 달 만에 타이로 피난했는데, 그와 그의 형은 1977년에 태국의 한 절에 보내져 불교를 공부하다가 스님이 되었다. 3년 뒤 그는 스님 생활을 그만두고 난민수용소에서 살다가 한 캐나다인 후원자를 만나 캐나다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양어머니의 깊은 관심 속에 종교행사에도 참여하고 성서도 공부하다가 1984년에 여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캄보디아에는 땅에 묻힌 지뢰가 무척 많다. 때문에 지역교회는 지뢰와 지뢰 희생자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고 있다. 외화는 외국인 관광에 의지하고, 의료시설과 지식도 부족해서 에이즈 문제도 심각하다. 교회는 가난한 캄보디아인들에게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려 한다.

 

[경향잡지, 2002년 10월호, 박준영 요셉(아시아 가톨릭 뉴스(UCAN) 한국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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