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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양의 순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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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11 ㅣ No.1360

한국순교자 124위 복자 ④ 한양의 순교자들



한양(현재의 서울)에서 순교한 순교자들

성직자 영입에 힘쓴 윤유일 바오로, 최인길 마티아, 지황 사바는 1795년 6월 25일 장사(杖死)로 순교했다. 윤유일의 가족은 1801년 순교한 동생 윤유오 야고보와 사촌동생 윤점혜 아가타·윤운혜 루치아가 있다. 윤유일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 파견된 밀사로, 서한을 옷 안에 숨긴 후 북경에 도착했다. 구베아 주교로부터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듣고 귀국하여 성직자 영입 계획을 수립했다.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데 성공한 지황은 윤유일을 만나 함께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으로 모셨다. 얼마 후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모든 신자가 위험에 처하게 됐다.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을 했던 최인길은 주 신부를 대신해 신부 노릇을 하던 중 밀고로 체포되었고 뒤이어 윤유일과 지황도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그들은 주 신부의 행적을 발설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박해자들은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하고 그 시신을 몰래 강물에 던져 버렸다.

먼저 순교한 최인길의 먼 친척 최창현 요한은 한문으로 된 교회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큰 도움을 줬다. 지도층 신자들에 의해 총회장으로 임명되어 언제나 교우들이 타당하게 교리를 실천할 수 있도록 가르쳤고 교회 일을 열심히 도왔다. 특히 그의 강론은 유명했고 덕망도 뛰어나 모든 교우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는 동료들과 성직자 영입 계획을 세우고 앞장섰으며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도 계속해서 회장의 직분을 수행했다.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난 직후 피신했다가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온 후 밀고로 체포됐다. 그는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재판과 혹독한 형벌을 받은 가운데 자신이 ‘천주교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최인길 동생 최인철 이냐시오는 신해박해 때 형과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끌려간 후 늙은 어머니와 배교한 형제들이 눈물로 호소하자 배교를 했지만 집에 돌아와 크게 뉘우쳤다. 형이 먼저 순교하자 그는 교회 지도층의 일원이 되어 적극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며 신주를 불살라 버리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또한 동료들과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중하며 주문모 신부가 위험할 때마다 피신을 도왔다.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외숙모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박해자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설명했다. 그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유조이 체칠리아의 남편, 정철상 가롤로·정하상 바오로·정정혜 엘리사벳의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우며 신앙을 접했다. 교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세례를 받고 교리연구와 가족을 가르치는 데 전심한 그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양근 분원(현재의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으로 이주했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자주 한양에 올라가 성사를 받았다. 또한 교회 일을 처리하며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 2권을 완성하여 주 신부의 인가를 얻어 교우들에게 보급했다. 주 신부가 조직한 평신도단체 ‘명도회’의 초대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신유박해 때 체포됐다. 이미 순교할 원의를 갖고 있던 그는 어떤 유혹과 형벌에도 입을 열지 않고 오히려 천주교 교리가 올바르다는 것만을 설명하는 데 노력했다. 그는 체포된 지 15일 만에 서소문 밖으로 끌려가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정약종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는 어려서부터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에 참여하지 않아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천주를 공경하고 사랑하는 데만 힘썼다. 신유박해 때 부친과 숙부들이 의금부로 끌려가자 옥바라지를 했고 아버지가 순교하던 날 체포되어 한 달 이상 옥에 갇혀 있다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홍인 레오의 아버지이며 정철상의 장인인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고종사촌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집을 왕래하다가 천주교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먼저 입교한 아들로부터 교리에 대해 자세히 들은 뒤 입교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를 찾아가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례하며 학식을 이용하여 더 깊이 교리를 연구하면서 글을 알지 못하는 신자들을 집으로 데려와 가르쳤다. 또 냉담자 회두나 교리를 알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을 권면하는 데 열중하며 포천지역의 복음화 사업에 힘썼다. 신유박해 때 사돈 정약종의 책 상자를 집에 숨겨 두었다가 옮기는 과정에서 박해자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됐다. 옥에 갇혀서도 ‘천주교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설명하며 복음을 전한 그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최필공 토마스는 46세 때 사촌동생 최필제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천주교에 입교하자마자 교리를 실천하는 데 큰 열성을 보이며 공공연하게 교리를 전파하고 다녔다. 이로 인해 박해자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었고 신해박해 때 체포됐다. 그러나 정조의 특별한 보살핌에 마음이 약해져 굴복한 그는 평안도 지방의 심약에 임명된 후에도 여전히 믿음이 자리하고 있어 3년 뒤 심약 자리를 사임하고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1799년 체포되어 문초를 받는 동안 마음이 약해져 배교한 사실을 뉘우쳤고 정조는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지만 정조의 아량으로 또다시 석방된 그는 신유박해가 시작되기 전에 다시 체포되어 이전의 활동으로 더 혹독한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은 더욱 굳건했다. 사형 집행 날 첫 번째 칼날이 목을 비켜가며 피가 손으로 흐르자 그는 “보배로운 피”라고 외치며 순교했다.

