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 살아 있는 교회의 젖줄인 순교에 대한 이해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0-31 ㅣ No.301

살아 있는 교회의 젖줄인 순교에 대한 이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신앙의 첫 출발은 주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에 대한 고백이다. 이러한 고백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 분의 삶을 조금이나마 함께 살고자 작은 몸부림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순교자 성월을 보내는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고자하는 작은 몸부림 속에 교회 공동체의 깊은 원천인 믿음의 젖줄인 순교에 대한 뜻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순교란 아마도 자신의 삶과 거리가 먼 것과 같이 생각할 수 있지만, 살아 있음의 뿌리가 기쁨과 희망에서 나오듯이 믿음의 젖줄인 순교적인 삶을 통해 내적 변화를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우리는 순교의 내적 의미를 올바로 앎으로서 현대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보다 적극적이고 보람있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말하는 순교의 내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우리 신앙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교

 

‘순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순교이며, 그리스도교적 신앙생활은 그 본질에 있어서 순교행위를 의미한다.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고 말씀하신 예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기에 ‘사랑의 순교자’가 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순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인간실존의 밑바닥에서 감동하여 그분께 ‘내어 맡김’이 바로 신앙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내어 맡김’이란 그분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자기의 인생관과 가치관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사는 것을 뜻한다. 즉 순교자이신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우리 자신이 순교자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요 신앙자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종교와 확실히 구별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다른 종교도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치며 그 종교를 지키는 열정적 모습이 있지만, 그리스도교는 먼저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님께 ‘응답하여’ 인간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신앙의 골격으로 한다. 다시 말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선행적 ‘자기를 내어 맡김’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이 자신을 바치는 것이며, 이 응답 역시 은총인 것이다. 순교를 순교로써 응답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앙이며,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원해서 희생을 받아 들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위해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최대의 증거를 하였다. 그리스도는 다가올 죽음을 알았으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을 완전한 충실성으로 받아들였다:“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 17-18).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충실성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재판 장소에서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러 세상에 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요한 18, 37). 빌라도가 법정에서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라고 심각하게 질문을 던졌듯이, 삶의 방향이 흐려지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늘 던지는 질문은 진리가 무엇인가, 그 진리를 깨닫는 삶을 산다면 기쁨에 넘쳐 살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그 진리가 무엇이라는 해답은 바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 6)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삶 전체가 우리에게 참 생명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진리 자체인 것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 32)라고 함으로서 삶의 원칙과 방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하였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과 죽음을 통해 생명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께 간다는 것은 죽음이 세상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며 성령의 생명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요한 16, 15).

 

이러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초기 박해시대 이래의 모든 신자들은 순교의 법칙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것은 “피흘림 없이는 아무런 죄사람도 없다”(희브 9, 22)는 것, 즉 죽음을 넘어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땅 위에 높이 달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끌어 당길 것이다”(요한 12, 32)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피의 증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제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참 영광과 생명에 이르는 길로서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고, 모든 그리스도 신자도 여기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이 초대에 최초로 순교로 응답한 스테파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뜨거운 열정으로 유다인들에게 전하였고, 분노한 그들이 돌로 칠 때에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용서를 청하면서 죽음을 당하였다(사도 7, 59-60). 이로부터 계속되는 초기 교회 시대의 박해는 더욱 많은 순교자들을 내게 되었으며 그 순교자들의 영광은 묵시록에서 찬양되고 있다:“그들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 있으며 하느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요한 묵시 7, 15-17). 죽음을 이긴 생명의 개선이 순교자들 안에서 보여진다. 이러한 순교는 바로 그리스도를 따라서 죽는 것으로 성서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2. 증거자로서의 순교에 대한 가르침

 

초기 교회공동체에 대한 박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계속되었지만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313년)을 통해 공식적으로 로마시대에서 끝을 맺게 된다. 정치적 의미에서 교회에 대한 박해는 4세기에 접어들면서 없어졌지만, 순교의 의미는 교회의 젖줄과 같이 증거자라는 개념을 갖고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1세기에 제 4대 교황인 끌레멘스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회의 반석과 같은 두 성인인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사도 베드로와 목이 잘려 순교한 사도 바오로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참고 견디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부당하고 불의한 고통을 당하고도 신앙을 증거하였기(martyrisas) 때문에 그들은 영광스러운 곳으로 가셨다. 바오로는 인내의 상급에 나아가는 길을 보였고... 온 세상에 정의를 가르쳤으며 통치자들 앞에서 신앙을 증거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 거룩한 나라고 갔다”(5,4-7).

