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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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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세계 교회사 여행: 중세 그리스도교 왕국의 근본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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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6-09 ㅣ No.970

[세계 교회사 여행] 중세 그리스도교 왕국의 근본 토대 (1)

 

 

교황권의 확인

 

11세기 중엽에 유럽은 상대적으로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910년에 시작된 클뤼니 수도원 개혁 운동에 참여한 많은 수도원 소속 성직자들의 관심은 교회를 더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열망에 따라 그들은 교회 쇄신 방안을 모색했다. 이것은 책임을 자각한 사목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많은 사목자들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의심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신분을 영주들로부터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교들, 특히 최고의 주교인 로마의 주교를 임명하는 권한을 세속 군주가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었다. 1059년에 니콜라오 2세 교황은 교황 선거령을 공포한다.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하고, 새 교황에 대해 다른 성직자들과 로마의 백성들은 만족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때부터, 추기경은 교회 내에서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고 로마에서 가장 권위있는 성직자가 되었다. 주교 추기경들은 로마 주변에 있는 커다란 성당들을 맡았고, 7명의 부제 추기경들은 교황청 행정을 담당했다. 하지만 신성 로마제국 황제는 자신의 교황 서임권을 순순히 내놓으려 하지 않았고, 위기의 순간에는 추기경들이 선출한 교황에 맞서 대립 교황을 임명하려 했다.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도덕적 쇄신을 추진하기 위해 대규모 계획을 수립했다. 라테란 시노드(1074년)는 성직 매매와 사제의 결혼을 금지하는 규정을 반포했다. 교황은 자신의 개혁에 대해 왕과 주교들의 협조를 기대했다. 그러나 쇄신 작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교황은 성인들의 거룩함을 배우자고 호소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서품받기 전에 결혼한 사제들이 결혼 생활을 계속해 왔던 오래된 관습을 교황이 바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론에 잠시 주춤해진 그레고리오 7세는 평신도 서임권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보았다. 교황은 모든 계층에서 평신도에 의한 성직자 임명 방식을 폐지하고자 했다. 1075년에 교황은 주교들에게 평신도가 임명한 성직자를 받아들이지 말라며 이를 금지시켰고, 대주교들에게도 이러한 방식으로 임명된 이들을 축성하지 못하도록 했다. 교황은 지위에 딸린 재산과 지위 자체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재산 문제에 대해선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교황이 원했던 것은 세속 권력으로부터 주교직을 완전히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급진적이 조치였지만, 한편으로는 참신한 개혁안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러리로 치러지는 선거에 더 이상 참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교황은 전 세계 교회와 국왕들에게 <교황훈령>을 반포함으로써, 교황권을 분명히 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이 잘 수행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교황 사절을 파견했다. 지금까지 주교들은 힘이 있는 영주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신성 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 황제는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결정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교황의 결정대로라면, 황제는 권력의 많은 부분을 잃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후대 교황들과 황제들 사이에 지루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폐위를 천명했다. 그러자 교황은 황제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대한 성직자들의 충성 서약을 무효화시켰다. 결국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기 위해 카노사로 가서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결국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피해 도망가다가 죽음을 맞게 된다(1085년). 교황과 황제의 갈등은 수십 년간 풀리지 않았다. 그동안 주교직 안에 들어 있는 영적 권한과 세속적 권한을 구별하려는 논의가 많이 있었다. [2018년 6월 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중세 그리스도교 왕국의 근본 토대 (2)

 

 

수도원 교회

 

수도자들은 교회 개혁과 중세 교회에 활력을 주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오랫동안 수도자들은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제시되어 왔다. 910년 설립된 클뤼니 수도원은 베네딕투스 규칙서의 근본정신을 되살려 냈다. 수도원장들을 자유롭게 선출하고 영주와 주교로부터 수도원은 독립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클뤼니 수도원은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표방했다.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이 11-12세기에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교회 개혁의 선두 주자가 되었다. 기존의 오래된 수도원들과는 달리, 새로 설립된 모든 수도원은 클뤼니 수도원장의 권위 아래 놓이게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의 전성기에는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운동에 동참한 수도자만 해도 5만 명이나 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육체노동보다는 전례와 지속적인 기도를 강조했다. 초창기 수도원장들인 마이욜, 오딜론, 위고, 베드로 존자의 출중한 성덕과 오랜 소임 기간 때문에, 클뤼니 수도원은 11-12세기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클뤼니 수도원은 다른 수도원들과 교회를 전체적으로 개혁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 수도원은 평신도와는 아무런 연계를 하지 않은 채 교황직을 옹호해 왔고, 클뤼니 수도자들 가운데서 주교들과 교황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클뤼니 수도원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술과 건축물을 널리 보급시켰다. 클뤼니 수도원의 성당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또한 수도원 주변에는 다른 건물들이 하나둘씩 늘었다. 한편, 클뤼니 수도원과 같은 때에 설립된 다른 베네딕투스 수도원들도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오베르뉴의 라 세즈 디외 수도원, 마르세유의 생 빅토르 수도원, 투스카나의 로무알도 성인이 설립한 카말돌리 수도원이 그 좋은 예다.

