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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희영 루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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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91

이희영 루가 -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조선후기 천주교의 전래는 전통사상에 대한 가톨릭 도전으로 문화사적으로 일대 충격을 일으켰다. 가톨릭은 전통사회의 사상적, 사회 의식적 측면에 충격을 주었으며, 가치관 등 사회 문화 전반에 서구문명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였다. 단적으로 예술 측면에서 보더라도 국악의 음계는 '궁상각치우'였는데 가톨릭 성가가 들어오면서 '도레미파솔라시도'의 서양 음계가 도입되었다. 성당에 세워지면서 최초의 서구식 건축양식이 도입되었고, 성전 장식과 성물 등을 통해 조각, 조소 등에도 서구양식이 도입되었다.

 

이런 가운데 그림에도 서양화 양식이 들어왔는데, 이 무렵 한국 근대미술사가 시작된다. 한국 근대미술사가 시작될 무렵 서양화 양식의 도입은 역시 천주교 성화상과 상본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성화상 상본에 나타난 서양화 화법은 종래 한국 전통미술에서 볼 수 없던 원근법과 투시도법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때 서양화 화법을 받아들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화를 그린 사람이 이희영 루가(1756-1801년)이다. 그는 경기도 여주 사람으로 호를 추찬(秋贊)이라 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 가운데 64행에서 이희영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이희영 루가는 요사팟의 아주 가까운 친구인데, 여주에서 살다가 뒤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그는 본래 화공으로 성상을 아주 잘 그렸는데 역시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여기서 요사팟은 김건순을 말한다. 김건순은 이희영의 7촌 인척으로 이희영의 가족이 오랫동안 그의 집에서 몸붙여 살았다.

 

김건순 요사팟은 노론 계통의 인물로 당시 천주교 신자 대부분이 남인 계통의 선비이었음을 감안하면 당파로는 반대편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갔다가 주문모 신부를 만나게 되어 오랫동안 교리를 배우고 신자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반대 방파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는 편에 선 김건순이 이렇게 신앙으로 귀의함은, 하느님의 진리가 당파를 넘어 보편적인 구원의 진리로 받아들여졌다는 징표로 매우 뜻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김건순은 천주교에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여주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천주교를 알리며 권하여 신자가 되게 했다. 이 때 그에게 교리를 배운 사람들 가운데는 순교자 이중배 마르티노와 원경도 요한 등이 있었는데, 이희영도 이들과 함께 교리를 배웠다. 이희영 역시 김건순과 함께 노론 계통의 인물이었으나 당파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구원 진리를 받아들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희영의 동지로 강이천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교리를 듣고도 입교하지는 않았다.

 

본래 강이천, 김건순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의협심이 강했던 사람들로,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굴복하여 맺은 굴욕적인 맹약에 분노하였다. 그래서 그 원한을 씻고자 한 외딴 섬으로 들어가 군사를 기르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러나 1797년 이른바 이 해도병마(海島兵馬)계획이 탄로가 나 김건순은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고, 상인천은 유배형을 받았다.

 

주문모 신부는 이 계획을 듣고, 이런 세속적인 계획보다 찬된 진리를 신봉하고 더 높고 크게 백성을 위해 봉사하라고 권고하였다. 이희영은 입교하기로 결심한 뒤 주문모 신부를 만나 천주교를 믿는다는 태도를 분명히 밝히고, 세속의 동지들과 계획했던 해도병마 계획을 포기했다. 그리고 김건순에게 교리를 배운지 2년만인 1799년에 주문모 신부에게서 루가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영세한 뒤 이희영 루가는 세속의 벗들을 멀리하고 전광수 바르바라, 홍익한 안토니오, 황사영 알렉산데르 등과 같은 열심한 교우들과 친교를 맺고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헌신하였다. 마침내 그는 더욱 열심한 신심생활과 교회에 헌신하려는 열정으로 가족을 이끌고 고향 여주에서 서울로 이사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살면서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화공의 뛰어난 재질을 발휘하여 성화를 그렸다. 그는 또 여러 가지 상본과 성화상을 그려 열심한 교우들과 주문모 신부에게 주었다. 그는 서양화 기법을 익힌 천주교 신자로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조선왕조 순조실록"에는 이희영 루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이희영은 호가 추찬이며, 은성 사람으로 순조 원년(1801년) 신유년에 사학 죄인으로 지목되어 옥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따르지 못할 만큼 글씨와 그림의 재주가 뛰어났다고 평하고 있다. 이로써 그가 성화를 그리다 순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깝게도 이 최초의 서양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이희영의 그림은 별로 남아있지 않다. 특히 성화는 박해 중에 숨겨지고 없어졌으며,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견도'(犬圖)(숭실대학교 박물관 소장)가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뒤늦게 1984년경에 이희영의 호인 '추찬'이란 낙관이 선명한 '쌍견도'가 발견되었다. 이로써 작가가 천주교 순교자였다는 것과, 또 서양화 기법의 전래를 가늠할 수 있는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쌍견도'의 발견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자 미상인 '맹견도'역시 이희영의 작품이 아닐까하는 추정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위창 오세창은 이희영 루가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희영은 석찬 정철조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순조 원년 봄에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처형되었다. 그는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서학을 배우고 예수 상본 세장을 그려 황사영에게 보낸 것이 탄로나 자복한 것이며, 그 조카 이현(아우구스티노)도 서교로 인해 형을 받고 죽었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이희영은 주문모 신부를 도우며 온 정성을 다해 교회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를 본 교우들은 그가 언제나 기쁨에 찬 얼굴과 희망이 넘치는 모습으로 일하며 신심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이 신심 깊은 예술가의 삶은 1801년 신유박해로 저녁노을처럼 아쉽게 사라져갔다. 박해가 일어나자 곧 그의 이름이 발각되었고 포졸들이 그를 체포해갔다. 포도청에 감금된 이희영 루가는 한 달 가까이 옥중에서 심문을 받으며 온갖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흔히 예술가로 섬세한 심미적 정감을 지녔으나 결코 심약하지 않았다. 그는 주님의 진리를 증거하는데 놀라운 투사였고 결코 배교한다는 말을 하거나 다른 동료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박해는 심해졌고 이희영은 옥중에서 주문모 신부, 김건순 등이 잇달아 의금부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도 신앙의 동지들이 있는 의금부로 압송되어 여러 차례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흔들림없이 참아 받으며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다.

 

포청과 의금부의 극심한 형벌을 이겨낸 이희영은 영원한 신앙의 동지 김백순과 함께 1801년 음력 3월 2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순교하니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경향잡지, 1999년 12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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