 

2세기 중엽부터 교회가, 재판소에 끌려가서 말씀의 증언을 못한 자들을 증거자(confessores)라 부르고 피로써 증언을 한 자들을 증인(martyres)이라고 부르면서, 이 둘을 분명히 구분했다는 사실에서 죽음 그 자체가 특수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순교는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증거하는 의인의 죽음인 것이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악의 세력을 쳐 이기고 이미 얻은 승리에 대한 증거이며, 순교자에게서 고통을 감해주는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순교는 그리스도교의 참된 증거라고 하였다. 또한 순교자의 생애는 완덕을 갈망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성이라고도 했으며, 더구나 매일 의식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양심의 순교를 당하는 것이다. 즉 순교자들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를 증명하였기에 교회가 순교의 특수성을 재확인하고 그 고귀한 가치를 지금까지 이어받고 있다.

 

이 외에 순교를 위한 준비와 고통은 피흘리는 순교와 같다고 한 알렉산드리아의 끌레멘스, 순교는 애덕이나 신앙과 같은 그리스도인의 특유의 개념이라고 한 알렉산드리아의 치릴로가 있다. 사막의 은수자들은 절제와 희생의 금욕생활을 ‘하얀 순교’라고 했으며, 아일랜드의 수사들은 항상 죄를 고백하고 참회의 생활을 하는 것을 ‘푸른 순교’라고도 했다. 이처럼 교부들에게 있어 순교에 대한 개념은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단순히 목숨을 내 놓은 자신들의 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그리스도의 피를 증거한다는 것이다.

 

 

3. 교회의 은총의 결과인 순교

 

순교가 죽음을 통한 증거라면 죽음과 순교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또 순교를 인간성에 타고난 영적 또는 윤리적인 힘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자기 신념을 위해 죽는다는 일은 그리스도 이전에도 있었지만 기쁨을 가지고 행복에 젖어 자유로이 죽음을 택하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교의 기초가 위에서부터 온 것처럼 위로부터 교회가 주어진 은총의 결과, 또는 성령의 활동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죽었기 때문에 신앙이 계시된다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지만, 그 순교자들의 죽음에는 분명하게 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교회라는 신앙의 울타리가 있었기에 순교라는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거룩한 교회를 배경으로 순교자들의 죽음은 교회가 보증한다.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음이 증명된다. 이 죽음에는 바로 교회를 드러내는 성령의 움직임이 함께 하였기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어 한 개인적 차원의 자리가 아니라 성령의 몸으로 무장된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박해가 아무리 심하고 죽음이 아무리 무서운 순간이라도 ‘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적극적인 응답이 있을 때 성령은 이미 거기에 머무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께 순명하여 온전히 자신을 바친 순교자는 이미 성령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성령은 순교자에게 생명을 준다. 박해 때 우리 안에서 말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마태 10, 20 참조). 결국 순교자의 죽음은 죽음의 휘장을 찢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들 안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성령, 생명, 은총을 계시하는 것이다. 교회는 순교자의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자는 교회의 초자연성을 증거하며 교회가 이미 가진 신앙의 이유나 동기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순교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기에 교회의 핵심인 미사 성제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안에서 우리의 죽음이 재현되는 미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미사에서는 그 경문이 순교자들을 특별히 기념하는 것은 물론, 주의 몸인 성체는 바로 순교자의 뼈인 성석(聖石) 위에서 축성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피의 순교라는 의미는 아마도 추억속에서 기억하는 정도로 이해되지 쉽지만, 우리들 삶 속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듯이 교회 안에서 순교 정신은 신앙의 젓줄과도 같은 것이다. 교회의 지침서가 되는 바티칸 공의회는 순교의 참된 이해를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찬란한 신앙의 증거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이미 보여 주었고 아직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신앙이 신자들의 모든 생활, 신자들의 세상 생활에까지 침투하고 정의와 사람을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실천함으로써 그 풍부한 활력을 보여 주여야 한다”(사목헌장 21항). 우리는 ‘하느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가슴깊이 새기며 애뜻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이 시대의 참된 순교의 자세를 갖고 기쁨과 희망의 삶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인천가톨릭대학교 홈페이지 신학강좌, 김일회 신부]



589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