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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순교자 현양운동은 이렇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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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299

[올해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순교자 현양운동은 이렇게 하자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의 과제

 

"인간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배울 줄 아는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한국교회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순교선열들이 보여준 믿음과 삶의 표양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교회와 개인의 내적 쇄신을 이루고자 현양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1784년 창설 이후 1889년 조선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기까지 크고 작은 박해를 여러 차례 겪어오며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한국교회사에서는 이러한 박해들 가운데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를 4대 박해라 부르고 있다. 이 가운데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병인박해의 순교자들 중 103명은 한국 선교의 책임을 맡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셨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교황청으로부터 한국교회의 선교를 위임받은 1831년 이전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만은 후대의 과제로 남겨놓았다. 결국 아들과 손자가 먼저 성인으로 공경받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교회는 신유박해 200주년을 맞아 이제 그 과제를 실천에 옮기고자 나선 것이다.

 

신유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추진운동은 이미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이 끝난 뒤 교회 일각에서 거론되었으나, 1990년 중반부터 신유박해 순교자를 배출한 교구에서 순교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함께 시복시성 추진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해 오고 있다. 신유박해는 초대교회 선교활동의 거점지였던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일찍이 전주교구가 독자적으로 시복시성을 추진한 것이나 수원교구와 서울대교구가 시복시성을 위한 연구활동과 자료집 간행을 활발하게 진행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순교자에 대한 애정을

 

이러한 시복시성운동에 앞서 강조되어야 할 일은 순교자에 대한 연구이다. 그 까닭은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아픈 체험 때문이다. 1984년 103명의 성인이 탄생되기까지 한국교회는 시성에만 몰두한 나머지 시성될 순교자를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과 순교자의 역사를 신도 대중에게 보급하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그 결과 현재 신자들은 몇몇 성인 외에는 애정도 없는 관제(官制) 성인을 모시고 있는 격이 되었고, 순교성인 현양운동 역시 관제 현양운동이 되고 만 셈이다.

 

시복시성에 앞서 순교자들에 대한 연구와 역사를 신도들에게 보급하는 일을 강조하는 이유는, 순교자를 연구한 만큼 순교자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느끼고, 느낀 만큼 애정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신유박해 순교자 가운데에는 훌륭한 인격에 출중한 덕행과 깊은 영성을 갖춘 인물이 많았다. 그래서 당대의 신도들만이 아니라 후대의 신도들과 선교사들까지 애정을 가지고 성인으로 인식하는가 하면, 교회법으로 공적인 공경을 받을 성인은 아니지만 신앙공동체의 정서 안에 성인으로 모셔진 분들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성인이라는 칭호가 아니라 신앙공동체가 가슴으로 애정을 느끼는 일이며, 이러한 애정을 가진 신앙공동체가 성인으로 모시기를 열화같이 바라는 순교자를 시성시복 대상자로 추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순교자들의 영성은 곧 순수한 한국인의 영성

 

순교자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피 흘려 죽은 행위가 아니라 그가 살았던 믿음과 삶이 중요하다. 순교자가 일상생활을 통하여 보여준 믿음과 삶을 고려하지 않고 순교 자체만으로 평가한다면 결과만을 강조하는 결과주의에 빠지거나 주검 숭배나 시체 애호가 되고 만다. 또한 순교자라고 해서 삶의 읽을 거리가 없는 순교자까지 뭉뚱그려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한다면 그것은 망라주의 폐해를 범하게 될 것이다.

 

신유박해를 극복한 시대의 신도들은 마지막 법정에서 신앙을 증언하고 피 흘려 목숨을 바친 행위만을 순교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보다 신도들은 매일 매순간 하느님의 계명을 선택하고 사랑하면서 부끄러운 죄악과 악습에 대하여 죽는 것을 순교로 이해하였다. 신유박해 순교자들은 성직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성경을 피정하듯이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독서하며 기도를 배우고, 믿음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들이 이루어놓은 이 시대의 영성은 서양 선교사들의 사상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한국인의 영성이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는 신유박해 순교자들이 살던 시대의 교회에 대해,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직자의 종교교육 없이 신도들 스스로 교리를 터득하여 무지몽매한 아녀자에 이르기까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신앙을 토착화했던 교회로 평가하면서 그 시대 교회를 성령이 직접 인도하신 교회라고 단언하였다. 만약에 신앙의 조상들이 이렇게 확고한 신앙과 의지로 교회의 기초를 건실하게 다지지 않았다면 한국교회가 100년 이상의 박해를 어떻게 견뎌냈겠는가. 신유박해를 극복한 선조들이 이루어놓은 영성은 김대건 성인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한국교회에 선교사들이 진출하여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되면서 신도들의 주인의식은 희박해지고, 선조들이 스스로 노력하여 이룩한 전통은 단절되었다. 또한 신도들의 신앙은 전례와 성사생활에 의존한 데다가 교회 문화가 온통 서양 교회에 종속화되어 오는 동안 전통은 망실되고, 형식적이고 습관화된 신앙생활밖에 남지 않았다.

 

 

선조들의 신바람을 우리도 체험하자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운동이 소모적인 행사로 끝나거나 신도들에게 애정도 없는 관제성 시복시성운동이 되지 않으려면, 먼저 잃어버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다시 찾아 하나의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에 비해 영성이 대단히 뛰어난 민족이라고 한다. 신유박해를 극복한 교회가 남긴 영성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세계 교회의 모범이 될 그 무엇이 분명히 있다. 우리는 그 전통을 살려내야만 한다.

 

신유박해 순교자들은 삶의 보람을 얻고자 신앙을 선택하였다. 과연 신앙공동체의 믿음은 선조들에게 신바람과 사는 보람을 주었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믿음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도 신명과 사는 보람을 일으킨 힘이 있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찾아야 한다. 조상들에게 신앙생활은 삶을 신명나게 하는 축제였다. 교회는 신바람과 사는 보람을 체험한 신앙공동체가 만나는 축제의 장소였다. 선조들이 체험한 신바람과 사는 보람, 그리고 축제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21세기의 초입에 전개하고 있는 순교자 현양운동은 시대 상황으로 보아 참으로 필요한 운동이다. 만약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운동을 계기로 삼아 사람들에게 신바람과 사는 보람을 심어주는 교회, 축제의 마당인 교회로 거듭나지 않으면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운동은 또 하나의 소모적인 행사로 기록을 남길 뿐 아니라 한국교회는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이 글은 지난 2월 2일 서울 가톨릭 회관에서 열린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내용을 필자의 허락을 얻어 다시 간추린 것이다. - 편집자]

 

[경향잡지, 2001년 3월호, 김진소 대건 안드레아 신부(천주교 호남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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