최필제 베드로는 신앙이 굳지 못해 배교하고 석방된 후에는 거짓으로 사촌형 최필공의 자백서를 써서 관청에 제출하기도 했지만 다시 교회로 돌아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신입 교우들을 집에 모아놓고 교리를 가르쳤다. 또 교회 일을 돕거나 교리를 전파하는 데 힘쓰며 주 신부가 입국한 후에는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를 받은 그는 1800년 집에서 신입 교우들과 모임을 갖던 중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홍재영 프로타시오의 아버지 홍낙민 루카는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을묘박해 때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시간이 지나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한 그는 겉으로 천주교를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동료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받을 때 두려운 나머지 나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결코 동료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혹독한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여전히 용기를 내지 못해 유배형을 받았다가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던 용덕을 드러내며 신앙을 증거하다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일찍이 어머니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윤운혜 루치아  자신보다 후에 순교한 정광수 바르나바와 혼인했다. 하지만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를 주고 받을 수 없었고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시부모와 대립을 하다가 1799년 남편과 함께 한양 벽동으로 이주했다. 윤운혜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고 집 마당 한편에 따로 집회소를 지어 주문모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며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했다. 또한 전교에도 힘쓰며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상본을 그리거나 나무로 묵주를 제작하고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팔거나 나누어 주었다. 신유박해 때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그녀는 남편을 피신시키고 교회서적과 성물들을 다른 교우집에 숨겨 놓고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801년 순교한 홍필주의 계모이기도 한 강완숙 골롬바는 어릴 때부터 지혜롭고 정직하여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혼인한 지 얼마 안 되어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고 신앙서적을 읽는 가운데 신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 그녀는 타의 모범이 될 정도로 신앙에 대한 열정과 극기를 바탕으로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신해박해 때 옥에 갇힌 신자들을 보살펴 주다가 옥에 갇힌 적도 있었던 그녀는 한양의 신자들이 교리에 밝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어머니, 아들과 함께 상경한 후 신자들과 왕래하면서 지냈다. 또 성직자 영입 운동이 시작되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교우들에게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세례를 받고 그를 도와 활동했다. 이때 주 신부가 그녀의 인품을 알아차리고 그녀를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신자들을 돌보도록 했다. 을묘박해(1795년)가 일어나자 강완숙은 집을 주 신부의 피난처로 내놓고 주 신부의 안전을 위해 자주 이사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집은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이용됐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체포된 강완숙은 주 신부가 안전하게 피신할 방편을 마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모진 고문 속에서도 주 신부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고 옥에 갇혀서도 신심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가운데 동료들을 권면하면서 순교했다.