 

11세기 말, 은수 생활에 대한 거대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회개와 가난에 대한 강한 열망에 사로잡힌 남녀 신자들이 자신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살던 곳을 떠나 숲, 동굴, 계곡, 외딴섬과 같은 ‘무시무시한’ 장소에 들어갔다. 그들의 성덕이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일부 은수자들은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중세 시대의 종교 생활에는 ‘은수자나 독수자의 생활’과 같은 색다른 형태도 있었다. 남녀 신자들이 성당 담벼락에 독방을 지어 놓고서 그 속에서 생활했다. 이들은 작은 창문을 통해 성무일도를 듣고, 음식을 제공받았다.

 

베르나르는 1115년 클레르보에 시토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는 이 수도원을 시작으로 시토회를 발전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베르나르 자신이 손수 설립한 수도원이 66개나 되었다. 그의 활동은 클레르보를 벗어나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2세기 중엽에 그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베르나르는 자주 수도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수도원의 다른 많은 일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성직자의 쇄신을 위해 일했다. 베르나를 느슨해진 클뤼니 수도원을 호되게 질책했다. 그는 주교들에게 가난을 실천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호소했다. 또한 로마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켰고 클레르보의 한 수도자를 위해 생활 규칙을 작성했다. 이 수도자가 바로 1145년에 교황으로 선출된 에우제니오 3세다. 베르나르는 봉건 사회를 그리스도교화 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영주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비난하고 결혼의 고귀함을 설파했고 늘어나는 이단에 맞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욱더 철저하게 수호했다. 베르나르는 최고의 영적 스승이자 마지막 교부로서 성경 묵상을 다른 모든 것을 출발점으로 여겼던 사람이다. [2018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세계 교회사 여행] 중세 그리스도교 왕국의 근본 토대 (3)

 

 

수도원 종교와 민중종교

 

중세 그리스도교는 전원적이고 봉건적인 사회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봉건 질서의 가장 윗자리에는 최고의 군주인 하느님이 있었다. 하느님의 가신과 농노들은 지상의 영주들이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했지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더 컸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생사고락을 베풀어 주시는 분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흥망성쇠와 기근 그리고 전염병은 그분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운동들은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인간적인 면을 점점 더 부각시켰다. 성지 순례와 프란치스코회의 생활방식이 이 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성직자들만이 오로지 자신들의 생각을 글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었던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꿈은 수도자가 되는 것이었다. 성인들의 축일표에는 주로 주교들과 수도자들 그리고 다른 신심 깊은 사람들만 들어가 있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일찍 과부가 되어 참회를 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선 사업을 하면서 여생을 보낸 외짝 공주들이 축일표에 들어가 있었다. 베르나르 성인은 세상을 거대한 바다에 비유했다. “이 바다를 건너가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 수도자는 다리를 이용해서 바다를 건넜기 때문에 물에 젖지 않았다. 재속 성직자들은 베드로 사도의 배를 이용해서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은 헤엄을 쳐서 바다를 건너야만 했고 많은 이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래서 신심 깊은 평신도들은 진짜로 지도자가 되는 것 대신에 수도생활을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루이 성인은 성무일도 시간경을 암송했고, 독서 기도를 바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났으며 틈나는 대로 고행을 실천했다. 또한 많은 평신도들은 자신이 죽으면, 수도원 예식대로 장례식을 치러 달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눈부신 신앙의 모범들이 보통 사람들의 신앙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유럽인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었지만 당시의 그리스도교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와는 사뭇 달랐다.

 

19세기 역사가들은 중세를 일컬어 “목가적인 만장일치”라고 말했다. 하지만 중세의 겉 표면에는 잔물결처럼 반대 운동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중세를 단순히 ‘목가적인 만장일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골 사람들은 전염병과 악천후에 맞서 생존 투쟁을 해야만 하는 절망과 실의에 빠진 문맹자들이었다. 따라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훌륭한 체제인 그리스도교와 시골 사람들의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이전의 오래된 종교적인 것들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그런 것들은 자연의 생명과 계절의 순환과 관계된 것들이었다. 예를 들어, 전례력이 생겨남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구원 사업의 중요한 단체들을 기념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연의 죽음과 재탄생을 경축했다. 그리하여 오래된 관습들이 순식간에 그리스도교화 되었고 그리스도교의 축제들이 민간전승이 되었다. [2018년 6월 17일 연중 제11주일 가톨릭마산 8면, 세계 교회사 여행 1. 고대 · 중세편 · 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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