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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황석지 베드로: 내가 30년 동안이나 주님을 섬겨왔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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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86

황석지 베드로 - 내가 30년 동안이나 주님을 섬겨왔거늘…

 

 

순교자들이 주님의 진리를 증언하며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1832년, 조선에는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보기 드문 홍수가 온 나라를 휩쓸어 가을이 왔어도 거두어들일 곡물이 없었다. 나라에 이렇게 큰 재앙이 들자 임금은 하늘에 재사를 드리고, 전국의 죄인들에게 특사를 내려 옥에 갇히거나 귀양을 간 사람들을 풀러주는 등 은혜를 베풀어 하늘의 노여움을 풀어보려 하였다. 수해가 극심했던 만큼 임금이 내린 특사조차도 그 범위가 넓었다. 그래서 박해 때에 옥에 갇혔거나 귀양갔던 만은 신자들도 모두 풀려나 각자 교우촌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교회는 비교적 평온하였고 제2세대 지도자들인 정하상 바오로, 유진길 베드로 등 동료들은 북경을 오가며 사제 영입운동을 극비리에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박해 속에서도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에 뜻하지 않게 포졸의 습격을 받고 교우들이 관아로 끌려가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아마도 중앙 관아의 지시는 없었지만 하급 관아의 포교들이 교우들의 재산을 노려 노략질해 먹으려는 탐욕이 일으킨 것으로 짐작되는 사건이었다.

 

1832년 9월 10일 한밤중에 서울의 포졸들이 황 안드레아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삼촌 황석지 베드로(?-1833) 등 열 명의 인근 교우들을 체포하였다. 그들 열명 가운데 아홉 명의 신자들은 형벌을 견디지 못해 배교하여 석방되거나 귀양을 갔지만 황석지 베드로만이 홀로 남아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였다.

 

황석지 베드로는 양반 신분으로 충청도 홍주(洪州)에 살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 점잖고 엄격한 사람으로 모든 일가 천척과 이웃의 존경을 받았는데, 누구도 그 앞에서는 장난스럽거나 상스러운 말을 감히 하지 못했다.

 

그가 마츤 살이 될 무렵 이웃에 살던 교우 김취득에게서 천주교교리를 배워 온 집안이 함께 입교하였고, 그때부터 환난을 무릎쓰고 한결같이 열심한 모습으로 교회의 본분을 지켜 모범을 보였다. 그러면서 가끔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입교하기 전에는 여러 교우들이 순교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그것은 지나친 영광이요, 너무 흥분한 상상력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런 잘못된 생각을 아주 버렸다."

 

이렇게 순교하려는 열망을 하던 이때, 그는 네 명의 아들을 차례로 잃는 불행을 당했다. 그리고 자식들을 잃은 슬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던 그의 아내마저 죽고 말았다. 이러한 시련을 당하면서도 황석지는 슬픔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식들과 아내가 착하게 주님의 섭리 안에서 죽었으며 또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동안 하느님께서 가족을 불러가셨음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홀로된 그는 그 뒤 서울로 와서 조카인 안드레아의 집에 얹혀 살다가 포교가 습격했던 9월 10일 밤에 체포되었다. 관장은 황석지의 신앙고백을 듣고 나서 그가 백발이 성성한 것을 보고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다만 형식적으로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황석지는 비록 형식적이나마 감히 주님을 부인하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황석지는 체포되었을 때 석방되기가 쉬운 편이었음에도 옥중의 고통을 참으며 순교를 열망했다. 그는 다른 교우들의 몸에서 나온 성물이나 압수된 서책들이 모두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말하라고 교우들에게 알려주었다. 박해시대에 다른 사람이 지니고 있다가 발각된 성물에 대해 이처럼 책을 떠맡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른 교우들이 고발당할 위험을 막아주거나 교우들의 책을 가볍게 해주려는 일종의 형제애가 만연하였고, 이를 선의의 애덕으로 생각하였다.

 

황석지 베드로는 스스로 압수된 성물들의 주인으로 행세한 애덕의 실천으로 크나큰 곤경이 빠지게 되었고, 관장은 동정심은 오히려 분노로 변해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 혹독한 문초 속에서도 황석지의 의연한 신앙고백은 다른 죄수들을 감동시켜 경탄하게 했다.

 

관장은 황석지가 여러 차례 문초를 당하고도 뜻을 굽히지 않자 그를 형조로 이송시켰다. 황석지는 형조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고백하며, 주님을 버리는 대가로 목숨을 보전하기를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인간의 인내와 한계를 넘어서는 가혹한 형벌들을 동원하여 그를 다스리려 했다. 황석지는 그 혹독한 형벌로 의식을 잃기 전에 이렇게 외쳤다." 나는 이미 늙었고, 이대로 주어도 얼마 있지 않아 죽을 것이오. 그런데 내가 천지를 창조하신 주님의 계명을 삼십 년 동안이나 지켜왔거늘 이제 와서 부끄러운 말을 해서 단 한번에 하느님의 은혜를 잃어버리란 말입니까?"

 

우리는 황석지의 이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신앙고백을 들으면서, 스미르나 교회에서 필로멜리움 교회로 보낸 보고서 가운데 나오는,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스미르나의 주교인 순교자 폴리카르포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폴리카르포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긴 지 90년이 되었으나 그분은 대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거늘 나더러 어찌 그분을 저주하란 말입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이 두 분 순교자에게 함께 하시어 영감을 주신 성령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바로 우리들의 하느님이심을 이들의 신앙고백을 통해 놀랍고도 황홀한 감격 속에 깨닫게 된다.

 

이 신앙고백을 하고 나서 황석지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감방에는 외교인 죄수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한 선비가 있었다. 선비는 황석지의 거동과 특히 사형선고를 받고도 얼굴에 가득 찬 기쁨과 평화를 보고 놀라워하며 다가와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갚아야 할 잘못이었는데 어찌하여 노인장은 죽음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죽게 됨을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그렇게 행복해 보이십니까?"

 

황석지는 대답했다. "내가 섬기는 하느님은 천지 대군이시고 모든 사람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배반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분을 위해 만 번이라도 죽임을 당하고 싶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그 교리를 우리에게도 가르쳐주시오" 하고 죄수들이 말했다.

 

황석지 베드로는 그날부터 그들에게 천주교 교리와 계명을 설명하였다.

 

황석지는 특히 성모신심에 심취하여 성모님께 의탁하고 기도하녀서 옥중의 고통을 이겨냈다. 이런 생활로 8개월이 지난 뒤, 황석지는 중병이 들어 사형이 집행되기 전인 1833년 11월의 어느 날, 지극히 평온한 가운데 옥중 순교하니, 그 때 그의 나이 일흔에 이르렀다.

 

황석지 베드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찾으러 갔을 때 감옥 안의 외교인들과 김씨 성을 가진 선비가 이렇게 말했다. "황석지 베드로께서 세상을 떠날 때, 이 감옥 전체에 환한 빛이 비쳤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러갔더니 그분의 감방에 신비로운 빛이 비치고 비둘기 한 마리가 그분 위로 빙빙 돌고 있었지요. 그리고 그분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그 평온한 죽음을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경향잡지, 1999년 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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