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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한국 제2의 동정부부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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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78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 한국 제2의 동정부부 순교자

 

 

세계 순교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동정부부 순교자라 하면 우리는 곧 이 루갈다와 유 요한을 생각한다. 순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동정부부 순교자는 한 쌍이 더 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일생을 목자 없는 한국교회에서 사제를 모시려 헌신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북경을 다녀오면서 겪었던 기이한 일화를 자주 이야기했다. 북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 있는 어느 교우와 은밀히 연락하여 성밖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정하상 성인이 의주에서 짐을 운반하려고 구했던 말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이 약속한 날짜를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늦게 서울에 도착한 성인이 조심스럽게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급히 성인을 찾는 교우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짜에 만나기로 했던 서울 교구의 가족이 그 날 모두 관헌에게 잡혀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성인은 한편으로 놀라워하면서 말이 다쳐 늦어진 것 때문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닭고 이를 주님의 섭리하고 기억했다.

 

성인이 하던 성직자 영입운동 근거지를 제공하고 헌신적으로 도와주다가 잡혀간 주인공이 바로 한국 제2의 동정부부 순교자이다. 숙(淑)이라는 관명으로 더 알려진 조명수 베드로와 권 데레사 부부는 초대교회의 박해 속에서 순결한 백합과 순교의 종려나무 가지를 함께 얻었다.

 

달레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이 아름답고 거룩한 부부를 소개하면서 "신부가 없어 성사를 받지 못하고 미사성제에 참여하지 못하면서도 이와 같이 훌륭한 신자들을 배출하고, 이렇게까지 기묘한 일을 행하는 교회를 가진 민족에게 우리는 크나큰 기대를 갖는다."고 격찬하고 있다.

 

경기도 양근 태생이 조숙 베드로는 양반집 자손이며 정하상 성인께서 유배지에 찾아가 수하하였던 조동섭 유스티노의 가까운 친척이다. 1801년 박해 때 나이가 어렸던 조숙은 양친과 함께 강원도에 있던 외가로 피난 가서 살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출중한 재능을 보였고, 성품이 착하고 친절하여 나이보다 훨씬 의연하고 성숙했다. 그러나 박해는 계속되고 종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다른 교우들과 접촉이 끊어진 상태에서 베드로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게 되어 냉담 상태에 이르고 만다. 그의 이러한 상태는 권 데레사와 혼인을 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반면 권 데레사는 어릴 때부터 교리교육의 혜택을 받았지만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2년 뒤 아버지마저 박해의 회오리 속에서 잃고 만다. 고아가 된 4남매의 막내인 그녀는 어렵게 살았지만 온화하고 상냥한 성품과 애덕으로 외로운 남매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나이가 차면서 그녀의 정신과 덕이 아름다운 용모와 어울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데레사는 영적인 증진에 더욱 힘쓰며 주문모 신부님을 뵙고 성가를 받는 행운을 맞았을 때, 주님께 사진을 온전히 봉헌하려는 순결한 삶을 굳게 다졌다. 하지만 박해의 시련과 고통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그녀가 18살이 되던 해의 박해에서 큰오빠 권상문은 순교하고 작은오빠 권상학은 추자도로 귀양가게 되자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아직 어린 조카를 데리고 서울로 피난했다.

 

친척들은 과년한 데레사를 얼른 결혼시키기로 하고 혼사를 서둘렀다. 그녀는 자신의 신앙과 순결을 지키려던 영적 결심을 이해 받을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보이지 않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서 친척의 강권을 피하지 못하여 21살에 결혼하게 되었다. 데레사는 그의 상대가 냉담 상태에 있는 신자임을 알고는 기도하며 자신의 영적 결심을 지킬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기대하였다.

 

첫날밤 신랑과 마주하였을 때, 데레사는 기도하며 준비했던 편지 한 장을 조용히 내놓았다. 남편에게 순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자신의 결심에 남편이 함께 해 줄 것을 간절히 청하는 내용의 편지였다. 간결하고 거룩한 그 편지를 받아 읽는 순간 참으로 기이하게도 베드로는 오랜 신앙적 열성이 분출하듯 가슴에 차 올랐다. 그 밤에 백년가약을 맺은 이 젋은 부부은 서로 신앙 안에서 남매처럼 생활하기로 약속했다. 그들을 밤새워 주님께 기도하고 감사했고, 더할 수 없는 화목함 가운데 동정부부의 아름다운 삶을 꾸려갔다.

 

그들은 몹시 가난하였으나 가난을 기쁜 마음으로 참았고, 더욱 알뜰이 절약하여 더 궁핍한 이웃들에게 나누는 애덕을 베풀었다. 베드로는 이 무렵 지난 날 냉담했던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눈물을 흘렸고, 주변에 냉담한 이들을 보면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며 기어이 회두하게 하였다. 그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열성을 다해 전교하였으며, 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권 데레사는 남편이 자신의 소망을 들어준 것에 감사하여 어떤 선행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영적인 향상을 열망하여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일을 지키는 것은 물론 엄격한 금욕을 생활화했다. 가끔은 식음과 침식을 잊은 채 기도하였고 교리서를 읽고 이웃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등 신앙 생활의 모범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부를 찾아와서 교리의 해설을 듣고는 흡족한 마름으로 돌아갔다. 부부의 삶이 이토록 영성적 관심과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으로 무르익을 무렵 정하상 성인을 만나 그들 집으로 사제 영입운동을 돕는 거점으로 내놓았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부부의 동정생활은 15년이나 이어졌다. 그 동안 그들의 거룩한 결심은 몇 차례 혹심한 유혹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데레사의 착하고 열절한 권유와 굳건한 의지로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 부부는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더욱 깊은 신뢰와 사랑을 느끼며 서로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들의 영적 사랑과 신뢰가 완숙해질 무렵 주님께서는 부부를 순교의 영광으로 그 삶을 완성시켜 주셨다.

 

1817년 3월 북경에서 돌아오는 정하상 성인을 은밀히 만나기로 미리 약속했던 날이었다. 베드로가 가르치던 예비신자가 간직한 축일표가 포졸한테 발각되어 부부는 성인과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문초를 받을 때, 포청에서는 이들을 예사로 알고 심문했다가 크게 놀라는 일이 생겼다. 특히 데레사의 해박하고 깊은 지식과 정연한 논리 그리고 막힘이 없는 교리 응답에 포졸들도 감탄했다. 준엄한 문초에 겸손하고도 굳건한 자세를 보며 더욱 놀라며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기쁨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데레사가 남편을 생각하는 열절한 사랑은 절정에 이르렀다. 고난을 함께 받자는 영적 결의와 한없는 사랑, 신뢰로 가득찬 편지를 옥중에서 적어 남편에게 바쳤다. 베드로 또한 아내의 사랑과 격려를 받아 관원들로 하여금 어떤 형벌과 심문으로도 그의 신앙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닫게 했다.

 

이 동정부부는 옥에 갇힌 지 27개월 뒤인 1819년 5월 21일(6월 13일이라는 증언도 있다.)에 참수되어 순교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었는데 그때 데레사는 36살, 베드로는 33살이었다. 처형된 데레사의 시신에는 3번 맞은 칼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지만 더없이 아름다웠으며, 그녀의 머리채는 대바구니에 담겨져 1839년 순교한 남이관 세바스티아노 성인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바구니를 열면 현묘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6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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