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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윤지충 바오로: 정교교리를 주장한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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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90

윤지충 바오로 - 정교교리를 주장한 순교자

 

 

윤지충 하면 많은 이가 제사문제로 순교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윤지충은 한국 초대교회에서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순교자로 기억되어야 한다.

 

첫째, 윤지충은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사형판결을 받고 순교한 우리 나라 최초의 순교자라는 점이고, 둘째는 한국 초대교회 평신도 가운데 선각자적 지식인으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신앙인으로 조선정부의 정교합일적 통치원리에 저항하여 정교분리의 원리를 주창한 순교자라는 점이다.

 

그는 비록 제사문제로 사회적인 측면에서 첨예한 충돌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더 의미있는 또 다른 의의를 묻어버리고 단순히 제사를 거부한 순교자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윤지충 바오로(1759-1791년)는 전라도 진산군 장구동(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조상들은 전라도 해남에 살았는데 아버지 윤경이 의원을 생업으로 삼고 살다가 결혼하고 진산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기에 윤지충은 그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윤지충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품행이 단정했으며 학문으로 일찍부터 평판을 얻었는데, 25세가 되던 해인 1783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자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진사가 된 이듬해에 윤지충은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서적 두 권을 발견하고는 그 책들을 필사하였다. 그는 이 때 천주교 교리를 대상 짐작은 했지만 실천하지는 않았다. 이 일이 있은 다음 3년이 지난 뒤에 그의 사촌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 전반에 대해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는 겁이 나서 가지고 있던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불살랐지만 신앙생활만큼은 얼밀히 실천하였다. 그가 다른 교우들과 접촉하거나 드러나게 교회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깊고 단단했던가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이때 한국교회는 제사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초대교회 건설 공로자들인 양반 지식인들도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나는 일들이 많았다. 바로 이런 때 윤지충은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집안에 모셨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의 올바른 신앙생활은 1791년 봄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상례를 치르게 되면서 사람들 앞에 드러났다. 윤지충은 모친의 상을 입고 지극치 애통해 하며 효성을 다해 모든 상례 절차와 예식을 정성으로 지켰다. 그러나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상례에 따른 제사는 지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천주교를 반대하는 세력의 한 선봉인 홍낙인이 그를 고발하여 진산군수 신사운에게 체포당하고 만다.

 

윤지충이 그의 유일한 동지인 사촌 권상연과 함께 옥고를 치르며 심문을 당하는 과정과 당당히 순교의 길로 나아간 모습은 여러 경로를 통해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옥중에서 직접 기술한 공술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진면목을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선 한국에서의 제사문제는 중국의 경우와 쟁점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곧 중국에서 제사문제는 하느님의 호칭에 대한 문제와 함께 대두된 것으로 공자를 숭배하고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순수한 종교적인 의식인가 아니면 순수한 민간의식인가에 있었다. 이에 반해 우리 나라는 하느님이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신주를 조상처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이 왜 불가피한가에 관심의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 가운데 신주를 조상처럼 모시고 제가를 지내면 안되는 까닭을 윤지충은 그의 공술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천주교의 십계명 중에 제4계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부모가 신주 안에 계신다면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신주를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주들은 나무로 만든 것이고 그것은 저의 살이나 피나 목숨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낳고 기르는 수고에 아무런 몫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영혼은 일단 이 세상에서 나가면 그런 물질적인 것에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부모의 명칭은 아주 위대하고 매우 존경받을 만한 그 무엇인 만큼, 어떤 일꾼이 만들고 꾸민 물건을 감히 가져다가 제 부모로 사고 또 실제로 그렇게 부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도 바른 이치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 양심은 그것에 승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때문에 양반 칭호를 박탈당한다 해도 하느님께 대하여 죄인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윤지충은 지극한 효성의 발로로 드리는 제례를 무조건 미신이라고 하지 않았다. 다만 나무토막에 불과한 목수의 제작물인 신주를 부모처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고 부모의 홈이 신주에 붙어있을 수가 없음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그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양반의 법도라면 차라리 양반의 법을 버릴지언정 양심상 하느님의 올바른 법을 어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잠드신 부모님께도 음식을 드리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돌아가신 부모님께 음식을 대접하듯 하는 것은 허식이요 가식적인 것이라 했을 뿐이다.

 

이제 윤지충의 공술서는 이 모든 이치를 떠나서 한 개인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든 말든 그것은 개인적 사생활의 영역으로 국가가 관여할 일이 아니며 또 실제로 조선 법에도 그런 규정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윤지충은 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일반 서민이 신주를 모시지 않는다고 해서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닌데 왜 양반인 내가 신주를 모시지 않는 것이 반정부의 죄가 되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는 신주를 모시거나 그렇지 않거나 또 제사를 드리거나 드리지 않는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종교적 신앙생활로 국법에 어긋남이 없는데 왜 국법으로 다스리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유교가 분명 양반들만의 전유물이며 유교를 국교의 위치에 놓고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는 정부의 '정교합일'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정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유교 국가에서는 종교가 국가권력의 도구가 되었다. 실제로 조선정부에서 정치와 종교는 혼동되었고 이 현상은 천주교에 대해 한결같이 적대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쟁에도 종교를 빙자한 정적 타도의 구실로 척사를 논하여 당쟁인지 척사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윤지충은 이러한 문화적 정치적 배경에서 그의 순수한 신앙을 고백했고, 그는 결국 정승인 최제공의 청으로 정조의 명을 받아 참수형을 당하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 12월 8일 오후 3시에 사형은 집행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으며, 권상연은 41세였다. 그가 죽은 형장의 피에 얽힌 수많은 기적으로 조선 신자들의 손수건에 그 피가 적셔져 북경에 보고되기도 했다. 윤지충 바오로는 선각적 지식인들이 제사문제로 교회를 떠날 때 외롭게 남아 참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한국교회를 지킨 위대한 순교자이다.

 

[경향잡지, 1999년 10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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