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7일 (목)
(녹)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성인ㅣ순교자ㅣ성지

[순교자]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4: 윤유일 바오로

스크랩 인쇄

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9-21 ㅣ No.960

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4) 윤유일 바오로 (1760~1795)


한국교회 첫 밀사로 파견, 주문모 신부 밀입국 주도

 

 

하느님의 종 윤유일 바오로.

 

 

"지극히 높으시고 지극히 존경하올 추기경 전하.

 

금년에 저희는 조선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하나 받았습니다. 아마도 포교성성은 이 소식으로 인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으리라 생각됩니다. …

 

금년(1790년) 초에 중국 황제에게 새해 인사를 하기 위해 북경에 온 조선 사람들 일행에 끼어 조선 천주교 신자 한 사람이 이곳을 찾아 왔습니다. 윤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인데, 그는 조선의 작은 교회가 갖가지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얻고자 교회 이름으로 계획을 세우고 경비를 마련해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의문점들은 명주천에 쓰여 있었는데, 명주천은 그 조선 천주교 신자가 입고 있던 옷 안감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이가 많은 이곳 회장들만큼이나 성교회에 대해 많이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받았던 세례는 세례를 베풀 때 꼭 밟아야 할 형식에 따라 이뤄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저희는 그에게 조건부로 다시 세례를 베푸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또한 견진성사와 고해성사까지 받았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목서한과 여러 장의 지침을 갖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 황제의 성대한 80회 탄신일을 맞아 그 조선 천주교인은 또다시 조선 사람 300여 명과 함께 이곳에 왔습니다. 함께 온 조선 사람들 중에는 예비자인 하급관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은 주교좌성당에서 주교님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자진해서 천주교를 배우기 위해 애쓰는 그들의 부지런함과 성교회 가르침에 따라 살려고 하는 그들의 열성적 모습은 과히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조선은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는 중국과는 참으로 다른 나라입니다. 그들은 저희 가운데 누군가 조선에 가기를 원할 경우 입고 갈 수 있는 조선 옷들을 가지고 와서는 저희에게 선교사들을 보내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예수회 쁘아로 신부가 1790년 10월 28일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가운데 일부다. 여기서 쁘아로 신부가 '윤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지칭한 이가 바로 윤유일(바오로, 1760~1795)이다. 윤유일은 초창기 한국교회 밀사로 험난한 북경 길을 두 차례나 왕복하고 압록강 국경까지 나가 주문모 신부를 은밀히 서울로 모셔왔던 인물로, 주문모 신부 행방을 숨기다 모진 형벌 끝에 순교했다.

 

윤유일(尹有一)은 1760년 경기도 여주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사했다. 1801년 순교한 윤유오(야고보)가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ㆍ윤운혜(루치아)는 사촌 누이들이다.

 

윤유일은 권철신(암브로시오)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중 서적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됐다. 이후 스승 아우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윤유일은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았다.

 

당시 한국교회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다. 1784년에 시작한 명례방 집회가 발각됨에 따라 집주인 김범우는 유배됐고, 집회를 이끌던 이벽은 감금됐다. 이에 권일신은 이승훈 등과 함께 교회 재건운동을 벌였는데, 이들은 사제 역할을 하며 성사를 집행했다. 교계제도와 성사에 대해 잘 몰라서 행한 일이었다.

 

교리공부를 하면서 차츰 성품성사와 사제 독신제도에 대해 알게 된 이들은 자신들 행위가 합당한 것인지를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묻고 싶었다. 편지는 이승훈과 권일신이 썼지만 전달하는 게 문제였다. 이들은 중차대한 사명의 책임자로 윤유일을 지목했다. 그의 성격이 온순한데다가 심지가 굳고 교리에 밝았기 때문이다. 윤유일도 처음부터 적극적 자세로 나섰다.

 

윤유일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 일행의 수행 상인 자리 하나를 얻어 1789년 10월 북경을 향해 떠났다. 한양에서 북경까지는 삼천리 길이었다. 한겨울에 외국 땅으로 가는 긴 여행은 위험과 고통이 따랐다. 실제로 사신 일행 중 여러 사람이 도중에 병들거나 얼어 죽었다. 여행 경험이 없었던 윤유일은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외롭고 힘든 고난을 홀로 극복해야 했다.

 

수많은 위기를 넘기고 마침내 북경에 도착한 윤유일은 권일신ㆍ이승훈 명의로 된 조선교회 밀서를 프랑스 선교사 로오(Raux, 라자로회) 신부를 통해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전했다. 구베아 주교는 이때 감격을 자신의 서한에 이렇게 적었다.

 

"윤 바오로의 도착은 생각지 못했던 일로, 북경교회는 온통 환희에 젖었습니다. 아직 선교사도 찾아가지 않은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도 가르쳐준 일이 없는 나라에서 온 놀라운 복음 전파의 소식을 듣고 교회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새롭게 생겨난 이 교회에서 온 편지를 읽고, 또 이 신자에게서 사정을 듣고 한 통의 서신을 썼습니다."

 

윤유일이 이처럼 막중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조선교회는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이 다녀간 직후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안토넬리 추기경에게 조선교회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교황과 유럽교회는 크게 기뻐했다.

 

1790년 봄 윤유일이 귀국하자 교회 지도층 인사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이 일 때문에 윤유일은 같은 해 한 번 더 북경을 다녀와야 했다.

 

구베아 주교는 성직자를 보내주겠다는 조선 신자들과 약속에 따라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지만 레메디오스 신부는 조선 밀사들과 만나지 못해 조선에 입국하지 못했다. 이에 실망하지 않고 지황(사바)ㆍ최인길(마티아)과 함께 꾸준히 성직자 영입을 추진해온 윤유일은 마침내 1794년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윤유일 가묘가 있는 경기도 이천 어농성지. 강에 버려진 시신을 거두지 못해 가묘를 쓸 수밖에 없었다.

 

 

윤유일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로는 북경교회와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주 신부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이와 관련 있는 이들은 모두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마침내 조정은 주 신부 입국 경위와 그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의 이름을 알아냈고, 윤유일은 지황ㆍ최인길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체포된 날부터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그들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굳은 인내와 지혜로운 답변은 박해자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주 신부 행방을 알아내려고 모진 형벌을 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당시 그를 심문했던 포도청 관리들은 "죽음을 기뻐하고 곤장 맛보기를 마치 엿 맛보듯하며, 입을 꼭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세 사람은 결국 1795년 6월 28일 장하치명(杖下致命, 곤장을 맞고 그 자리에서 목숨이 끊어짐)으로 순교했다. 그들 시신은 강물에 버려졌다. 윤유일의 나이 36살이었다.

 

후일 조선에서 온 밀사에게서 사건 전말을 전해들은 구베아 주교는 그들이 순교 당시에 보여준 용기를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를 공경하느냐?'는 질문에 용감히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그리스도를 모독하라고 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기보다는 차라리 천 번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단언했습니다."

 

[평화신문, 2011년 9월 11일, 남정률 기자]



1,611 0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