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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나가사키의 조선인 교회 400주년 (하) 조선인 복자 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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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0-08-01 ㅣ No.827

나가사키의 조선인 교회 400주년 (하) 조선인 복자 15위


이국 땅에서도 빛난 조선인 신자들의 눈부신 순교

 

 

잠복생활 하던 신자(가쿠레 기리스탄) 131명이 처형된 오무라의 호코바루(放虎原)에는 조선인 복자 13위를 기리는 ‘순교비’가 있다. 일본인 복자 205위 가운데 조선인은 당초 13위로 알려졌으나 작년 12월, 2명의 조선인이 추가로 확인됐다.

 

 

일본의 205위 순교복자 가운데 조선인 복자는 15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분들 외에도 조선인 순교자는 여럿 계신다. 그들 가운데는 사제들을 은닉시킨 죄로 처형되신 분들도 있었다. 금교령과 사제 추방령 이후 교회는 잠복생활로 들어갔고 누군가 선교사들을 숨겨줘야 했기 때문이다.

 

1613년 8월 16일 순교한 에도(江戶)의 ‘하치칸(八官) 요아킴’도 프란치스코회의 사제였던 ‘소테로 신부’에게 집을 제공하다 처형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순교한 최초의 조선인이다.

 

1614년 11월 22일, 구치노츠(口の津)의 미카엘과 베드로 진쿠로(甚九郞)의 사건은 말로 표현하고 싶지 않을 만큼 참혹했던 사건이었다. 순교자들은 온몸으로 순교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때 아닌 보리풍작과 귀부인의 발현으로 천상의 위로를 받았다.

 

1619년 베드로 아리조, 토마스 쇼사쿠(小作)는 사제들만의 감옥이라 일컬어지는 오무라의 스즈다(鈴田) 감옥에서 사제들을 몰래 수발하다 순교한 분들이다.

 

박해 당시 사제들을 가두었던 스즈다 옥터.

 

 

히데요시와 도쿠가와의 궁중에서 중요한 위치의 부인이던 오타 쥴리아는 유배지로 전국을 떠돌아다니셨다. 그의 삶은 순교만큼이나 고귀하다.

 

운젠의 뜨거운 열탕 속에서 머리에 돌을 이게 하고 남편이 배교했으니 배교하라는 강요를 받자 나는 또 다른 남편이 천국에 있어 그분을 배반할 수 없다는 이사벨라 여인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눈시울이 뜨겁게 한다.

 

히데요시 시대에는 여인과 아이들에게는 순교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도쿠가와 시대로 들어오면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체포되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이 자행되었다. 악마가 고안한 것 같은 갖은 잔악한 방법들이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순교자들이 그러했듯이 당당하고 기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전쟁에서 돌아오는 개선장군과도 같이 놀랄 만큼의 용기로 고통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분들의 눈부신 순교는 신앙의 안일주의에 젖어있는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다음은 일본 순교 복자 205위 가운데 현재까지 밝혀진 조선인 복자 15위에 대한 설명이다.

 

 

다케야 소자부로(竹屋兵衛) 코스메

 

코스메는 조선인 포로출신이었다. 자신을 데리고 온 사람의 일을 사랑과 충성으로 돌보자 주인은 그를 포로에서 해방시켜 줌과 동시에 집까지 마련해주었다. 이렇게 되자 주변의 일본인들로부터 반감을 받게 되어 관리직을 사퇴하였다. 도미니코회 소속인 2명의 사제(요한 산토 도미니코와 안헤르 오르스치 신부)를 은닉시켰다는 죄목으로 사제들과 함께 투옥되었지만 의연하게 수인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미 10년 전부터 수, 금, 토요일에 단식과 편태를 하였으며 끊임없는 기도와 영적독서를 하고 있었다. 화형 선고를 듣자 ‘나 같은 죄인에게 하느님께서 이렇게 큰 은총을 주십니까?’ 하며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드렸다. 마지막에 ‘모든 이여 주님을 찬미하라 나의 몸과 마음을 창조주께 바칩니다’ 라는 말을 남겼다.

 

부인 아네스는 감옥에 남겨졌고 아들 프란치스코는 아는 사람이 자신의 양자로 삼아 히라도로 데리고 갔으나 3년 후 순교자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히라도에서 데리고 오게 하여 부인 아네스와 같은 장소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하마노마치(浜町)의 안토니오

 

안토니오가 하마노라는 동네에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당시 사회복지의 역할을 하던 신자단체 ‘미세리코르디에’(자비의 형제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성직자를 자신의 집에 은닉시켰다. 그는 일본 최초의 신부인 예수회의 ‘세바스챤 기무라 신부’였다. 이런 이유로 부인 마리아와 2명의 아들(12살 요한과 3살 베드로)과 함께 처형되었다. 온 가족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것이다.

