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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이 달의 문화인물 정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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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95

이 달의 문화인물 정약종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자신이 본받고자 하는 인물의 전형을 구해왔다. 그리고 이는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나 개인적 세계관과 깊은 관련을 갖게 마련이다. 서양의 경우에는 고대적 정복 왕조가 찬양되던 과정에서 「플루타크의 영웅전」이 나왔다. 성인전의 출간은 중세적 종교신심이 드높여지던 과정과 직결되어 있다. 우리 나라도 유교주의 문화가 지배하고 있던 조선왕조에서는 각종 명신전(名臣傳)이 저술되어 학자적 관료들을 그 사회의 모델로 제시하고자 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우리 정부의 문화관광부에서는 민족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남긴 인물들을 기리며 ‘이 달의 문화인물’을 선정하고 있다.

 

 

정약종의 집안 내력

 

2002년 1월의 문화인물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 1760-1801년)이 선정되었다. 천주교 계통의 인물이 ‘이 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정약종은 1801년 조선왕조 정부로부터 ‘대역부도죄’로 사형을 받았다. 200년 전의 사형수가 이제 ‘이 달의 문화인물’로 다시 부각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그를 사형수로 만들었고, 무엇 때문에 그가 ‘이 달의 문화인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게 된다.

 

정약종의 형제로는 배다른 맏형인 정약현이 있었다. 정약현의 모친은 이벽의 누이였고, 정약현의 딸은 황사영의 부인이었다. 정약종의 동복 형제로는 형인 정약전과 동생인 정약용이 있었다. 정약종의 어머니는 윤지충의 고모였다. 이승훈은 정약종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이러한 그의 가문을 보면 초기 천주교 창설과 관련된 인물들과 통혼권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약종은 두 번 결혼했다. 그의 첫 부인은 정철상을 낳았다. 정철상은 홍교만의 딸과 결혼했으므로 정약종과 홍교만은 사돈간이었다. 첫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정약종이 재취한 부인은 유씨(체칠리아, 1761-1839년)였다. 정약종과 유씨 부인 사이에서 정하상(바오로, 1795-1839년)과 정정혜(엘리사벳, 1791-1839년) 남매가 태어났다. 그와 맏아들 정철상은 1801년의 박해 때 순교했다. 그의 아내와 나머지 자녀들은 1839년의 박해 때 순교하여 성인품에 올랐다. 이 가족의 순교 행적은 장엄한 한편의 드라마이다.

 

 

문화인물 정약종

 

정약종은 1801년의 박해 때에 새로운 신앙을 실천하다가 순교한 대표적 존재이다. 하지만 그가 문화인물로 선정된 까닭은 여기에만 있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위해 순교한 종교인임과 동시에 우리 문화의 발전에도 기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날 우리는 천주교라는 새로운 문화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 세계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사고의 틀을 갖게 되었다. 천주교 신앙은 분명 우리 문화의 다양성을 강화하는 데에 기여했다. 정약종은 그 신앙운동의 중심에 서서 이를 지휘하고 이끌어나갔으며, 널리 전파시키는 데에 신명을 다했다.

 

정약종은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손위 형이었다. 집안 내력에 따라 그는 일찍부터 학문을 널리 연구했고, 천주교 신앙에 접할 수 있었다. 정약종이 세례를 받은 때는 1786년 3월이었다. 그는 형인 정약전에게서 천주교 교리에 관해 들었다. 그리고 최창현에게서 세례를 받았고, 대부는 이승훈이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 주 신부를 도와 교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주 신부로부터 명도회장(明道會長)에 임명되었다. 명도회는 교리를 연구하고 복음을 전파하며, 도움을 주고받는 신도들의 단체였다. 그는 이 단체의 지도자로서 신도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널리 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 결과 여러 종류의 한문 천주교 서적들을 참고하여 「주교요지」(主敎要旨)를 지었다. 민중들의 표현 수단인 한글로 쓴 이 책은 한국인의 손으로 처음 저술한 교리 서적이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학자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의 문화인물로 태어났다.

 

 

정약종과 정약용

 

천주교 신앙은 원래 성리학적 가치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가르침이었다. 정약종이 실천한 천주교 신앙 자체는 조선후기 우리 문화에 일대 충격적 사건이었고, 당시의 지배층에게는 불온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천주교는 조직적 탄압을 참아내야 했다. 당시 천주교 신앙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던 신자 지식인은 천주교 신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이 상황에서 정약종과 정약용 형제는 상호 대조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정약종은 당시의 일반적 관행과는 달리 원초(原初)유학이나 과업(科業)에는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유학의 틀을 벗어나려는 듯했다. 그는 청년 시절 정통유학에 대한 관심보다는 도가 철학이나 도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생법을 터득하려고 노자의 도를 연구했지만, 오래지 않아 이 이론이 가소롭고 허황된 것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정약전이나 정약용과 같은 그의 형제들은 원초유학의 입장에서 조선 성리학의 파탄상을 극복해 보고자 했다. 반면에 정약종은 그의 형제들보다도 종교적 지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조선 성리학에서 논하는 충효의 가치에 대해 본격적인 재검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천주교 선교에 자신의 전 생애를 투자하면서 교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자신의 형제들과는 달리 순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으리라.

 

정약용은 그의 저서에서 정약전과는 유교의 경전을 함께 담론하면서 그를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였지만 정약종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정약종의 천주교 신앙에 대한 이해와 실천이 정약용 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까닭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약종의 순교와 정약전·정약용의 기교(棄敎)가 가진 차이점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은 말

 

정약종은 자신이 새롭게 터득한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 이른바 ‘십이자흉언(十二字凶言)’으로 불리던 “나라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임금이며, 가정에는 큰 원수가 있으니 부친이다(國有大仇君也 家有大仇父也).”라는 말을 했다. 이 말로 가부장적 사회체제와 조선왕조의 무작스런 권위를 모두 거부했다. 이 거부의 용기는 새로운 신앙에서 움터나왔다. 사실 우리의 근대사회는 이러한 기존 질서의 타파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에게 천주교 신앙은 내세를 향한 구원의 길이었으며, 동시에 현세를 변혁시키는 힘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증거하는 실천적 문화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순교자였다.

 

[경향잡지, 2002년 1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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