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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태보 베드로: 옥중수기를 남긴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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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82

신태보 베드로 : 옥중수기를 남긴 순교자

 

 

"네가 3도를 돌아다니며 사교(邪敎)를 전파하여 백성을 현혹한다니 그것이 참말이냐?" 

"저는 사교를 믿지 않고 다만 천주의 교리를 따를 뿐입니다." 

"그래 천주교를 믿으면서 그 교를 국법으로 엄금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 

"어떻게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잘 알고 한 것입니다." 

"알고서 왕명을 어겼으니 너는 죽어 마땅하지 않겠느냐?" 

"제가 죽음을 당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상감께서 너희들을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하시니 마음을 돌리지 않겠느냐?" 

"순경(順境)에 있을 때에는 임금을 섬기다가 역경(逆境)에 처해서 왕명을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비겁한 자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만 진리를 따르고 어려운 세월을 만나면 그것을 버리는 자는 그보다 더 비겁한 자입니다. 관장님은 법대로 처리하십시오. 저는 제 신념을 따라 행동하겠습니다."

 

순교자 신태보(1768-1839년)의 "옥중수기"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의 활동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에 미쳤다. 특히 1801년 전국적인 박해로 폐허가 된 교회를 재건하려고 사제 영입운동에 참여하여, 친척이자 주동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이여진에게 북경에 다녀올 여비를 마련해 주는 등 온갖 노력과 활동으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 가운데 더욱 그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신태보가 남긴 두 개의 소중한 기록 때문이다. 첫째가 자신의 옥중 심문과 생활을 적은 "옥중수기"이다. 이는 당시 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프랑스 신부인 샤스탕의 요청으로 쓴 것이다. 둘째는 1801년 최초의 전국적 박해가 있은 뒤 살아 남은 여교우와 어린이들을 이끌고 눈 속에서 추위와 굶주림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산간벽지로 이동하는 여정을 적은 기록이다. 교우들은 밀고를 피하고 또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고향을 떠나 심산유곡에 숨어 은밀히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포졸의 감시 속에 여비도 장만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교우들이 서로 긴밀히 연락하며 또 먼 여행을 할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짧지만 그가 남긴 기록으로 그때의 참상과 고난을 극복하여 산간벽지로 피신해 가던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신태보는 사제 영입을 위해 북경을 왕복할 여비를 마련하느라 많은 고생을 한 뒤에 이제는 오직 자신의 구령을 위한 기도 생활에 전념하려고 긴 유랑 끝에 경상도 상주의 잣골에서 홀로 살았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고, 또 그가 수많은 교회 서적을 필사하였기에 그가 베낀 교회 서적들이 증거물로 관헌의 손에 들어가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1827년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밀고 당하리라고 짐작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려 있으나 그해 4월 22일 새벽닭이 울 무렵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상주에서 전주로 압송되면서, 전주 진영에서 문초를 받고 걷지도 못해 소와 말에 채워져 호송되고 있는 교우들을 만났다. 신태보는 그들과 밤을 세워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서 관가에 압류된 책들 가운데 자신이 필사했던 책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행적을 숨길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옥중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한 그는 그 사실을 자신이 쓴 "옥중일기"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첫날 심문에서 앞의 문답이 있은 뒤 관장은 가장 가혹한 고문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내 팔을 뒤로 결박하고 팔과 등 사이에 몽둥이를 끼워넣고 나졸 하나가 그것을 다룰 참이었다. 그뿐 아니라 말총으로 꼰 밧줄을 가지고 양 무릎과 복숭아 뼈 있는 데를 묶어놓고는 양쪽 정강이 사이에 굵다란 몽둥이를 열 십자로 끼워 두 사람이 각각 한쪽 몽둥이 끝을 타고 앉아 누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등 뒤에서 끼운 몽둥이를 잡아당기고 또 한편으로는 다리 사이에 끼운 몽둥이를 힘껏 누를 적에 내 몸은 공중에 떠오르는 것 같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온몸의 뼈가 다 바수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까무러쳤다. 관장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결박을 좀 늦추어주라고 하였다. 잠시 후 의식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 햇빛이 활활 타는 관솥불같이 보였고,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간 것 같았고, 온몸이 불덩어리 같았다."

 

이러한 심문과 문초는 하루종일 이어졌고 포졸이 뾰족한 작대기로 옆구리를 찌르며 묻는 말에 답하기를 재촉하였다. 신태보가 다른 동료들에게 해가 미치지 않도록 간단히 답하고 침묵하자 관장은 호통을 치며 다시 고문을 명했다. "내 다리를 번쩍 쳐들고 양쪽 몽둥이를 힘껏 내리 눌렀다. 내 몸에는 이미 목숨이 붙어 있지 않고, 입에는 침이 바싹 마르고, 혀가 입 밖으로 힘없이 나오고, 눈이 툭 불거져 나오고,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바른 대로 모두 불어.'하고 포졸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빨리 죽음을 내려주시기를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그날은 4월 그믐이었다. 밤이 되니 관장이 이렇게 말하였다. "날이 저물었군. 오늘은 첫날이기에 겨우 본보기만 보여주었을 뿐이지만 내일부터는 정말 호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니 오늘 밤 잘 생각해서 목숨을 보전하도록 해라." 그런 다음 내 결박을 풀고 나졸 두 명이 다리사이에 몽둥이를 끼워 옥으로 데리고 갔고 이내 저녁을 갖다주었다. 그러나 나는 앉을 수도 없고,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밥 냄새를 맡으니 구역질이 나서 조금도 먹지 못하니 막걸리 한 사발을 입에 갖다대어 주기에 조금씩 몇 모금 마셨다."

 

신태보는 첫날 고문에 이미 앉지도 먹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큰 칼을 씌워 밤을 세우게 했다. 다음날 이여진이 숨은 곳을 말하라고 윽박질렀고, 그가 이를 거절하자 다시 고문을 시작했다. "이리하여 나는 다시 주뢰의 형벌을 당하게 되었다. 바로 얽은 것을 조이는 바람에 나는 벌써 의식이 거의 없어졌는데 너무 세게 눌렀기 때문에 몽둥이가 부러졌다. 이 소리를 듣고 나는 다리가 부러진 줄 알고 질겁을 하여 내려다보았다. 나는 말이 들리기는 하여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술을 갖다주었으나 받아 삼키지 못하였다."

 

신태보에 대한 심문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아침마다 문을 여는 소리가 음산하고 불쾌하게 들렸다. 그는 고문 중에 까무러치고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하면서도 "칠극"을 해설하고 교리를 설명하며 꿋꿋이 신앙을 고백했다. 마침내 사형이 내려졌으나 집행이 연기되었다. 옥에서 생긴 상처가 곪아 악취를 풍기는 가운데 시중드는 젊은 교우들의 애덕을 감사하는 말로 그의 수기를 끝내고 있다.

 

그는 13년의 옥고를 끝에 1839년 5월 29일 70세의 고령으로 전주 감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가 남긴 수기는 야만적인 고문을 신앙으로 이겨낸 영웅들의 모습을 후세들에게 증언하고 있다.

 

[경향잡지, 1998년 10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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