 

 

가요(Caius), 최초의 조선인 예수회 수사

 

유년시절 조선에 있을 때부터 승려로 은둔생활을 하다 포로로 일본에 끌려왔다. 주인의 배려로 포로에서 해방되어 절에서 구도자의 생활을 하다 사제와의 만남으로 오사카에서 ‘모레혼’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예수회 수도원에서 동숙하며 수도자가 되기를 갈망했으나 입회허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순교 직전에 예수회 입회가 허락되어 조선 최초의 예수회 수사가 되었다. 다이묘(大名) 다카야마 우콘(高山右近)을 섬기다가 우콘이 마닐라로 추방될 때 함께 갔다가 우콘 사망 이후 재입국하여 나가사키에서 유아세례와 전도사의 생활을 하였다.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는 사제들의 감옥에 두려움 없이 찾아가 면회를 청하자 온갖 모욕을 당하며 매를 맞았다. 나가사키 부교(奉行)가 더 이상 그리스도교를 전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 석방시키겠다고 했지만 그는 생명이 있는 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겠다고 답변하였다. 가요는 매를 맞고 고문당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위한 행복으로 참고 견디며 기뻐하였다. 감옥 안에서도 영적 독서와 기도에 전념했으며 지나칠 정도의 편태로 자신의 순교를 준비하였다.

 

 

카운 빈센트, 두 번째 예수회 수사

 

양반 출신으로 아마쿠사(天草)에서 세례를 받고 아리마(有馬)의 세미나리오(소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예수회의 동숙자로 체포 전까지 활약하였으며 예수회에 입회하기를 원하였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늦어졌고 순교하기 전에 허락되었다. 그는 비서직을 맡았던 관계로 일본어가 능숙했다.

 

 

시네몬(佐藤新右衛門) 토마

 

키가 컸으므로 큰 토마라 불렀다. 글씨를 몰라 전도사가 되지 못했으나 프란치스코 제3회원으로 활약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의 신심은 나가사키 교우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박해자 사쿠에몬이 그를 호출하였으나, 토마는 살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출두하지 않았다. 두 번째 호출에서 그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채 투옥되었다. 토마는 수개월 동안 감옥에 있었으며 마침내 순교하였다.

 

 

츠지 쇼보에 가스팔 바즈

 

가스팔 바즈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와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 마카오에서 생활하였다. 그런데 그를 산 사람이 공부를 시켜주었다. 그리하여 몇 년 후 다시 일본에 돌아와 마리아와 결혼하여 나가사키에서 살았고 프란치스코 제3회원이었다. 그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나가사키의 니시자카에서 화형으로 순교하였다.

 

 

아카시(明石) 지에몬 가요

 

조선의 어느 섬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예수회 신부 ‘발다살 토레스’에게 집을 제공하며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다. 로자리오 회원이며 프란치스코 제3회원으로 열심히 살다가 고발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는 재산을 빼앗겼고 그의 집에서 미사도구가 발견되자 관리인들이 부부와 사제를 크게 모욕을 주었다. 부인 마리아의 얼굴에 불을 대어 엄청난 화상을 입히고 감금하고 사형시키지는 않았으나 아카시 가요는 투옥되어 1년 후 화형을 당했다.

 

일본 순교 복자 205위 중 조선인 복자 15위.

 

 

가진 것을 모두 내놓고 가난을 선택하며 혹독한 모욕과 치욕적인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순교는 응답이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온몸으로 응답하는 행위다. 예수님께서는 순교자들의 죽음에 언제나 동참하고 계셨다.

 

순교자들은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단식과 편태로 자신의 몸을 다스렸고 새 생명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할 생명을 용감하게 버린 분들이다. 우리의 선조들 역시 이러한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셨다. 낯선 일본 땅에서 학문으로 하느님을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마음속에 계시는 주님의 소리에 충실함으로써 그분을 섬겨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천한 노예 신분에서 죄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어려운 해방신학을 알아듣고 체험한 분들이며, 주님께서 알려주신 자유의 법대로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여러분은 장차 자유의 법에 따라 심판받을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하십시오.”(야고 2,12)

 

“굴복을 당한 사람은 굴복시킨 쪽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2베드 2,19)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주보성인을 라우렌시오(로렌소)로 정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성인은 교회의 재산은 소외된 이들의 것이라 생각하여 가난한자, 노약자, 병자와 장애자들을 보호하다 화형을 받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각별히 자신들의 상황을 보호해 주시기를 기원하여 성당을 하느님께 드리고 ‘로렌소 성당’이라고 명명했는지 모르겠다.

 

조선(朝鮮)은 아침이 산뜻하고 선명하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우리 민족은 다른 나라를 한 번도 침략하지 않은 또렷한 역사를 갖고 있다. 올해는 한일합병 100주년과 조선인 교회 4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이러한 역사의 순환 앞에서 일본과 한국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어 서로 돕는 우정의 나라로 바뀌었다는 것일 게다. 아픈 역사를 지울 수는 없겠지만 평화와 공동선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펼치려는 자세는 달라져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8월 10일, 라우렌시오 부제의 순교일에 ‘조선인 로렌소성당’ 축성 400주년 기념미사를 집전해 주시는 일본 나가사키 대교구장 다카미 대주교님과 행사를 준비해 주시는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가톨릭신문, 2010년 8월 1일, 이 율리에타 수녀(예수성심시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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