홍필주 필립보는 계모 강완숙의 신앙 덕행을 모범으로 보며 자랐다. 계모가 집으로 주문모 신부를 피신시키자 이때부터 주 신부의 복사가 되어 일을 돕기 시작했고 또 홍익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함께 교회 일을 도왔다. 그는 자신의 집이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자 안전을 위해 이사를 다녔고 정약종 회장을 비롯하여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신심이 더 깊어졌다. 이로 인해 이름이 알려져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지만 계모의 권면으로 “절대로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고통을 받다가 27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정 과부’로 알려진 정복혜 칸디다는 신유박해 때 성물과 서적들을 한신애의 집으로 가져다 숨겨 두고 교우들이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했다. 그러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면서 체포됐다. 문초와 형벌 속에서 잠시나마 마음이 약해졌지만 곧 이를 뉘우치고 자신이 한 일을 떳떳이 고백하고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한신애 아가타는 강완숙 회장의 전교로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되었다. 강완숙 회장의 집을 왕래하며 정복혜 등과 함께 교회 일을 도왔고 자신의 종을 강완숙 회장에게 교리를 배우도록 보냈으며 1800년 여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김연이를 비롯하여 많은 여성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강완숙 회장과 함께 여성공동체를 이끌어 나갔다. 신유박해 때 정복혜가 거두어 온 천주교 서적과 성물들을 집에 숨겼다가 얼마 안 되어 그녀의 이름이 박해자들에게 알려지면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천주교의 매파(중매인 노파)’라고 불린 김연이 율리아나는 한신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강완숙 회장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고 교리 강습이나 미사에 참석하면서 점차 신심이 깊어졌다. 폐궁(궁궐에서 쫓겨난 왕실의 친족이 머무는 거처)에 드나들면서 왕실의 친족인 송 마리아와 그녀의 며느리 신 마리아, 궁녀 강경복을 사귀면서 그들을 미사에 참석시켰다. 1800년 12월 박해가 시작되자 강완숙 회장의 부탁으로 김계완을 집에 숨겨 주었고 다음해에는 황사영 알렉시오를 집으로 피신시켜 위험에 처하게 됐다. 얼마 안 되어 체포된 그녀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궁녀로 양제궁(폐궁)에서 살았던 강경복 수산나는 집주인 송 마리아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후 자주 강완숙 회장의 집으로 가서 주문모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와 신앙집회에 참석하다가 주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신유박해가 일어나 주문모 신부가 양제궁으로 피신했을 때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를 찾아 다닌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와 주 신부의 피신을 도왔다. 그녀 또한 다른 곳으로 피신했지만 얼마 안 되어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궁녀였던 문영인 비비안나는 병에 걸려 잠시 궁궐에서 나왔을 때 한 노파로부터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후 강완숙 회장과 알게 되고 주문모 신부로부터 ‘비비안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녀는 강완숙 회장의 집을 찾아가 교우들과 함께 교회 서적을 공부하거나 미사에 참석했다. 병이 완쾌되어 궁으로 돌아간 뒤에도 최선을 다해 기도생활을 하다 발각되어 출궁 당했지만 그녀는 신자의 본분을 지키는 데 노력했고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그들의 모범을 본받으려고 하면서 자주 순교 원의를 드러냈다. 그러다 집에서 쫓겨난 뒤 더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돕고 정약종 회장이 한양으로 이주해 오자 집을 빌려 주기도 했다. 그녀는 신유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정인혁 타대오는 신해박해 때 형제들과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됐지만 배교한 형제들과 함께 집으로 돌려 보내졌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자 그의 맏형이 형조로 돌아가 “우리 집안에서는 앞으로 누구도 천주교를 신봉하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는 붙잡혔을 때 더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더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했다. 그는 최필공 형제·김이우 등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도 받으며 ‘명도회’의 회원이 되어 교리를 전하는 데 힘썼다. 또한 한글로 번역한 교회 서적들을 전해 주기도 한 그는 신유박해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1786년 유배지에서 사망한 김범우 토마스의 이복동생 김이우 바르나바·김현우 마태오 형제는 김범우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그들은 ‘명례방 사건(1785년)’으로 김범우가 유배를 간 후 어려운 지경에 놓였지만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생활을 계속해나갔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그들은 적극적으로 교회활동에 참여해 홍필주의 집으로 가서 주 신부를 만났으며 정인혁, 최필제 등과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형제는 자주 기도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강습하는 한편, ‘명도회’에 가입하여 열심히 활동했다. 그들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형 김이우는 형벌을 끝까지 견디지 못하고 포도청에서 장사로 순교했고 동생 김현우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심아기 바르바라는 성인들의 모범에 감동하여 하느님께 동정을 바치기로 결심한 후 조용히 집안에서만 지내면서 모범적으로 교회 법규를 지켜 나갔다. 신유박해 때 오빠 심낙훈이 체포되자 자신 또한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기다렸다가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며 끌려갔다. 그녀는 배교를 강요당하며 모진 형벌을 받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매를 맞다가 18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천주교가 진리라고 생각한 이현 안토니오는 홍필주의 집을 찾아가 교리를 더 공부한 뒤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정광수, 최필제, 김종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리를 실천하며 기도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홍필주와 동서 사이가 된 그는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계속되는 형벌에 잠시 마음이 약해졌지만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그는 크게 뉘우친 가운데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신앙을 굳게 지켜 순교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의 김종교 프란치스코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세례를 받고 여름에 일어난 을묘박해 때 체포됐지만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다. 그러나 신앙을 회복한 후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고 동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교리를 공부하는 한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힘썼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경기도로 피신했지만 정약용의 문초 과정에서 우연히 그의 이름이 나오면서 체포됐다. 그는 잠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기도 했지만 형조로 이송된 후에는 크게 뉘우치고 갖가지 혹형에도 굳건하게 신앙을 증거하다 사형 선고를 받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현계흠 플로로는 신해박해 때 체포된 후 석방된 적이 있었지만 곧 교회의 품으로 돌아와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교회 일에 열심히 참여했고 동료들과 자주 신앙 집회를 가지며 신입 교우들을 인도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했다. 그러던 중 주 신부가 박해로 피신하게 되자 집을 피난처로 제공했다. 