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김시우 알렉스: 주님! 이 몸의 소망입니다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76

김시우 알렉스 - 주님! 이 몸의 소망입니다

 

 

을해년(1815년) 음력 2월 22일 청송(靑松) 노래사(老來山) 기슭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었다. 김시우 알렉스(1781-1815년)는 차가운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을 바라보며 주님을 애절하게 불렀다. "주님! 당신을 따르는 것이 이 죄인의 소망입니다. 자비를 베푸시어 거두어주소서." 그렇지 않아도 반신불수의 몸에다 포승이 옥죄여 고통스러웠고, 걸을 수 없도록 묶인 채 끌려가면서 가끔씩 의식을 잃기도 했다. 종아리에 흐르던 피가 신발 속으로 들어감을 느꼈고, 무릎과 종아리의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온몸을 떨어야 했다. 그는 이렇게 노래산 교우 촌에서 포졸들에게 잡혀 경상도 경주감영으로 압송되는 중이었다.

 

'어떻게 노래산의 교우촌을 관아에서 알았을까?' 김시우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가운데서도 일말의 의심과 놀라움에 치를 떨었다. 숨은 신앙의 보급자리였던 경상도 신간벽지의 교우촌이 완전히 뿌리뽑히고 마는 슬픔과 통한의 눈물 속에서 밤하늘의 별빛은 흐려졌다.

 

1814년, 무섭고 참혹한 흉년이 들었다. 한 해 동안 지은 농사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고, 일찍이 사람들이 겪어본 적이 없는 무서운 기근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길가에 쓰러져 죽어갔다. 이 불행한 시기에 경상도 북부 산간벽지에 있던 교우촌 신자들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1801년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가 일어나 우리 나라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모두 희생되고 오가작통법이 시작되어 신자들은 철저히 밀고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살아남은 교우들도 마을에 더 이상 머물러 살 수 없게 되자 신앙생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을 찾아 고향을 떠났다. 산간벽지 심산유곡에 은밀히 모여든 신자들은 그곳에 작은 교우촌을 이루고 추위와 굶주림과 맹수의 위협을 받으면서 오직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영적 기쁨으로 함께 살았다. 이렇게 1801년 박해 이후 경상도 북부 산간지역에 몇 개의 교우촌이 이루어졌다. 아무도 모르게 숨어 지내게 된 이 교우촌 사람들은 어쩌면 역사 밖에서 잊혀진 채 망각 속으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1814년 가뭄과 홍수로 입은 재해는 비참한 기근을 가져왔고, 이 기근 속에 숨겨진 교우촌이 역사 안으로 들어와 밝혀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온 나라를 휩쓴 1814년 흉년에 교우촌 신자들은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고 한다. 그 까닭은 비록 풀뿌리와 나무껍질일망정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누어 먹고 함께 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모자라는 것은 나누며 함께 하는 마음인 것 같다.

 

이런 불행 가운데 전지수라는 부끄러운 배교자가 경상북도 북부 산간벽지에 숨어사는 교우촌 사람들을 등쳐먹으려는 흉악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는 경상도의 교우촌을 돌아다니며 돈과 옷가지를 구걸하였다. 교우들은 순박하게 성서 말씀에 따라 나그네를 그리스도처럼 대접하고 곤궁한 가운데도 힘껏 도와주었다. 전지수는 그 흉년에도 교우촌을 돌아다니며 얻어먹고 살 수 있었다.

 

그 해가 저물고 겨울이 되면서 노래산은 눈에 덮였다.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는 교우촌이 눈 속에 묻히면서 더 얻어먹을 것이 없음을 잘 아는 전지수는 교우들의 하찮은 재산을 노려 배은망덕하게 이 교우촌을 안동관아에 밀고하였다. 전지수의 밀고를 받은 안동관아에서는 교우촌 신자들을 한꺼번에 다 잡아들이려고 교우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때를 노렸다. 그때가 을해년 음력 2월 22일, 부활전야였다.

 

날이 저물자 교우들은 굶주림과 추위속에서도 부활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부활찬미경을 합송하려고 한자리에 모였다. 고통 속에서도 영적 기쁨을 누릴 줄 알던 교우촌 신자들이 부활찬미경을 합송하면서 잔잔한 희열에 젖어들 때, 밀고를 받고 때를 노리던 포졸들이 별안간 횃불을 들고 들이닥쳤다. 놀라고 당황한 교우들 가운데 청년 고성대와 성운 형제가 앞서서 포졸들에게 대항했다. 포졸들은 이 당찬 저항에 놀라며 불을 들어 자신들이 관아에서 나온 포졸임을 밝혔다. 산적들의 습격인 줄 알았던 교우들은 포졸임을 알고는 곧 양처럼 순하게 포승을 받았다.

 

김시우는 마비되지 않은 손으로 축일표와 기도문을 들고 교우들과 함께 예식에 참례하고 있었는데, 포졸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반신불수인 그를 병신이라 하여 도외시한 것이다. 순교의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움과 동료들과 떨어져 버려질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는 포졸들에게 호소했다. "이 보시오 포장, 나도 천주님을 공경하는 천주교 신자인데 어찌 나만 잡아가지 않으려 하오." 포장은 두려운 줄도 모르고 나서는 반신불수 김시우를 얄밉게 보고 그도 동아줄로 결박하여 다른 교우들과 함께 관아로 끌고 갔다. 알레스는 기쁜 낯으로 순교의 핏빛 길을 따랐다. 청송 노래산 산길, 성한 사람도 걷기 어려운 길을 반신불수의 몸으로 포승에 묶인 채 경주가지 백리가 넘는 길을 참혹하게 끌려간 그는 무릎아래 성한 곳이 하나도 없는 상처투성이로 옥에 던져졌다.

 

경주감영에서 심문을 받으며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여러 차례 형벌을 당해야 했는데, 몸은 비록 불구이나 항구한 신앙 자세에 관원들도 감탄하며 그를 칭찬하였다.

 

김시우는 경주에서 상급 관청인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감사가 그에게 물었다. "네가 예수를 흠숭한다고 했는데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의 매에 맞아 죽은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사람들에게 맞아 죽은 사람을 흠숭할 이유가 무엇이며, 그런 죽음이 어찌 훌륭하단 말인가." 김시우가 대답하였다. "9년 동안 장마가 졌을 때, 하우(夏愚) 임금께서는 온 나라를 두루 다니시며 백성을 구하려고 온갖 일을 다하셨습니다. 이런 행동을 어찌 훌륭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후세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 합니다. 그러나 하우 임금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물질로 구원했는데도 고금에서는 그 이름을 칭송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계만방의 모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고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렇듯 은혜를 베푸신 이를 섬기지 않는 자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감사께서도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그분을 흠숭하며 천주교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알렉스는 큰 언변을 지녔고 동서고금의 역사와 문학에 통달하여 관아에서 심문 때마다 창조주이신 천주님의 존재, 강생과 구속, 상선벌악 등 주요 교리를 열절하게 증언했다. 감사는 불구자인 김시우에게 번번히 짐을 분하게 여긴 나머지 그의 턱을 쳐 말을 못하게 하고 고문을 더욱 심하게 가하였다.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고 결안문에 수결을 놓았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는 날을 옥중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김시우는 반신불수의 몸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짚신을 삼을 수 없었다. 종일 짚신을 삼아 바쳐야 옥중에서 공전으로 국밥 한 그릇을 얻어 먹을 수 있는데, 짚신을 삼지 못했기에 먹을 것을 줄 수 없었다. 굶주림과 형벌로 그는 더욱 쇠약해졌다. 18일 동안 굶었을 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질렀고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난 뒤 숨을 거두었다. 

 

그 때 알렉스는 동정의 신부이었다. 신자들은 그를 참으로 영예로운 증거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4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23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