그의 집은 명도회의 하부 조직이며 비밀 집회소인 ‘6회’의 하나였다. 그는 신유박해 때 피신했지만 일가 친척들이 시달림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자수하여 교회에 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몇 달을 옥에 갇혀 있던 현계흠은 황사영의 문초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의금부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손경윤 제르바시오는 신해박해 때 체포되었지만 석방되었다. 다시 신앙을 회복한 그는 동생 손경욱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교리를 열심히 실천했다. 1796년 또 체포되었지만 석방되어 다시 신앙생활을 하던 중 주문모 신부로부터 회장으로 임명된 후에는 직분을 열심히 수행했다. 그는 공동체생활을 했고 동료를 도와 신부가 거처할 곳을 마련하기도 하며 자주 미사에 참석했다. 그는 교우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아주 큰 집을 매입하여 바깥채를 술집으로 위장하여 교우들을 불러 가르치는 장소인 안채를 보호했다. 그리고 틈틈이 교리서를 베껴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밀고되어 피신했지만 아내가 자신을 대신하여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자수했다. 혹독한 형벌을 이기지 못해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형조로 이송된 뒤 잘못을 뉘우치고 굳은 신앙으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와 이경언 바오로를 동생으로 둔 이경도 가롤로는 어릴 때 병을 앓아 곱사등이 되었지만 신앙과 성품으로 신체적 결함을 극복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게 장례를 치뤘고 가족들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몇몇 신자들과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익혔고 누이 이순이가 전주의 유중철과 동정부부로 혼인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는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신앙을 굽히지 않은 가운데 “아는 신자들이 없으며 교회 서적은 불태워버려 남아 있지 않다.”고 거짓으로 자백한 후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배교하기도 한 김계완 시몬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앙을 회복한 후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의 거처를 마련하는 데 힘썼고 동료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며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거나 그의 복사가 되어 교회 일을 도왔다. 박해를 피해 피신을 다니다가 체포된 그는 문초와 형벌이 계속될 수로 신심이 더욱 깊어졌다. 이후 형조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홍익만 안토니오는 홍교만의 사촌동생이며 홍필주·이현의 장인이다. 사위 홍필주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배운 뒤 자주 성사를 받았고 가까운 신자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교회활동을 도왔으며 때때로 집에서 주 신부를 영접했다. 그의 집은 ‘명도회’ 하부조직의 집회소였던 ‘6회’의 한 곳이다. 그는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피신을 다녔지만 체포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조숙 베드로·권천례 데레사는 동정부부로 조숙은 신유박해 때 부모와 함께 강원도 외가로 피신하여 생활했다. 주변의 환경 때문에 신앙을 멀리했던 그는 17세에 권천례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다시 신앙을 회복했다. 권천례는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의 동생으로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신해박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이들 부부는 남매처럼 지내면서 기도와 복음전파, 고신극기 행위 등으로 신앙생활에 더욱 정진했다. 또 정하상 바오로가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을 왕래할 때마다 모든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던 중 정하상의 북경 재방문 때 우연히 포졸들이 조숙을 검문하게 되면서 신자라는 사실이 발각됐다. 그들의 집으로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권천례는 즉시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자백하고 순순히 따라갔다. 이때 함께 살면서 부부를 도왔던 고 바르바라(혹은 막달레나)도 체포됐다. 그들은 모진 고문 속에서 2년 이상 옥에 갇혀 지내다 1819년 8월 3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집안 사람으로 17세 때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혼인하여 1821년 장남 최양업을 낳았다. 그녀는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으며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칭얼 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던 이야기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을 오른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인내심을 갖도록 했다. 또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교우촌을 일구는 데 노력했다. 기해박해(1839년)가 일어난 뒤 남편이 한양을 오가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그의 뒷바라지를 했다. 포졸들이 교우촌에 들이닥쳤을 때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한 다음 어린 자녀를 데리고 남편일행을 따라 형조로 갔다. 젖먹이 아들 스테파노와 함께 여감옥에 수감된 그녀는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기는 형벌 속에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지만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아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고 흔들렸다. 현세적인 구원을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에 배교를 하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아들이 신학생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형조로 압송됐다.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재판관 앞에서 전에 배교한 것을 용감하게 취소하며 평화스러운 얼굴로 1840년 1월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일가족 송 베네딕토(아버지)·송 베드로(아들)·이 안나(며느리)는 좀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진천 배티 교우촌(현재의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으로 이주했다. 교우촌 신자들과 어울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병인박해가 일어나 이곳으로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그들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모진 형벌 속에서 모두 신앙을 굳게 지키며 순교했다.(참고문헌 :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 초상 제공 :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순교자들의 삶과 기록을 마주하며 순교자들이 사셨던 시간은 우리의 시간과 무척 다르다는 사실, 그리고 하느님의 시간도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순교자들의 순교 신앙은 현재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이 땅에 복음의 빛이 꺼져 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순교자들이 보여준 용기에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은 불타올랐다.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지켜보며 우리의 신앙 상태, 우리가 가진 신앙의 진정성에 대해 묵상해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듯 싶다.

*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을 앞두고’는 8월 16일 시복식이 거행됨에 따라 ‘한국순교자 124위 복자’로 꼭지 제목이 변경되어 연재됩니다.

[월간빛, 2014년 9월호, 
김선자(수산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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